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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입이 없는 것들
비참하고 싶은 비참
이성복 시인이 10년만에 시집을 냈다. 어쩌면 그가 누구이고 어떤 시인인지 모르는 채 그의 시집을 보게 되는 독자들도 있을 만큼 시간이 흘렀다는 얘기다. 더구나 그 10년 동안은 특별히 어떤 시집이 독자들에게 사랑 받았다는 얘기를 듣지 못한 그런 시간이다. 그게 정상일지도 모르겠다. 원래 시란 그렇게까지 사랑 받을 수 있는 존재가 아닌지도 모른다. 뱀의 독이 치명적이듯이, 시란 치명적이어서 시인에게나 독자에게나 반드시 대가를 요구하는 법이다. 그 대가가 단순히 외상과 같은 것이 아니라 삶 그 자체일 때 어떻게 함부로 사랑할 수 있을까.
「아, 입이 없는 것들」을 읽으며 처음 받은 느낌은 맹숭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맹숭 맹숭한 것 치고 다 읽고서 기억나는 것, 좋아지는 시들이 많다. 위의 〈슬퍼할 수 없는 것〉이란 시가 그렇게 기억에 남는 시 중의 하나다. 어째서 맹숭한 것이 기억에 남고 좋아질까. 시인의 어법을 패러디하여 말하자면, 그것은 좋아도 좋아라 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일까. 시인은 〈시인의 말〉에서 다음의 말을 남기고 있다.

“지난 세월 씌어진 것들을 하나의 플롯으로 엮어 읽으면서, 해묵은 강박관념들을 만날 수 있었다. 이 길은 돌아나올 수 없는 길, 시는 스스로 만든 뱀이니 어서 시의 독이 온몸에 퍼졌으면 좋겠다. 참으로 곤혹스러운 것은 곤혹의 지지부진이다.”

곤혹이란 ‘굳이 못 갈 것도 없지만 끝내 못 가리라는 것’을 아는 것, 그것이 ‘슬퍼할 수 없는 것’이고 ‘슬퍼할 수조차 없는 일’이라는 것을 아는 것과 같은 상황이다. 아, 시는 눈이 아릴 만큼 좋으나 곤혹을 좋아라 할 수는 없음이다. 나에게는 시인이 〈시인의 말〉에 남긴 ‘곤혹스러운 것은 곤혹의 지지부진’이라는 말과 〈내 생에 복수하는 유일한 방법처럼〉에서의 ‘비참하고 싶은 비참’이 자꾸만 공명한다.

시인의 말대로 이 시집은 하나의 플롯으로 엮어 읽을 수 있을 듯 하다. ‘제1부 물집’에서는 ‘벼랑에서 힘껏 너를 떠다밀었다’. 누군가를 살해했으며, 혹은 누군가 살해당했다. 그래서 이제 ‘당신도 없이 나를 견디’지만, 곧 ‘마라, 네가 왜 어떻게, 여기에’다시 나타나고, 어떻게 나타날 수 있었는지 모르지만 화자는‘나를 믿지 마라’고 ‘나를 사랑하지 마라’고 한다. 따옴표 안의 싯구가 어떤 시에서 인용되었는지 밝혀야겠지만 그렇게 되면 원고가 너무 난삽해져 보여 생략하기로 한다. 어쨌든 1부에는 살해와 환생의 이야기인데, ‘그 환생에도 별로 즐거울 것은 없다’. 곤혹스럽기 짝이 없다. 이 시집의 해설을 쓴 강정에 의하면 ‘마라’는 불교에서 윤회를 지배하는 수호신이라는데, 어쨌든 그 윤회에 별로 즐거울 것이 없다. 이것은 ‘돌아나올 수 없는 길’, 어찌 보면 빼도 박도 못하는 그런 것이다.

사랑은 사랑하는
사람 속에 있지 않다
사람이 사랑 속에서
사랑하는 것이다
-〈꽃은 어제의 하늘 속에〉

그러므로 사랑은 영원하다. 아니 그 사랑은 시간의 영원성에 다른 이름일 것이다. 그래서 꽃병의 꽃이 시들어가도 꽃은 어제의 하늘 속에 있다. 그 꽃의 영원성은 ‘지금 이곳이 살아야 할 곳이 아니라는 표지처럼’푸르다. 그러므로 그 영원성은 순간성이기도 하다.‘제2부 느낌도 흐느낌도 없이’는 가상 죽음을 사는 이야기가 아닐까 하는 느낌을 받았다. 혹은 환생한 자의 이야기. 그것은 〈어째서 무엇이 이렇게〉, 〈차라리 댓잎이라면〉, 〈시집간 우리 누이들처럼〉, 〈측백나무 잎새 위에 오는 눈〉 등에서 받은 느낌이다. 가상죽음 혹은 환생한 자는 ‘꽃이 진다 서럽다고 하지 마라 넌 잘못 생각하는 것’이라고 일갈하며 ‘느낌도, 흐느낌도 없’이 길 없는 길을 돌아간다. 순간으로서의 영원성, 영원으로서의 순간성에 도달할 수 있는 것은죽음도, 윤회도 아니다. 그것은 도달할 수 없다. 그러니 우리는 슬퍼할 수조차 없다.

냉랭하기 그지없는 이것은 그러나 이어지는 ‘제3부의 진흙 천국’을 긍정하는 길로 통한다. 3부는 현재적 삶의 이야기다. ‘비참하고 싶은 비참’이라는 정교한 복수의 기술로 세상에서 행복을 훔쳐낸다. 그 행복은 길 없는 삶을 긍정하기 위해 만들어낸 ‘비참의 가상임신’이다. 〈좋긴 한데, 쪼끔 부끄럽다고〉, 〈그날 우리는 우록에서 놀았다〉등을 포함한 3부의 시들은 비참하고 싶은 비참의 환희와 긍정을 노래한다. 시집 날개의 설명에 의하면 ‘비루함인 채로 생은 또한 아름’답다. 시인은 생의 비루함까지 사랑한다. 아니 다르게 말하자면 비참의 방법으로 생의 사랑 속으로 들어섰다고 해야 할 것 같다. 사랑은 사랑하는 사람 속에 있지 않으니.

그래서 이 시집을 읽고 나는 시인이 1부의 마지막 시에서 던졌던 질문에 답할 수 있을 것 같다. ‘이 세상에 당신은 계 모임 하러 왔던가’라는 질문. 나는 그렇다, 라고 말한다. 그렇다. 현재는 영원성과 분리되지 않는다. ‘이곳’은 영원한 것의 ‘이곳’과 분리되지 않는다. 이곳에는 곤혹의 지지부진이 아니라, 비루한 인간이 되는 것의 해학적인 꿈속으로 들어서는 환희가 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정말로 중요한 것은 우리를 존재케 하는‘가상 임신’을 하는 것이다. 이 시집은 그러한 사랑의 픽션에 대한 시집이다. (이성문)


by 리브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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