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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향기
잊혀진 사람들에 관한 아스라한 기억
영화에서 터널은 세월을 나타내는 상징으로 쓰인다. 예를 들어 한 중년 남자의 인생을 되짚어 가는 <박하사탕>에서 주인공 영호는 터널 앞에서 ‘나 다시 돌아갈래’라며 기차에 몸을 던진다. 터널은 칠흑처럼 어두워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공간. 하지만 터널 끝에서 비어져 나오는 한 줄기 빛이 있기에 기차는 어둠을 통과한다. 인생도 마찬가지이다. 멀고 희미하지만 밝고 따스한 빛이 당기는 힘이 있기에 우리들은 또 하루를 산다.
작가 송기원이 「인도로 간 예수」이후 8여년 만에 묶어낸 네 번째 창작집, 이 책에서 작가는 그가 지나온 어두운 터널 같은 세월을 이야기하고 있다. 표제인 ‘사람의 향기’는 머리를 어지럽게 하는 비싼 향수에서 풍겨 나오는 것이 아니다. 작가가 터널을 지나면서 겪었던, 가슴 깊숙한 곳에 간직된 사람의 냄새다. 30~40여년이 지난 이 기억들은 오래된 사진첩 어디를 뒤적여도 나오지 않는다. 작가의 기억은 사진에 찍힐만한 행복한 것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장돌뱅이의 아들로 태어나 시장판에서 험난하게 자란 작가가 추억하는 이들은 사촌 형, 옆집 누나, 의붓 아버지 등 아주 가까운 사람들이다. 그러나 그들의 삶은 우리가 흔히 접할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니다.

‘끝순이 누님’의 주인공은 화자의 외가가 있는 ‘가메뚝’에 살던, 유난히도 큰 눈에 흰자위를 희번덕이는 당달봉사이다. 당달봉사라는 말이 거짓말인 것처럼 용케 소리나 냄새만으로도 누가 누군지 식별해내던 끝순이 누님. 그녀는 동네 사람한테 겁탈을 당해 아이를 배게 된다. 이를 알게 된 그녀의 어머니가 화병으로 세상을 뜨고 고향을 떠나 혼잣몸으로 아이를 낳아 키운 끝순이 누님은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 고향으로 돌아온다. 일 나간 아들 내외를 대신해 손자를 보아주고 있는 할머니가 된 그녀. 끝순이 누님이 화자에게 다가와 조심스럽게 한 말은 독자의 마음까지 ‘찡’하게 만들기에 충분하다. “근디 말다, 나가 여그 온 그러께부터 해마둥 추석이나 설 같은 명절 때먼, 누군 중 몰르제만, 가게문 앞에다가 새벡같이 조구랑 서대랑 육괴기를 살모시 나놓고 간단 말다아.”

그 밖에도 각 단편들의 주인공들은 안짱다리, 정신박약아, 나병환자, 행려병자 등 ‘사회’라는 금의 바깥에서 삶을 산 사람들이다. 그러나 그들은 나름대로의 안간힘으로 세상 안에 발을 딛으려고 애썼던 이들이다. 그런 그들이 살아온 세월은 터널 속 어둠과 다를 바가 없었지만, 작가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그 어둠 속에서 그들의 영롱한 삶을 채취해냈다. 그리고는 작품 말미에서 ‘가까스로 자의식에 자유로워진 내가 비로소 사물들 본래의 빛깔을 되찾으려는 몹시 조심스러운 시도인지도 모른다. (…) 나의 자의식에서 자유로워진 순간, 저 모든 사람들은 나와는 전혀 무관하게 저마다 제 고유의 빛깔을 빛내며 더욱 진하게 사람냄새를 풍기고 있다.”고 말한다.

지하철에서 이 책을 읽으며 눈물을 참느라 혼이 났다. 소설 속 인물들의 인생이 가여워서가 아니다. 이미 지나가버린 세월, 그들이 지나왔을 어둡고 험난한 터널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작가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기차가 단숨에 터널을 통과하듯이 이야기를 풀어나갔다. 어렵고 힘든 세월을 떠올리는 것을 고스란히 독자에 맡겼다. 30km의 시속으로 지하를 가로지르는 열차 안, 펼쳐놓은 책 위에 껌 파는 할머니가 ‘쥬시 후레쉬’ 하나를 올려 놓는다. 자글자글한 주름 한 줄 한 줄에 얹혀진 곡절은 또 얼마나 많을까? 그 생의 무게에 눌려 ‘휴-’하고 푹 꺼진 한숨이 먼저 나오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고지혜 gomgom@libro.co.kr/리브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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