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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말이 우리의 무기입니다
사파티스타, 성스러운 피로 물든 역설의 스키마스크
멕시코 고원엔 오백 살이 넘은 딱정벌레가 산다. 법적인 이름은 네부카드네자르. 그러나 딱딱한 껍질 때문에 두리토라 불린다. 그는 우리 모두 내부에 간직하고 있으나 부끄러워서 까마득히 잊고 있던 아이를 불러낸다. 그러면서 두리토는 ´우리´를 다시 발견하고 ´우리´ 안에 있는 가장 훌륭한 면을 건드린다. 그건 다름아닌 ´민주주의´와 ´자유´와 ´정의´다.
「우리의 말이 우리의 무기입니다」는 사파티스타 민족해방군(EXLN) 마르코스가 스키마스크를 쓰고 라칸도나 정글의 동굴에서 노트북 컴퓨터를 두드려 발산한 혁명적 저항의식, 시적인 감성, 따뜻한 영혼, 빛나는 예지 등을 한데 모은 책이다. 이 책을 엮은 작가이자 문학비평가 후아노 폰세 데 레온은 마르코스의 스키마스크를 이렇게 설명한다.

˝가면은 마르코스가 자신의 특수한 출신성분을 떨쳐버리고 공통의 정체성을 획득하게 해주는 변형력을 가지고 있다. 그는 투명하며, 하나의 아이콘과 같은 상징적 존재다. 그는 보이려고 얼굴을 감춘다. 이런 역설은 그의 모든 글에서 발견되는 특징이다.˝ (p.56)

일테면 마르코스는 자신의 개인적인 자아를 스스로 지우고 망각하면서 ´우리´ 속에 하나로 스미기 위해 가면을 쓰는 셈이다. 두리토가 자신의 이름을 밝히지 않은 채 그 딱딱한 등껍질만으로 강한 존재감을 발휘하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1부 ´가면을 벗지 않는 멕시코´는 가면으로 존재하는 마르코스 - 사파티스타가 제시하는 미래의 비전, 그리고 현재에 대한 투철한 인식을 담고 있다. 그의 인식은 관념의 노출이 아니라, 가면으로 봉인 당한 가식과 허위의 시체들을 보는 양 선연하고 절실하다. 그건 삶의 실재성을 에누리없이 목도한 거의 동물적인 절실함이다. 대부분의 말미에 거침없이 치켜세우는 느낌표 세 개, 민주주의! 자유! 정의!가 생생한 핏빛으로 설득력을 발휘하는 건 그 때문이다. 그런 핍진함과 절실함은 2부 ´가면 밑에서´의 처절한 고백과 두리토의 장난스런 출몰이 인상적인 3부 ´기억 만들기´의 예술성을 가일층 고양시킨다. 그러면서 읽는 이로 하여금 강렬한 육체적인 감화를 이끌어낸다.

멕시코 정부군과 대치한 상황에서 정글을 종횡무진 숨어 다니는 마르코스는 그를 찾으려는 이들에겐 잘 드러나지 않지만, 그가 찾고자 하는 이들 앞엔 여지없이 그 존재를 드러낸다. 가면으로 가린 얼굴과 가면 속의 비수와도 같은 그 자신의 말과 함께. 그의 말 속에서 마르코스는 수많은 변용태로 존재한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우리로써 하나다. 사파티스타는 마르코스고, 마르코스는 사파티스타다. 그러나 이건 마르코스에 대한 우상화된 칭송이 아니다. 사파티스타로서가 아니면 마르코스의 존재는 빛을 잃는다(멕시코 원주민의 피 어린 역사 속에서가 아니면 두리토는 그저 미미한 갑충에 지나지 않는다). 그 역도 마찬가지다. 때문에 이 책을 읽는 건 사파티스타의 현실과 역사를 거시적으로 아우르는 것인 동시에, 마르코스로 표상되는 한 집단화된 영혼의 깊은 곳으로 미지의 여행을 떠나는 일이기도 하다. 물론 그 각질의 어둠을 유려한 등불로 바꾸는 건 장난꾸러기 요정처럼, 또는, 역사의 기나긴 어둠 속에서 반딧불이처럼 불을 토하는 두리토의 우화들이다.

이 책의 서문에서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주제 사라마구는 ˝조용히 바라보자. 그리고 귀 기울이는 법을 배우자. 그러면 언젠가는 결국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결론짓는다. 이 말은 범상한 듯하지만, 치명적이다. ´조용히 바라보지´않고, ´귀 기울이는 법´을 모르는 세상의 모든 권력자들에게 가하는 일침이 이 단순한 문장 속에 숨어있다. 그렇듯 마르코스를 읽는다는 건 인간의 기본가치를 강한 실감으로 재확인하는 일이다.

마르코스는 인간의 가장 단순한 희망과 열정, 그리고 사랑을 얘기한다. 그의 말이 무기가 될 수 있는 건 그 자신의 투명한 영혼을 명명백백한 태양 아래서 순도 높게 가열했기 때문이다. 마르코스의 말은 진실의 극점에서 불꽃으로 변해 전세계로 번진다. 오만한 권력자에게는 치명적인 독, 움츠린 민중에게는 희망과 용기를 불러일으키는 약이 되는 그 말들은 불합리하고 야만적인 조항들로 양극화된 세계를 명징하게 고발하면서 새로운 세계의 비전을 불태운다. 죽음으로써 죽음을 되갚는, 성스러운 피로 물든 역설의 가면이 그 순간 세계의 진정한 얼굴로 변화한다. 실체를 가림으로써 모든 진실을 끄집어내는 최초의 ´포스트모던 혁명가´ 마르코스. 그는 우리가 내부에 간직하고 있으나 부끄러워서 까마득히 잊고 있던 아이를 정치한 분석과 뜨거운 열정으로 되살려낸다. 그건 ´저쪽으로 건너가기 위해´(p.575) 깨뜨려야 할 ´영혼의 유리´를 똑바로 응시하는 일이다.


by 리브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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