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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마풍경
우주로 열려있는 시인들의 풍경
한 시인이 다른 시인에 대해 말할 때, 그건 단순한 인물소묘에 그치지 않는다. 또 다른 시인을 중심에 놓고 그에 대해, 또는 그를 향해 내뱉는 시인의 발성들은 그 자체로 주위 배경을 구성하게 된다. 그것은 현실 너머거나, 현실의 이면을 드러내는 이미지들의 현존상태로 나타난다. 거기에선 실재와 환상, 과거와 현재 등의 대립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 점에서 개결한 시의 장인 허만하 시인이 논하는 ‘청마 유치환의 풍경’은 ‘절대적 시공에 관한 우주론’으로 읽어도 무방하다.
1999년 가을, 시집「비는 수직으로 서서 죽는다」가 출간됐을 때, 한국문단은 그야말로 먹구름을 뚫고 쏟아져 내린 대못 같은 시편들에 폐부가 찔린 형국이었다. 문학의 위기니, 시의 죽음이니 하는 낭설들이 길바닥의 은행잎처럼 나뒹굴던 시절이었으니 오죽했으랴. 게다가 칠순의 노 시인이 30년만에 발간한 두 번째 시집이라는 사실이 그 충격을 배가시켰다. 문단에서 거의 지워졌던 이름이 그야말로 유령처럼 홀연히 돋을새김했던 것이다. 문명의 역사와 우주의 질서를 한눈에 꿰뚫어보는 혜안과 사물들의 내밀한 역학관계를 헤아리는 감식안, 따뜻하면서도 단단한 어조 속에 깃든 자유로운 정신 등 허만하 시인의 시는 수평적인 속도감에 도취돼 있던 20세기 막바지 한국문학의 심급을 뒤집고도 남을 정도였다.

「청마풍경」은 허만하 시인이 「낙타는 십리 밖 물 냄새를 맡는다」이후 1년만에 출간한 산문집이다. 그러나 제목만 보고 단순한 인물 회고록 정도로 치부했다가는 큰코다친다. 허만하 시인은 자신의 선배이자 스승인 청마 유치환의 삶을 하나의 ‘풍경’으로 보고 그 빛과 바람을 기록한다. 청마의 삶과 우주의 심층까지 자유롭게 오가는 문장들이 순간마다 반짝이는데, 그런 미감은 캄캄한 우주의 내부를 수년간 관찰하고 탐독하여 캐낸 어둠의 결정체로부터 자연스레 우러나온다. 따라서 허만하 시인의 산문들은 내밀한 인식의 주파수로 이끌어낸 삶과 우주에 관한 언어적 도표라 할 만하다. 거기에서 경망스런 문체적 수사의 흔적은 찾아보기 어렵다.

허 시인에 의하면 청마는‘무한한 우주에 절망했던 유일한 한국시인’이었다. 이 책 첫 장 첫 페이지 첫 줄은 따라서 “무한無限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으로 시작한다. 첫머리부터 심상찮고 무거운 주제로 성큼 들어서는 것이다. 그렇지만 허 시인은 결코 언어가 언어를 불리는 식의 난삽한 문장의 미로를 만들어내지는 않는다. 문장들은 노 시인 특유의 부드럽고 온화한 호흡에 따라 빛과 바람의 숨결을 불러일으키듯 유현하게 이어진다.

미켈란젤로와 릴케, 경주의 원원사 등을 자유자재로 오가는 동안, 한올 한올 풀려 나온 우주의 실타래들이 어느덧 청마라는 시적 거인의 초상으로 뇌리에 수 놓여진다. 그 순간, 청마는 곧 우주고 우주는 곧 이 세상 모든 만물의 심연으로 정초돼 있는 걸 깨닫게 된다. 어려운 이론이나 구구절절한 설명 없이 삶과 우주의 본질을 한 줄로 꿰어내는 이런 결기는 노 시인의 심원한 숨결이 아니라면 도달할 수 없는 경지다.

청마는 허 시인의 결혼식 주례를 서기도 했던, 허 시인에게 있어선 문학적 지주와도 같은 존재였다. 때문에 허 시인이 청마를 추억하는 방식은 시인이 세계와 시, 인간과 우주를 이해하는 방법과 직결돼 있다. 요컨대 청마는 허 시인이 세계를 판독하고 깨닫는 인식의 프리즘인 동시에 우주의 초석을 체현한 거푸집인 것이다. 그런 점에서, 직접 촬영하기도 하고, 일본에 있는 지인들로부터 얻어내기도 한 사진과 자료들은 무한과 연결돼 있는 청마의 자취들을 현재화시켜 보여주는 동시에, 육신의 사멸 건너 영원히 살아남아 있는 시정신의 결정을 가시적으로 드러낸 흔적이라 할 수 있다.

허 시인은 이 책의 ‘자서’에서“청마 유치환 시인의 주례로 결혼한 아내도 이 풍경찾기의 길에 동참했었다. 이 책은 그런 뜻에서 사랑하는 아내와의 공저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밝히고 싶다”고 쓰고 있다. 게다가 이 책은 허 시인이 1980년대부터 써온 청마에 관한 여러 글 중 29편을 골라 3부로 나누어 구성한 것이다. 이런 점만 보아도 허 시인이 청마에 천착하고 쏟아 부은 애정이 어느 정도인지는 가히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좋은 시인의 산문은 시와 한몸이라는 말이 있다. 그만큼 허만하 시인의 이번 산문집은 그 자체로 시적 감흥을 불러일으키는 언어들의 자유자재한 운용능력을 보여주고 있다. 이 책을 통독하고 나면, 어느덧 풍부한 시 정신의 절경들 한가운데서 우주의 빛과 바람들과 교감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을 듯하다. (강정 igguas@libro.co.kr/ 리브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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