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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술의 나라 1 |  | |
| 살기 위해 먹다가 먹기 위해 사는 족속
“모옌은 1955년 중국 산둥 성의 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났다. 그의 유년기는 배고프고 처량한 시기였다.” 책날개에 쓰여진 작가 소개의 첫 문장은 의례적인 것이 아니다. 모진 배고픔과 등을 휘게 만드는 혹독한 노동뿐이었던 그의 유년기를 가장 축소한 말이지 않나 싶다. 모옌은 특정한 상황에 처한 인간의 본능이 발현되는 상황을 포착한 소설을 주로 써오며 1980년대부터 중국 현대문학을 대표하는 청년작가로 자리를 잡는다. 장 이모우 감독의 영화 ‘붉은 수수밭’이 바로 모옌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것이라면 그가 그리 낯설지만은 않을 것이다. 우리가 비록 성냥만 당겼다하면 불길이 확 붙는 도수 높은 고량주 항아리와 노을진 수수밭만을 기억한다해도 거기에서 풍겨져 나왔던 진하고 시큼한 사람 냄새를 떠올리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다.
책세상 세계문학 시리즈 8번째 권으로 출간된 모옌의 작품 「술의 나라」는 주꾸어(酒國) 시를 배경을 펼쳐지는 기기묘묘한 이야기를 세 축으로 진행하고 있다. 아이를 요리해 먹는다는 소문의 진상을 밝히기 위해 검찰청에서 파견된 특급 수사관 띵꼬우, ‘국민문학’에 소설이 실리기만은 염원하는 소설가 지망생이자 술 박사인 리이또우의 소설 9편, 그리고 리이또우에게 진귀한 술을 받으며 그를 가르치는 모옌이라는 가상의 작가와 주고받는 편지가 바로 소설의 주된 얼개다.
주꾸어 시의 당 서기와 광산 책임자는 조사차 내려온 띵꼬우에게 온몸에 황금색 향기로운 기름이 흐르는 사내아이가 큰접시에 얹어져 나오는 일품요리 ‘치린송쯔’를 내놓는다. 권총을 드미는 띵꼬우에게 그들은 수박, 연근, 소시지 등 각각의 재료들로 특수한 공예품을 만들 듯 정교하게 만들어진 아이 모양의 요리라고 속여 그에게 치린송쯔를 권한다. 수십 잔의 독주를 연거푸 들이킨 띵꼬우는 혼미한 상태에서 치린송쯔를 먹는다. 야수들아 심판을 받아라 외쳤던 그는 주꾸어 시에서 만취한 채 한판 슬랩스틱 코미디를 펼친다. 띵꼬우가 결국 자신의 탐욕에 무릎 꿇고 똥통에 빠져 생을 마감하는데 반해 술과 편지를 주고 받던 가상의 작가 모옌과 리이또우는 주꾸어 시에서 만나 당나귀 성기 요리인 ‘롱펑청샹’으로 유명한 당나귀 거리를 거닐고 띵꼬우가 처음 접대를 받았던 것처럼 그들의 환대를 즐기기 시작한다.
술 박사 리이또우의 단편소설에 그려지는 주꾸어 시의 풍경은 명석하고 유능하다는 띵꼬우 수사관의 망에 들어온 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사실상 정확한 그림을 보여준다. 그렇기에 실제 모옌이 쓴 「술의 나라」와 소설 속 소설인 리이또우가 쓴 이야기가 겹쳐지면서 주꾸어 시의 이면이 드러나고 소설의 경계는 무너진다. 주꾸어 시는 다른 그 어떤 능력보다 주량으로 엄연한 실세가 될 수도 있는 엉망진창의 시이다. 그렇지만 수와 특징을 헤아리기 힘들 정도로 다양하고 독특한 술과 요리를 개발해 돈벌이에 있어서만은 대륙 최고 위치를 선점하고 있다. 술 마시는 것이 미풍양속이 되고 일을 시작하기 전에 석 잔 술을 하지 않으면 안되는 규칙이 있는 주꾸어 시의 실상은 우리네 세계와 다를 바 없다. 주꾸어 시의 기름기 흐르는 연회가 우리네 가정에서 차려지는 인공의 밥상과 무엇이 다른가.
“먹는 것은 이미 배를 채우는 일이 아니라 일종의 예술품 감상이랍니다…(중략)…미식가의 수준이 갈수록 높아지고, 그들의 구미가 고급스러워지고, 그들은 새것을 좋아하고 낡은 것을 싫어하며 변화가 잦아서 그들을 만족시키는 것은 무척 힘든 일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열심히 연구해 새로운 방식을 고안해내고 그들의 요구를 만족시켜야 합니다. 이것은 우리 주꾸어 시의 번영, 성장과 관계된 일이며, 물론 학생들의 원대한 앞날과 관계된 일이기도 합니다.”(2권, pp.351-352)
주꾸어 시 요리학교에서 강의되는 육아 고기 요리법은 그들의 행위가 고상하고 지적이며 이성적인 인간 존재를 위해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으로 미화되고 있다. 인류가 너나 할 것 없이 ‘살기 위해 먹는다’는 문제에서 해방되면서부터 탐식과 자극을 추구하는 타락과 부패는 시작되었다. 그러나 살기 위해 먹는 것, 풀을 씹으며 땅을 일구는 들판의 소처럼 살기 위해 먹는다는 것이 우리가 그리고 있는 인간다움에 더 가까이 있는 삶의 형태일 것이다. 그런 간소한 삶에 동의할 수 없다면, 차라리 인간이 다른 누군가에게 잡아먹힐 수도 있는 약육강식의 세계에서 살고 있다는 사실을 당연히 받아들이고 온갖 추악한 꼴을 수용할 준비를 해두어야 할 것이다. (김은선 kong@libro.co.kr/리브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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