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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택시기사가 된 사장님’ |  | |
| ‘택시기사가 된 사장님’ 전 신용금고 대표이사 김기선 씨
“정년도 없고, 잠도 잘 오고, 음식도 맛있고… 세상에 이만큼 좋은 직업이 있나요?”
누구나 아름답게 늙어가기를 원한다. 그렇지만 아름다움의 기준이 개인마다 다르고,
스스로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노후일지라도 그걸 실천하기란 쉽지 않다. 사회적인 체면이나
가족들의 반대 등에 부딪힐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아마 그래서일 것이다. 8년 동안의
영풍신용금고 대표이사 자리를 그만둔 후 택시운전을 시작한 김기선 씨를 인터뷰하게 된
이유도. 양복 대신 헐렁한 점퍼를 입은 그를 만나 제2의 인생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안녕하세요. 자, 귤 하나 받으시죠.” 택시기사는 시간이 돈이라며 점심시간을 이용해 인터뷰
를 하는 게 좋겠다던 김기선 씨(58)는 만나자마자 기자에게 귤 하나를 건네주었다. 노란색 와
이셔츠 위에 모직 스웨터를 입은 편한 운전사 차림이었다.
2개월 전만 해도 김기선 씨는 자가용 뒷좌석에 앉아 영풍상호신용금고로 출근하던 사장님이었다.
서울신탁은행(옛 서울은행), 중앙투자금융, 고려투자금융, 동아증권을 거쳐 1983년 영풍상호신용
금고 대표이사로 영입돼 세 차례나 사장직을 연임하던 그였다. 명예퇴직 바람에도 끄덕 없던
김씨는 지난 8월 24일 갑자기 사표를 냈다. 그리고 두 달 후 택시 핸들을 잡았다.
“나이 들수록 정신노동보다는 육체노동을 해야 합니다.
무거운 것을 드는 것은 못해도 자동차 정비나 봉사활동 등은 충분히 할 수 있잖아요.
운동도 되고 스트레스도 풀리고요. 이제 우리나라도 평균 수명은 점점 길어지는데,
대기업에서는 50대만 해도 늙었다고 그만둬야 하는 분위기잖아요. 그러니까 노인정에서 매일
모여 술 먹고 고스톱을 치면서 시간을 보내죠. 저는 그런 모습은 정말 보기 싫었습니다.”
김기선 씨는 택시 운전의 장점을 첫째 (개인택시의 경우) 정년이 없고, 둘째 일하고 나니 밤에
잠이 잘 오고, 셋째 기사식당의 음식이 맛있고, 넷째 상사의 간섭과 눈치를 볼 필요도 없고
종업원들 관리할 필요도 없으니 편하고, 다섯째 젊은 사람들과 매일 만날 수 있으니 외롭지 않는
등 여러 가지를 들었다. 위험부담이 있고 약간 고달픈 단점을 제외한다면, 이만큼 좋은 직업이
없다는 것.
“일본에서는 노인들이 구두를 닦고 젊은애들은 앉아 있어요.
외국에서는 학교 교장이 정년퇴직하고 나면 그 학교의 수위를 해요.
그 학교 사정에 대해 잘 아니까요. 얼마나 좋아요? 체면 때문에 못한다는 게 뭔가 잘못된 거죠.”
실연당한 여성에겐 애정 상담, 사업가인 남성에겐 인생 상담을 하기도
김기선 씨는 지난 11월 1일 영업을 시작했다. 초보 운전사의 좌충우돌 한 달 운행일지가 궁금해
졌다. 가장 어려운 것은 정확한 위치를 찾아가는 것. 잘 아는 지역이라도 막상 운전석에 앉으니까
자신의 위치가 어디인지 헷갈리는 경우가 종종 생긴다는 것. 김씨는 “그럴 때면 손님들한테 물어
보는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운전을 하다보니 김기선 씨는 세상인심이란 걸 확실히 깨닫게 되었다고 한다.
“저소득층이나 식당아줌마, 공사판 인부 등은 정이 많아요. 한번은 아파트 공사 인부를 태웠는데,
아파트의 입구 큰길가에서 내려달라는 거예요. 아파트까지 제법 걸어야하는 거리였는데도 말이죠.
그분 말씀이 ´그동안 빨리 가서 돈벌라´고 하는 겁니다. 반면 넥타이를 말끔하게 맨 신사나 옷차림
이 요란한 부인 등은 구석구석 골목을 헤치고 집 앞까지 가자고 요구해요.”
김씨가 가장 많이 받은 팁은 재수생에게 받은 3,100원. 원래 1,900원만 내면 되는데,
그가 불쌍해보였는지 꼬깃꼬깃한 비상금 5,000원을 막무가내로 쥐어주고 내렸다고 한다.
김기선 씨는 때로 택시 안에서 인생 상담을 해주는 카운슬러 역할을 한다.
