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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시열(宋時烈, 1607~1689)
▶ 본관은 은진이고, 자는 영보이며, 호는 우암·화양동주이며, 시호는 문정(文正)이다. 1633년(인조 11) 생원시에 장원급제하면서 최명길의 천거로 경릉참봉이 되었다. 그러나 곧 사직하였다가 1635년(인조 13)에 효종인 봉림대군의 사부가 되었다. 이듬해 병자호란 때 인조를 호종하여 남한산성으로 피란하였다가 1637년에 화의가 성립되자 낙향하였다. 그리고 1649년에 효종이 보위에 오르면서 장령으로 등용되어 ´세자시강원진선´을 거쳐 집의에 올랐다가 곧 사직하고 낙향하였다.

▶ 그는 이듬해에 김자점이 파직되면서 다시 진선에 임명되었는데, 1651년(효종 2)에 그가 『장릉지문(長陵誌文)』을 찬술하면서 청나라 연호를 쓰지 않은 점이 문제되어 청의 압력으로 다시 사직하고 낙향하였다. 그 뒤에도 충주목사·집의 등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고 후진 양성에 전념하였다. 그러다가 1658년(효종 9)에 찬선으로 등용되었다가 이조판서로 승진하여 효종과 함께 북벌계획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그의 북벌계획은 효종이 그 이듬해에 죽으면서 결국 중지되고 말았다.

▶ 한편 효종이 죽으면서 그의 어머니인 자의대비의 복상문제가 제기되자, 송시열은 기년설(朞年說)을 주장하여 관철시키면서 3년설을 주장하는 남인을 제거하고 정권을 장악하였다. 그리고 그는 좌참찬 등을 역임하면서 서인의 지도자로서 자리를 굳혔다. 그 뒤, 송시열은 1660년(현종 1)에 우찬성, 1668년(현종 9)에 우의정, 1672년(현종 13)에 좌의정을 역임하였다. 그러나 1674년(현종 15)에 효종의 비인 인선왕후가 별세하면서 자의대비의 복상문제가 다시 제기되었는데, 남인이 주장한 기년설이 채택되면서 대공설(大功說)을 주장한 송시열은 실각하였다. 그리고 제1차 예송 논쟁에서 기년설을 채택한 점이 문제되어 이듬해에 덕원 지역으로 유배되었다. 그 뒤 여러 곳으로 유배지를 옮겨다니던 송시열은 1680년(숙종 6)에 다시 중추부영사로 기용되었다가 1683년(숙종 9)에 벼슬에서 물러나 봉조하가 되었다.

▶ 이 무렵, 송시열은 남인에 대한 과격한 처벌을 주장한 김석주를 지지함으로써 많은 비난을 받았는데, 이 과정에서 제자인 윤증을 중심으로 한 소론과 결별한 노론을 이끌어 나갔다. 그 뒤 청주 화양동에 은거하던 송시열은 1689년(숙종 15)에 경종의 왕세자 책봉을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제주도에 유배되었고, 이어서 국문을 받기 위해 서울로 이송되던 중 정읍에서 사사되었다. 그리고 1694년(숙종 20)에 갑술옥사(甲戌獄事)를 계기로 신원되었다.

▶ 그는 이이의 학통을 계승한 주자학의 대가로서 기호학파의 주류를 이루었다. 그리하여 이황의 이원론적인 이기호발설(理氣互發說)을 배격하고 이이의 기발이승일도설(氣發理乘一途說)을 지지하여, 사단칠정이 모두 이(理)라 하여 일원론적 사상을 발전시켰다. 예론에도 밝은 그는 성격이 과격하여 정적을 많이 만들었지만, 문하에 많은 인재를 배출하기도 하였으며, 글씨에도 일가를 이루었다고 한다. 문묘·효종묘를 비롯하여 청주의 화양서원(관련유적참조), 여주의 대로사(관련유적 참조), 수원의 매곡서원(관련유적참조)등 전국 각지의 많은 서원에 배향되었다. 저서로는 『송자대전』·『우암집』·『송서습유』·『주자대전차의』·『정서분류』·『주자어류소분』·『논맹문의통고』·『심경석의』·『사계선생행장』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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