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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때론 어부 닮고, 어쩜 성자닮은.. |  | |
| ‘때론 어부 닮고, 어쩜 성자닮은’의사 김인권
전남 여수 애양재활병원 김인권 원장(50)의 식사시간은 길어야 10분. 조급한 기색이라고는 찾아보기 힘든 환하고 온화한 얼굴과는 좀처럼 어울리지 않는 식사 습관이다. 한결같이 부드럽고 느긋한 말투에서도 그런 특이한 식생활 습관을 예측하기는 불가능하다.
“부모님이 평안도 분이세요. 평안도 사람들은 성격이 급해서 화가 나면 말싸움보다는 ‘빡’ 하고 박치기를 해버린대요. 밥을 빨리 먹는 습관은 조상의 내력인가 봐요”
우스갯소리 삼아 던져놓은 김원장의 이야기로 주변이 한바탕 웃음바다가 되면서 점심 식탁이 이내 소란스러워졌다. 충청도 사람은 느리기는 해도 할 말은 다 한다더라, 전라도 사람은 말에 욕이 반이라더라 등등….
김원장이 어울리지 않는 식습관을 갖게 된 까닭은 식당을 돌아 병동으로 걸음을 옮기면서 자연스레 알 수 있었다. 환자들이 병원 복도만 꽉 채운 줄 알았더니 주차장까지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김원장이 직접 외래를 보는 날인 매주 수요일과 금요일에는 늘 새벽부터 사람들이 이처럼 줄을 선다고 한다. 정형외과 의사로는 국내 최고라고 소문이 난 때문인지 전국에서 애양병원으로 몰려드는 환자는 하루 평균 300여명. 따로 예약을 받지 않고 하루에 오는 손님을 그날 다 보는 것이 원칙이라 김원장은 식사시간조차 아껴 진료를 해야 했던 것이다. 시간을 아끼기 위한 김원장의 노력은 진찰실에서도 나타난다. 진찰실에 칸막이를 두어 4개의 방을 만들고 칸마다 진료용 침대를 하나씩 두었다. 입구에는 샤워실처럼 커튼을 쳤다. 김원장은 이곳을 차례로 돌며 진료를 한다.
“이렇게 하면 시간이 훨씬 절약되지요. 환자 이름을 부르고, 들어오고, 또 자리에 앉고 하는데 걸리는 시간이 아마 2~3분은 될 걸요. 그 시간을 쪼개 쓰면 환자 대하는 시간을 좀더 늘릴 수 있어요”
올해는 환자가 늘어 칸막이를 하나 더 늘렸단다. 환자를 많이 볼 수는 있지만 김원장은 이 특이한 진찰실 덕에 하루종일 서서 진료하는 의사가 됐다. 그래도 서서 진찰하면서부터 환자들과 격의없이 친해질 수 있었다고 좋아한다. 환자들과 친하게 지내는 것을 기쁨으로 여기는 김원장이기에 그가 환자를 대하는 모습은 마치 동네 이웃과 이야기하는 것 같다. “할머니, 어디가 아프세요” “요기 허리가 아퍼, 어이구, 제대로 앉어있을 수가 없어” “어디 한번 누워보세요. 요즘 힘든 일 하셨나봐요. 집안에 무슨 일 있었어요?”.
바다가 인접한 ‘도성마을’에서 김원장은 동네 이장같은 존재다. 그럴 만도 하다. 꼭 20년의 세월을 이 병원에서 보냈기 때문이다. 서른살의 나이로 김원장이 애양병원을 찾았을 때 이곳에는 나병환자가 대부분이었다. 애양병원은 국내 최초의 나환자를 위한 병원. 서울 토박이에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을 졸업한, 장래가 보장된 그가 낯선 땅에 둥지를 틀게 될 줄은 그조차도 예상치 못했다고 한다. 김원장 인생의 방향을 결정짓게 된 계기는 바로 대학시절 소록도에서 보낸 6개월간의 봉사활동 기간이었다.
“우연한 기회였지요. 난생 처음으로 나병환자를 봤습니다. 절망에 지치고 냉대에 한이 맺힌 사람들. 말로만 듣던 이런 삶이 진짜 있구나 했습니다. 처음에는 허탈하기도 했고 가슴이 많이 아팠습니다”
그러나 이런 첫인상은 소록도 주민들과 6개월을 함께 생활하면서 점차 사라졌다. 그들도 정상인과 다름없이 희망을 안고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들도 때가 되면 사랑을 하고 결혼도 했으며, 일을 해서 수확의 기쁨을 얻기도 했다. ‘영혼이 아름다운 사람들’이었다고 그는 기억한다.
“정직하게 이웃사랑을 몸소 실천하고 하나님께 감사하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몸이 불편하기 때문에 마음의 평화를 얻은 행복한 사람들이지요”
국립소록도병원 원장, 목사, 수녀들과 함께 생활하고 나병환자들을 돌보면서 김원장도 어느덧 ‘마음의 평화를 얻어 행복한’ 그런 마을 사람의 일부가 되어갔다. 그 시절의 소중한 추억 때문인지 대학 졸업 후 공중보건의 생활도 소록도로 자원했다. 여수 애양병원과 연을 맺은 것은 이때였다. 소록도에서 뱃길로 1시간30분 거리에 있는 애양병원에 나환자 치료를 위해 자주 드나들었다. 애양병원은 나환자 병원이면서도 나환자와 일반환자를 함께 진료하는 곳. 그래서 환자들이 넘쳐났고 의사는 늘 부족했다.
“그때 애양병원에는 오갈 데 없는 환자들이 많이 모여들었어요. 돈도 없이 지게나 리어카에 환자를 싣고 오는 사람들이 길게 줄을 짓고 서있었지요. 그들을 위해 간이숙소를 지어놓고 치료를 하기도 했습니다”
공중보건의로서 3년간의 소록도 생활이 끝날 무렵 김원장은 자신을 가장 필요로 하는 곳을 찾았다. 애양병원의 문을 두드린 것이다. 이렇게 그는 애양재활병원 정형외과 과장으로 출발해 부원장을 거쳐 원장이 됐다. 20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 애양병원도 많이 달라졌다. 예전처럼 나병환자들은 많지 않고 일반환자들이 대부분이다. 또 지난해에는 병원 2층 건물에 한층을 더 올리기도 했다. 애양병원의 이런 변화에도 불구하고 김원장의 생활은 예나 지금이나 크게 다르지 않다. 20년 동안 1주일에 두차례는 외래진료, 나머지 4일은 수술, 일요일에는 교회에 가는 정해진 생활의 연속이었다. 해외 의료봉사를 떠나는 것도 연례행사의 하나다. 바쁘지만 단조로운 생활이다.
“바닷가에 사는 어부같이 시골에 사는 재미가 있습니다. 진료하고 남는 시간에는 기도합니다. 취미라 해봤자 등산 정도니 생활은 무척 단조롭습니다. 생활이 단순하니 정신은 맑아지지요”
마을사람들이 찾아 헤매던 ‘큰바위 얼굴’을 닮은 사람은 돈을 가진 사람도, 명예를 가진 사람도 아니었다. 그저 소리없는 덕행을 베풀며 살아가는 사람 ‘어니스트’였다. 너새니얼 호손의 ‘큰바위 얼굴’에 나오는 얘기다. 바다 아래로 저무는 해를 바라보는 김원장의 얼굴에도 ‘큰바위 얼굴’을 닮은 성자(聖者)의 평화가 깃들어 있었다.
[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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