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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유신 |  | |
| 김유신은 신라의 삼국통일에 중심적인 역할을 한 명장이자 대신이다. 신라 진평왕 17년 (595)에 만노군(지금의 진천)에서 태어났다. 그의 탄생에 관한 설화가 있다.
신라 진평왕 15년(593)인 가을밤, 만노군 태수 김서현의 아내인 만명부인은 기이한 꿈을 꾸었다. 만명부인은 금빛 갑옷을 입은 아이가 하늘에서 구름을 타고 내려와 품안에 안기는 꿈을 꾼 것이다. 이에 앞서 김서현은 화성과 토성이 안 마당으로 떨어지는 꿈을 꾸었는데 그 뒤 595년 초여름에 김유신이 태어난 것이다. 그가 태어났을 때 등에는 일곱 개의 검은 점이 북두칠성 모양으로 박혀 있었는데 아버지 서현은 유신이 일월성 일곱별의 정기를 타고 났다고 말했다.
<삼국 통일, 삶의 전부>
김유신은 금관가야 왕족의 자손으로 가락시조 수로왕의 12대손이다.
구해(가락국 최후의 왕)의 증손이고 그의 조부는 무력이다. 무력은 진평왕때에 신주 군주로서 백제 성왕의 침 략을 공격하여 구천에서 성왕을 살해하고 백제군을 무찔러 대공을 세운 인물이다.
아버지는 조부의 뒤를 이어 누차 백제를 격파한 김서현이다. 이런 왕족의 후예로 태어난 김유신 은 어려서부터 용맹과 지략이 뛰어났다고 한다. 김유신은 15세 때에 화랑이 되어 용화향도로 불린 그의 낭도를 이끌었다. 화랑으로서의 활 동은 그에게 수련과 배움의 과정이 되기도 했지만, 낭도들과의 유대관계도 이후 장성한 뒤 의 활동에 중요한 토대가 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후 그의 활동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것은 전투에서의 공로였다.
김유신이 이름을 떨치게 된 것은 35세때 629년 고구려와 낭비성 전투 불리한 전세를 역전시 키면서다. 이후 김유신은 고구려·백제와의 전투에서 수많은 전공을 세웠다. 642년(선덕여왕 11년) 백제에게 대야성 등을 뺏겼을 때 활약했고, 이해 겨울에는 고구려 억 류된 김춘추를 구출해 냈다. 648년에는 백제를 대대적으로 공략하여 642년 대야성 참패의 불예를 극복했다. 거듭된 전공은 대장군과 이찬에 이어 마침내 상주행군대총관에 이르렀다. 그의 지위와 영향력은 태종 무열왕을 뒤이은 문무왕의 즉위 뒤에도 여전했다. 고구려와의 전쟁을 계속 이끌 었고 663년에는 백제부흥을 꾀한 백제유민과 그들을 지원한 왜의 연합을 격파했다. 664년에 도 백제유민이 사비성에서 봉기하자 이를 평정했다. 또한 나당연합군이 고구려를 멸망시킨 668년에는 총사령관이 되었고 이후에도 국가의 원로로서 고문과 지도적 구실을 하여 신라진 영의 단결과 전략수립에 기여했다. 그리하여 결국은 당나라의 세력까지 물리치고 민족의 통 일을 이룩한 것이다.
<삼국불패의 신화를 남기다>
김유신은 삼국을 통일한 뒤 세계제국 당나라와 싸워서 민족의 영토를 확보하고 동아시아에 번영과 평화를 정착시킨 자주, 자존의 큰 인물이다. 그는 일찍부터 당나라의 정복야욕을 경계하고 그에 대비했다. 당나라 장군 소정방이 신라 지배층의 분열을 획책하며 신라를 침공할 기회를 노릴 때도 신 라 지배층의 결속을 굳힘으로써 계략을 물리쳤다. 이에 소정방은 신라는 상하가 굳게 결속 되어 작지만 쉽게 정복할 수 없다고 본국에 보고했다고 하니 김유신의 통솔력과 국가를 위 한 충심을 짐작하고도 남는다.
또한 그는 우리 역사에서 신하로서는 유일하게 흥무대왕으로 추존된 인물이기도 하며 80여 생애를 일관되게 충성과 지략의 무사도로 불패의 신화를 남긴 대장군이다. 이처럼 그는 역사적 정체성을 우리 민족에게 부여하고 통일국가 형성의 위업을 이룩한 민족사 제일의 인물이다.
by http://fori.new21.net/history/main.ht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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