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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고통은 나뭇잎 하나 푸르게 하지 못한다
불행의 최고봉을 오르는 이 사내의 초상을 보라
˝집은 유곽이다. 나의 기쁨은 벌레 먹고, 나의 애인은 남의 아이를 배었다. 사랑의 땅을, 다만 두 발 디딜 만큼의 땅을!˝(p.184)
항상 느끼는 것이지만, 시인 이성복의 글은 적당히 불순하고, 적당히 비루하다. 그의 시는 유곽 아니면 남의 아이를 배고 내 앞에 선 애인, 조각난 기쁨과 불행의 언저리 어디쯤을 서성이고 있다. 그러면서도 늦은 가을날 비에 젖은 나뭇잎처럼 스산한 비애와 비슷한 감정에 젖게 만드는 것, 청승맞다거나 궁핍해보이는 것과는 결코 다른 갈고 닦인 쓸쓸함. 이성복 시의 매력을 이정도로 다 말할 수 있을까?

그런 의미에서 이번에 나온 이성복의 아포리즘 집은 그의 시에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기 위한 도움말이다. 이미 1990년, 「그대에게 가는 먼 길」이라는 제목으로 간행된 것을 새롭게 정리해 펴낸 이 책은 시인 이성복의 내적 고민, 상처, 병, 허무 그리고 시에 대한 짧지만 무거운 단상들을 만날 수 있게 한다.

‘네 고통은 나뭇잎 하나 푸르게 하지 못한다’는 얼마간의 꾸중 섞인 제목을 뒤로하고 책장을 넘기면 우선 독자들을 맞이하는 건 상처, 어딘가 멍들어 아픈 것에 관한 그의 지독한 ‘편애’다. 머리말을 대신해 그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언저리를 사랑한다. 언저리에는 피멍이 맺혀 있다”


‘나는 싸움꾼이 아니라, 싸움판이다’(p.191) ‘살을 짓이기는 절구의 속절없음. 대체 이 삶은 밀가루 반죽이었나?’(p.206) ‘불을 쬐듯이 불행을 쬘 것’(p.45)등 어딘가 아프고 어눌한 것, 불행한 삶, 온전치 못한 것에 대한 그의 편애는 도무지 끝을 모른다. 이쯤 되면 적어도 그에게 있어 불행은 행복의 다른 이름이며, 그는 행복해지기 위해 불행하다. 그의 어법대로라면, 그는 ‘치유되기 위해서 상처 받’는다.

비록 선문답처럼 짧고 여백이 많은 문구들이지만, 그의 한마디 한마디는 고해성사와 같은 육중한 무게감을 지니고 있다. 짧지만 무거운 말의 힘. 이것은 단지 그가 시인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일까? 짐작하건대, 앞으로도 오랫동안 그는 지금과 같은 상처 투성이의 글을 남길 것이다. 행복과 기쁨을 알기 위해 그는 어떤 거부의 몸짓도 없이 불행의 절차를 차곡차곡 밟아나갈 것이니. 상처와 불행은 곧 행복한 세상으로 뻗은 왕도일 것이니.

“나는 내 불행의 최고봉을 오르리라. 그때 내 행복이 안데스 산맥처럼 펼쳐지리라.”(p.182) (이현희 imago@libro.co.kr/ 리브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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