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좋은글 나누기
joungul.co.kr 에서 제공하는 좋은글 입니다.
바쁜 일상 속에 잠시 쉬어가는 공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바보 의사 이야기
이 이야기는 지금은 고인이 되신 장기려 박사님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우리나라 외과 학회에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업적을 남긴 외과 전문의였지만, 그의 인생은 너무나도 초라하고 서민적이었습니다. 1995년 12월 25일 서울 백병원에서 86세로 생을 마감할 때까지 부산복음병원 원장으로 40년, 복음간호대학 학장으로 20년을 역임했지만, 그에게는 서민 아파트 한 채, 죽은 후에 묻힐 공원묘지 10평조차 없었습니다. 물론 병원 원장이나 대학 학장으로서의 수당은 있었겠지만, 그에게는 월급이나 수당보다는 가불이 더 많았습니다.
1967년 내가 처음 장 박사를 만났을 때 그는 사면초가 상태에 있었습니다. 장 박사에 대해 떠도는 미신에 가까운 풍문 때문에 전국의 가난한 수술환자들과 다른 병원에서 치료 불가능하다는 판정을 받은 말기 암환자들이 부산복음병원으로 몰려들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어찌어찌 해서 입원을 하고 수술을 받아 병이 나으면 그 다음에는 또 다른 문제가 생겼습니다. 그들 대부분은 입원비와 약값이 없었기에 마지막으로 찾아가는 곳이 원장님실이었습니다.
원래 잇속에 밝지 않아 셈을 잘 할 줄 모르고, 바보같을 정도로 마음이 착한 장 박사에게 “시골 우리집은 논, 밭도 없고 소 한 마리도 없는 소작농인데, 이렇게 많은 입원비나 치료비를 부담할 능력이 없습니다”라고 환자들이 하소연하면 장 박사는 그들의 딱한 사정을 먼저 생각하곤 눈물겨워하였습니다. 병원비 대신에 병원에서 잡일을 하는 것으로 대신할 수 없겠느냐는 것이 환자들의 고상한(?) 제안들인데, 이야기가 이쯤되면 장 박사는 그 환자의 치료비 전액을 자신의 월급으로 대납 처리하곤 했습니다.
병원 행정을 이렇게 하다보니 장 박사 월급은 항상 적자였고 이것이 누적되면서 병원 자체의 운영도 어려워지게 되었습니다. 결국 어느 날 병원 진료부장회의에서 결정이 내려졌습니다. 앞으로 무료 환자에 관한 모든 것은 원장님 임의로 하지 못하도록 부장회의를 거쳐 결정된 것입니다.
그렇다고 가난한 환자들이 오지 않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모든 결정권을 박탈당한 이후부터 장 박사는 어려운 환자들이 생기면 야밤에 탈출하라고 일러주었습니다. “내가 밤에 살그머니 나가서 병원 뒷문을 열어줄 테니 탈출하라”는 것입니다. 장 박사의 이런 ‘바보 이야기’들은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을 정도록 무궁무진합니다. ▣
[신앙계]

 
비즈폼
Copyright (c) 2000-2025 by bizforms.co.kr All rights reserved.
고객센터 1588-8443. 오전9:30~12:30, 오후13:30~17:30 전화상담예약 원격지원요청
전화전 클릭
클린사이트 선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