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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동화
세계의 나무가 한번에 열린다
먼저 눈을 감고 나무 한 그루를 상상해보자. 너른 들판에 달랑 한 그루, 혹은 빽빽히 메운 열대림 속 하나만 콕 찍어 머리 속에 떠올려보자. 오가는 길거리 흔해빠진 가로수여도 좋다. 먼지를 뒤집어쓴 가로수가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는 노래를 부른다. 열대림 속에서 길을 잃은 당신에게 나무들이 성성한 이파리로 길을 일러준다. 만개한 봄날이니 더 뻗어 나가라. 그럼, 단언하건대 우리가 그리는 나무는 나무가 아니게 된다. 나무는 작은 우주가 되고 나의 수호천사가 될지니. 나무는 인간이 쓰러뜨리지 않는 한 참으로 오랜 삶을 산다. 나무의 생은 장수동물인 인간보다 훨씬 더 길다. 그런데도 단 일분도 허투루 사는 법이 없다.
「나무동화」는 이탈로 칼비노, 미셸 투르니에와 르 클레지오, 베르톨트 브레히트 등 세계 각국의 내노라하는 작가 12명이 쓴 나무이야기 24편을 모은 책이다. 나무를 모티브로 새롭게 창작된 작품은 물론, 민담과 전설로 내려오는 전래동화를 바탕으로 쓰여진 이야기들이 핀란드, 러시아, 이탈리아, 티베트, 아라비아 등 여러 나라를 배경으로 삼고 있기에 더욱 풍성한 동화의 세계를 일구고 있다. 여기에 모니카 바이스너가 드문드문 그려 넣은 삽화는 눈이 부실 정도다. 이야기의 핵심 장면을 담은 다양한 그림은 때로는 우스꽝스럽고 한편으로는 우울하고 기괴한 정교하고 환상적인 터치로 우리를 매료시킨다.

첫 장을 여는 프란츠 홀러의 〈원시림 책상〉은 도시의 마호가니 책상과 아마존의 어린 마호가니 나무가 각각 고향 아마존의 원시림으로 돌아가려는 소망을, 도시 구경을 하고 싶은 맘을 보름달에 빌면서 벌어지게 되는 말그대로 동화같은 풍경을 그린 창작물이다. 빌딩의 꼭대기로 올라간 어린 나무는 땅콩 상인과 국수 공장 사장을 내쫓으며 무럭무럭 자란다. 자연과 인간의 대립구도는 미셸 투르니에의 〈도임링씨네 꼬마의 가출〉에서 도드라진다. 벌목꾼 아버지의 크리스마스 선물, ‘초현대식 메르큐어 빌딩 23층으로 이사’를 거부하기 위해 꼬마 피에르는 가출을 감행한다. 숲에서 길을 잃고 오게르 가족과 하루밤을 보내면서 피에르는 나무 이야기를 듣는다. 오게르는 아담과 이브가 선악과를 따먹어 낙원에서 추방된 것을 이르러 이렇게 말하며 피에르에게 나무의 나라로 갈 수 있는 큰 장화를 선물한다.

“이것이 바로 인간에게 내려진 저주야. 인간은 식물의 세계에서 쫓겨나 동물의 세계로 떨어졌지. 동물의 세계가 뭐냐고? 사냥, 폭력, 살인, 공포가 난무하는 세계지. 반대로 식물의 세계는 태양과 땅의 협력 속에서 고요히 성장하는 세계야. 그래서 어떤 종류의 지혜든 간에 모든 지혜는 나무에 관한 명상을 기반으로 할 수밖에 없지. 숲속에 사는 식물적인 인간을 뒤쫓는 명상 말이야.”(P.43)

탄생의 기원을 거슬러 올라가는 동화들도 제법 많다. 인간이 다른 동물보다 더 오래 살 수 있게 된 까닭과 빈곤이 늘 존재하는 이유를 캐내고 있는 자크 루보의 〈마법에 걸린 사과나무〉, 하늘에서 떨어져 땅 속 깊이 스며드는 물이 전부였던 시대에 강과 바다를 만들어낸 나무 크비포의 이야기를 그린 르 클레지오의 〈크비포〉는 짧지만 굵은 상상력의 진동을 느낄 수 있게 한다.

나무는 전통적인 상징들 가운데 가장 기본적인 것에 속한다. 조화와 성장, 그리고 증식, 생성과 재생의 과정을 상징하는 나무는 끊임없이 지속되는 생명의 불멸성과 세계의 축을 말한다. 이토록 많은, 이름도 쟁쟁한 작가들이 나무의 상징성을 놓치지 않고 동화라는 형식과의 평화로운 만남을 주선하고 있다. 그들은 나무와 동화의 힘을 그대로 끌어와 인간의 삶을 드러낼 뿐이라는 식으로 자유롭게 쓰고 상상한다. 마치 자신들의 필력은 아무 것도 아니라는 듯.

그러거나 말거나 나무 없이는 어릴 때 추억 절반이 공중으로 날아가 버린다. 둥그런 나무 그늘 아래서 열 손가락에 복숭아 꽃물을 들이고 누워 눈으로 햇빛을 쫓던 순간이, 숨바꼭질을 할 때 늘상 기둥이 되어주었던 늙은 느티나무가. 아마 그 나무들은 나보다 더 오래, 더 많은 사람들과 살아갈 것이다. 「나무동화」는 한꺼번에 이것들을 깨워주며 지나간 나무와 추억과 그것들과 함께 해온 평온함과 자연스러웠던 삶을 열어준다. (김은선 kong@libro.co.kr/리브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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