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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프리바토피아를 넘어서 |  | |
| 미래를 불러 현재를 변화시켜라
“세계화를 운명처럼 받아들이는 건 이젠 지겹다는 것이다. 시장이 정치 지도자들을 대신해 결정하는 것을 지켜보는 것도 지겹고, 세계의 몸과 정신이 상품으로 전환되는 것을 보는 것도 지겹고, 앉아서 당하는 것, 체념, 굴종도 지겹다.”
반미국중심주의, 반패권주의, 반세계화를 표방하는 프랑스의 진보적 좌파 언론 「르몽드 디쁠로마띠끄」의 편집주간 이냐시오 라모네는 「프리바토피아를 넘어서」의 ‘프롤로그’에서 이렇게 말한다. 파리7대학의 커뮤니케이션학과 교수이기도 한 그는‘오늘날 세계의 진정한 주인은 정치권력의 외양을 장악한 자들이 아니라 금융시장, 전세계적인 미디어그룹, 커뮤니케이션 고속도로, 정보산업 그리고 유전자 기술 등을 제어하는 자들’이라 규정한다. 이렇듯 신랄한 어조로 포문을 여는‘프롤로그’는 ‘세계를 바꾸기 위해’라는 제목을 달고 있다.
「르몽드 디쁠로마띠끄」는 최상급의 정보와 자료에 기초한 진보적인 메시지를 전파하는 잡지로 유명하다. 피에르 부르디외, 베르나르 까생, 코르넬리우스 카스토리아디스, 노엄 촘스키, 펠릭스 가타리 등의 필진들은 그 이름만으로도 강한 설득력을 발휘하는 세계적인 석학들이다. 「프리바토피아를 넘어서」는 그들이 「르몽드 디쁠로마띠끄」에 발표했던 글들을 모아 엮은 「21세기를 생각한다」를 우리말로 번역한 책이다.
‘프리바토피아’란 ‘private’와 ‘Utopia’를 합성한 단어로 ‘사유화된 유토피아’정도로 번역이 가능하다. 이 말은 ‘민주주의에 반하는 맥월드 문화’라는 글에서 벤자민 바버가 처음 사용했다. 바버에 의하면 맥도널드로 대표되는 미국문화는 민주주의에 적대적이기보다는 무관심하다. 그건 사람들을 부족이나 시민으로 연대시키는 게 아니라, 소비자라는 새로운 인종으로 구성된 소비사회 속을 부유하게 한다. 따라서 맥월드 문화 속에서 모든 사람들은 잠재적인 고객으로만 의미를 갖는다. 그런 의미에서 소위 ‘다국적(multinationales)기업’이라 불리는 거대자본들은‘탈국가적’이나 ‘반국가적’이라 부르는 게 더 타당하다. 사유화의 유토피아는 사회주의가 꿈꾸던 공유화의 유토피아만큼이나 불합리한 환상에 불과하다.
총 4부로 구성돼 있는 이 책의 논조는 그렇듯 기존 미국중심의 세계화 담론들을 비틀고 무너뜨리면서 새로운 세기, 새로운 세계의 이상적 형태를 제시하고 있다. 1부는‘신자유주의라는 유령’의 본질을 꿰뚫고 그 허구성을 설파하는 피에르 부르디외의 글로 시작된다. 부르디외는 최근 성행하는 ‘신자유주의 담론’이 지배담론의 든든한 받침으로 작용하면서 합리적 성향을 띤 경제적·사회적 상황들과 그 실행조건인 경제적·사회적 구조들을 괄호에 넣어 생략하고 있다고 말한다. 요컨대 신자유주의란 경제적·사회적 보수주의자들이 퍼뜨린 허구적인 세계화의 유령이라는 것이다.
2부는 생태환경 파괴와 유전자 조작, 인터넷의 범람으로 인한 사생활의 종말 등을 다루고 있다. 철학자이자 도시계획전문가인 폴 바릴리오는 ‘사생활의 종말’이란 글에서 원격통신의 상대론적 효과를 통해 좁아진 세계가 ‘경찰서의 폐쇄회로 안에 수감된 사람들의 “전자투옥”과 똑같은 성격을 지닌, 말 잘 듣는 노예’들을 재발명한다고 말한다. 그‘전자감옥’안에서 개인이란 세계 전체를 배회하는 유령 찾기 게임 속의 주인공으로 전락한다. 근대가 가치의 확고부동한 주체로서 설정했던 개인이라는 개념이 그렇게 사라진다. 세계는 이제, 사방이 유리벽으로 노출된 골방 속에서 실재와 허상의 경계를 지운다.
정치적·사회적 권리를 쟁취한 시민들이 평화와 잘 보전된 자연, 그리고 정보에 대한 보다 집단적인 권리를 요구할 것을 말하는 3부를 지나 4부로 넘어가면 그 모든 허구적인 세계화를 뛰어넘은 새로운 희망과 대안을 제시한다.‘사회적 실천의 재정립을 위하여’란 글에서 펠릭스 가타리는 “관련 사회단체들은 이처럼 상충되는 목표들을 토론에 붙이고, 그들의 습관을 바꾸고, 새로운 가치들의 세계를 받아들이며, 미래의 기술적 변모가 인간적 가치를 띨 것을 요구해야 한다. 한마디로 미래의 이름으로 현재를 판단해야 할 것이다.” 라고 말한다. 요컨대 미디어 자체를 거부하기보다는 현재의 미디어의 위상을 거부하는 실천적 노력에 의해 미래를 현재 속에 불러들일 수 있다는 것이다. 그건 다가올 미래를 미리 끌어당겨 현재의 위상을 변화시키는, 창조적인 역동과 자율만이 보장할 수 있는, 세계의 새로운 비전이다.
by 리브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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