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좋은글 나누기
joungul.co.kr 에서 제공하는 좋은글 입니다.
바쁜 일상 속에 잠시 쉬어가는 공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물밑에 달이 열릴 때
달빛과 어머니, 에로티시즘의 저 깊은 곳
지난 여름, 영주 부석사를 찾아 혼자 나선 길 위에서 무슨 생각을 했었는지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버스는 사나운 속도로 달렸고, 내 생각들은 도무지 그 속도를 따라잡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부석사 아래 민박집의 가장 작은 방에 짐을 부려 놓았을 때는 이미 해가 기운 후였다. 그날, 손바닥만한 창문이 있던 그 작은 방에 죽은 벌레처럼 웅크리고 있던 나를 밖으로 끄집어낸 건 하얀 달빛이었다.
달빛은 야트막한 산자락 위에 있는 부석사로부터 내려와 민박집의 허름한 앞마당을 비추고 있었다. 흰 우유처럼 쏟아진 그 달빛 아래에서 풀벌레가 재잘재잘 울었고, 먼 곳에서 물 흐르는 소리가 들렸다. 이상했다. 민박집에 든 손님들도, 주인 아주머니도 모두 잠든 시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모든 게 깨어나고 있었다. 그때 나는 왜 태양이 남성과 제우스신에 비유되는지, 달은 왜 여성이며 어머니일 수밖에 없는지 깨달았다.

시인 김선우의 산문집 「물밑에 달이 열릴 때」를 읽으며 부석사 여행을 떠올린 건 아무래도 달빛 탓이 크다. 부석사 아래 민박집 마당에 뿌려진 달빛의 스산하면서도 풍만하고 평화로운 느낌이 이 책에는 담겨 있다. 달빛 뿐 아니라 어머니의 품이, 그 농밀하고 따사로운 세계가 궁금한 사람이 있다면 이 책이 어떨까. 총 세 개의 장 가운데 1부에는 시인의 강원도 사랑이 자분자분 살아 있다. 어릴 적 기억과 더불어 달과 어머니, 그 여성성과 충만한 에너지에 대한 예찬이 가장 많이 담겨 있는 부분 역시 여기다. 2부에서 이야기하는 것들은 1부의 그것보다 훨씬 현실적이며 구체적이다. 길 가던 그녀의 발목을 잡아채던 늙은 거지노파의 섬뜩했던 손길과 화가 베이컨의 그림을 처음 보았을 때 느꼈던 충격을 상기하면서, 그녀는 자신 속의 살욕과 공포와 분노에 대해 정직하게, 냉정하게 고백한다. 3부에는 ´한겨레신문´에 연재한 독서일기 중 13편을 가려 수록했다. 다짜고짜 ‘나는 조르바를 사랑한다’(「그리스인 조르바」, ´신성한 야만´, p.21)라고 선언하는 그녀의 독서일기에는 시인 김선우가 아닌, 소박한 독자로서의 김선우가 나타난다.

˝객방을 안내해주고 요와 이불을 가져다 준 어린 비구니가 장지문을 닫다가 문득 고개를 돌려 내게 묻더군요. ´출가하시려구요?´ 천천히 나지막한 목소리로 물어오는 그녀의 눈빛, 나는 가슴이 두근거리고 있었어요. … 시인이 되어야 겠다, 라고 나는 천천히 나지막한 목소리로 중얼거렸습니다. 내 문학이 도달할 수 있는 궁극의 지점에서 부끄럽지 않게 저이를 다시 만날 수 있어야 겠다, 라고 생각했더랬지요.˝ (p.106)

이 책이 ´김선우의 좋은 시들이 어디서 오는지 그 비밀을 조금 들여다보게´ 해준다는 시인 안도현의 설명은 틀리지 않다. 어미의 몸, 그 어미가 쪼그려 앉아 오줌누는 대지, 그리고 내 몸을 향한 알 수 없는 연민과 그리움의 시선이 돋보이던 그녀 시의 흔적은 이 책 곳곳에서 숨쉬고 있다.

김선우가 ´은밀히´ 아끼는 그림 몇 점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은 이 책의 미덕이다. 시인은 ´달빛 속에서 감상하기 좋은 몇 장의 그림´이라며 다섯 점의 그림을 수줍게 내민다. 쿠르베의 ´세계의 근원´, 난쟁이 화가 로트렉이 그린 ´키스´, 프리다 깔로의 ´숲속의 두 누드 혹은 대지 그리고 나의 염소와 나´ 등 그녀가 고른 그림들은 모두 독특한 관능의 힘으로 시선을 잡아끈다. ´근원을 알 수 없는 기이하고 따뜻한 에로티시즘이 묻어나는´ 이들 그림에서 느껴지는 건 ´어머니의 따뜻한 팔뚝´이다. 여기서 다시 한번 달빛과 어머니는 동일시된다.

이 책은 그냥 그대로 한 무더기 달빛이다. 지금, 달빛을 향한 그리움이 밀려드는가, 그리움이 월경 직전처럼 몸과 마음을 싸륵싸륵 아프게 하는가. 그렇다면 이 책 속에 스민 노래를 들어보라. 충만하고 선선한 달빛의 노래를! (이현희 imago@libro.co.kr/리브로)
 
비즈폼
Copyright (c) 2000-2025 by bizforms.co.kr All rights reserved.
고객센터 1588-8443. 오전9:30~12:30, 오후13:30~17:30 전화상담예약 원격지원요청
전화전 클릭
클린사이트 선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