“한번은 숙대 입구에서 두 손을 번쩍 든 여학생이 택시를 세웠어요. 타자마자 엉엉 우는 겁니다.
진정되기를 기다렸다가 ´손님, 무슨 일인지 몰라도 급한 일일수록 침착하라´고 안심을 시킨 다음
자초지정을 들었죠. 대전에서 서울로 유학 온 학생인데, 아침에 찌개를 데워먹은 후 불을 안 끄고
나왔다며 자취방이 불에 다 탔을 거라고 하는 겁니다.
차 안인데 불이 났다고 해도 어쩔 수가 없잖아요. 제가 그랬죠. ´내가 점쟁이는 아니지만,
오랜 사회 경험을 통해 불이 안 났다고 확신한다´고요. 그리고 편안함을 느끼도록 복음성가를
들려주었죠. 그랬더니 학생 표정이 대번에 밝아져요. 결국 집에 가보니 불이 안 났더군요.”
이외에도 남자친구한테 실연당한 여성에게 용기를 북돋워주기도 하고, 사업하는 사람의 자랑을
말없이 들어주고 칭찬해주기도 한다. 색시 장사하는 걸 속이고 결혼한 남자가 스튜어디스인
아내에게 비밀을 털어놓아야 할지 말아야 할지 묻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김씨는 손님에 대한 작은 친절의 하나로 귤을 내놓는다. 아내가 싸준 간식거리를 먹을 시간이
없어 손님과 나눠먹었는데, 분위기가 무척 좋았던 것이 계기였다. 이후 귤을 30개 정도 담아
손님에게 내밀었다. 그는 “귤을 먹으면서 얘기도 나눌 수 있고 길을 잘 못 찾아도 야단치지
않는다”며 “요즘에는 매일 귤 마련하는 것도 큰일 중 하나”라고 껄껄 웃었다.
김씨는 택시운전 일을 하면서 한 가지 목표를 더 갖게 되었다. 바로 봉사활동을 하겠다는 것.
“지금도 마음 아프게 생각하는 사건이 하나 있었어요. 보훈병원 앞에서 승객을 태웠는데,
근처에서 가장 가까운 강동역까지 가달라고 하더라고요. 수술을 여덟 번이나 받아 사지가
뻣뻣해져 휠체어에 앉은 맹인과 그를 돌보는 자원봉사자였어요. ´원래 서울대학병원에 가는데,
돈이 그것밖에 없어서 전철타고 가려고 한다´고 하더군요. 제가 그냥 목적지까지 태워주겠다고
하는데도 그 자원봉사자가 자존심이 강해서인지 끝까지 전철역에서 내리겠다고 하더라고요.
그때가 아마 일 시작한 지 사나흘 지났을 때였는데, 휠체어 때문에 뒤 트렁크가 열려 운전하는
데 약간 불안하기도 해서 결국 역까지만 태워다 주었죠.”
그 사건 이후로 김씨는 항상 뒤 트렁크를 묶을 수 있는 끈을 상비하고 다닌다.
앞으로 개인택시 운전을 하게 되면, 힘닿는 대로 어려운 사람들을 태워줄 것이라고 한다.
사납금 채운 후에도 열심히 돈 벌라는 아내의 성화(?)
김기선 기사는 오전 5시30분에 업무를 시작해 오후 5시30분까지 근무한다. 현재는 낮 근무만
하지만, 6개월 후에는 밤 근무도 할 계획이다. 퇴근 후에는 골프 연습도 하고 바둑도 두고
헬스클럽에 나가 운동도 한다. 몸무게는 5㎏ 가량 줄었지만, 훨씬 건강해졌다.
택시운전을 하겠다고 했을 때 걱정하던 아내 김유계 씨(54)는 이제 그에게 더 야박하게 군다.
“하루 사납금이 7만9,000원이에요. 어떤 날은 몸이 다소 피곤할 때도 있잖아요? 그러면 아내한테
전화해서 ´사납금도 거의 다 찼는데, 그만할까?´하고 물어요. 아내는 ´무슨 소리야. 지금부터
버는 게 진짜 돈인데´ 하죠.(웃음)”
기자는 그에게 “정말 솔직히 부끄럽지 않느냐”고 재차 물었다.
“용산역 근처에서 마을버스를 기다리는 친구 한 명을 본 적이 있어요. 사장 시절에는 만나기만
하면 달려와 반갑게 인사하던 친구였는데, 택시 운전석에 앉은 저를 보더니 슬금슬금 피하더군요.
글쎄요, 택시운전사에 대한 우리사회의 인식은 좀 낮은 것 같아요. 하지만 저는 이게 제 적성에
맞는 것 같아요.”
그의 말은 기자를 부끄럽게 했다. 내실이 아니라 겉모습만 보고 사람을 판단해버리는 우리 사회
의 단면을 너무 적나라하게 본 것에 대한 부끄러움이었을까?
김기선 기사의 목표는 3년 후인 회갑 때 개인택시 자격증을 따는 것이다.
[여성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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