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좋은글 나누기
joungul.co.kr 에서 제공하는 좋은글 입니다.
바쁜 일상 속에 잠시 쉬어가는 공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레퀴엠
꿈꿀 수 없는 세대의 몽환극
어째 이상하다. 길거리의 욕설들로 소설을 난자하고야 마는 펑크소설들이 속속 출간되고 있다. 90년대 이후 한국은 고도 소비사회라는 인식이 지배적이었고, 우리 모두는 계급 따위는 존재하지 않은 것처럼 행동했다. 소설도 그랬고, 그것을 읽는 독자도 그랬다. 중산층 문학과 신 소비세대의 감수성을 속삭이는 문학에 염증이 나서 그랬을까. 무자비한 길거리 ‘계급’이 입국하여 몽롱하게 뭉개져 가는 두뇌에 안테나 다발만 잔뜩 뽑아놓고, 주파수를 돌리고 있던 일군의 한국 독자들과 접선하고 있다. 그런가보다. 허버트 셀비 주니어의 「레퀴엠」을 사기 위해 동네 서점에서 이틀을 기다려야 했다. 그 정도였단 말인가.
「레퀴엠」은 무엇보다 가히 촌철살인적인 풍자와 요설의 융단폭격을 펼쳐 보인다. 이 소설의 랩핑은 사람을 ‘아하하하’웃긴다. 가학의 극치에 이르는, 길거리 쓰레기통에서 건져 올린 비유는 킥킥거리게 만든다. 때문에 이 소설의 리듬에 몸을 싣게 되면, 상승의 쾌감으로 한껏 고조되어 단숨에 끝까지 읽을 수 있다. 물론 목적지에 도착하면 기다리고 있는 것은, 모든 몽환극의 결론이 그렇듯 좌절의 밑 없는 바닥이지만 말이다.

“코카인과 동정심 약간, 그리고 잘 빨아줄 놈 하나만 부탁해. 몇몇이 낄낄댔다. 오오오오오오, 이런 나쁜 년.”(P.31)

마리온의 대사는 이들이 필요로 하는 것을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마리온, 친구사이인 유태인 해리와 흑인종 타이론. 이들에게는 길거리를 배회하며 마약이나 하는 것 외에 달리 주어진 일이 없다. 그리고 ‘아메리칸 드림’시대의 패배자를 대표하는 해리의 엄마 사라는 식탐에 중독 되어 외로움을 달래며 일상을 지탱할 뿐이다. 초콜릿을 혓바닥에 올려놓고 입 속에 번지는 향에 취하는 사라의 중독은 해리가 마약을 찾는 것과 같다. 그리고 이 패배자의 삶들은 위대한 미국의 아이덴티티를 통합하는 훌륭한 도구인 텔레비전에 중독 되어 있다.

텔레비전 중독자 사라에게 유일한 희망은 방송국의 쇼 프로그램에 출연해 자기 삶을 미국사회에 상징적으로 통합하는 것이다. 그녀는 빨간 드레스를 입고 텔레비전에 화려하게 등장하기 위해 다이어트를 결심하고 약물에 손을 댄다. 병원에서 합법적으로 유통되는 약물이지만, 그것의 결과는 뻔하다. 약물남용 때문에 그녀는 환청을 듣게 되는데, 목소리는 이렇게 속삭인다. 조심해! 조심해! 그러나 조심해야 할 이유가 그녀에게는 남아있지 않았다. 그녀의 삶은 쇼에 등장하지 못하고 응급실 수술대 위에서 천장의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바라볼 뿐이다.

해리는 길바닥 위의 자기 삶을 구출하기 위해서는 희박한 가능성에 도전하는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헤로인 1파운드를 얻기 위해 노동을 하고 그 대가로 얻은 헤로인을 길거리 동료들에게 파는 것이다. 이 사업으로 돈을 벌어 커피숍과 시와 음악을 만드는 삶을 꿈꾼다. 자신과 같은 길거리 계급의 주머니를 털어 빠져나가는 것 외에는 다른 방도가 없다. 영화 〈트레인스포팅〉의 화두 ‘배신’은 이런 것이다. 그러나 세상이 만만할 리 없다. 가능성은 애초에 희박한 것이었고, 그들은 콧물을 질질 흘리는 마약 중독자가 되어간다.

지독하게 웃기고 우울한 이 이야기를 써낸 허버트 셀비 주니어는 영화 〈브루클린으로 가는 마지막 비상구〉의 원작자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작가다. 1978년에 발표한 「레퀴엠」 역시 사회의 빈민층과 길거리 노동계급을 소재로 다루고 있다. 셀비는 리처드 프라이스의 말대로 소설을 쓰기 위해서는 유럽에서 태어나지 않아도 되고, 까무러칠 정도의 천재성이 없어도 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문학의 세계에도 길거리의 쓰레기통이 있으며, 오줌에 섞여 흘러나오는 알코올의 승화가 있다. 계급문학을 경험한 세대에게 이런 인식은 낯선 것이 아니다. 그러나 계급문학은 낭만적이었고 지나치게 이상적이었다. 셀비의 펑크소설은 어떤 낭만이나 이상에도 경계의 눈초리를 보낸다.

“세상에서 가장 진실한 사람이 있다고 해도, 그게 커피 값이랑 무슨 관계가 있는 지 묻고 싶어.”(P.78)

펑크문학은 68혁명과 우드스탁 축제의 여운이 남아있던 1970년대와 거품경제의 이면에 빈부의 격차가 가속화되기 시작하던 1980년대를 가로질러 등장했다. 펑크문학은 전 세대의 히피니즘과 달리 ‘축제로서의 혁명’과‘공동체의 아이덴티티’에 대해 어떤 기대도 가질 수 없었던 세대의 것이었다. 그들은 마약과 상품, 텔레비전, 중산층의 꿈에 중독된 사회에 풍자와 요설로 융탄 폭격을 감행했다.

중독은 펑크소설의 중심소재가 되었고, 지금의 삶에서 벗어나는 것은 자기 계급을 배신하는 개인적 입신출세주의 뿐이라는 사실을 절실하게 깨닫고 있었다. 자기를 위한 윤리적 배려 따위는 먹고 마시고 섹스 하는 것으로 충분했다. 허기야말로 자신을 확인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므로. 이 모든 것에 대한 분노와 절망으로 맨 땅에 헤딩하는 자기파멸의 미학이 자리하는 것이다. 공동체의 이상주의를 가질 수 없었고 달리 삶을 꿈꾸는 것도 불가능했기에, 풍자와 요설은 적확한 대상을 잃고 몽유병처럼 길거리를 배회한다.

자본이 세계화되어가고 빈부의 격차가 숨길 수 없는 잔혹함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21세기의 초입에서 펑크소설이 미국과 유럽에서 재조명되고 한국에도 상륙하고 있다. 이상할 게 없다. 중독이 일반화된 사회에서 펑크소설과 셀비의 「레퀴엠」은 우리에게 이렇게 속삭인다.

조심하라구, 정말이야. 항상 네 발 밑을 조심해야돼! (이성문)


by 리브로
 
비즈폼
Copyright (c) 2000-2025 by bizforms.co.kr All rights reserved.
고객센터 1588-8443. 오전9:30~12:30, 오후13:30~17:30 전화상담예약 원격지원요청
전화전 클릭
클린사이트 선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