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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녹색 희망 |  | |
| 좌파 친구들에게 전하는 녹색 희망의 메시지
프랑스 녹색당의 경제정책 이론가이며 녹색당 유럽의회 의원인 알랭 리피에츠는 「녹색 희망」의 머리말에서 먼저 ‘녹색 희망’에 대한 자신의 확고한 믿음을 친구들에게 고하고 나선다. 적색에 대한 찬양을 단념한 지금, 그는 ‘좌파의 후손’이라 부르는 친구들에게 정치적 생태주의의 진영으로 넘어오라고 자신만만하게 권하고 있다.
프랑스 녹색당 등 유럽을 중심으로 활동한 저자는 「녹색 희망」에서 정치적 생태주의의 원칙과 발전 형태 등을 논의하고 이를 프랑스의 현실 정치와 맞물려 이야기하고 있다. 1992년 리우 환경회의가 열린 다음 해에 프랑스에서 출간되었으니 우리 나라에 상당히 늦게 소개되는 셈이다. 그렇지만 녹색주의가 유럽에서 제 모습을 나타내기 시작할 때라는 시기는 녹색평화당이 창당되고, 환경문제가 정치 경제적으로 비중 높은 사안이 되고 있는 현재 우리 나라의 정치적 상황과 그리 무관한 것은 아닐 것이다. 적색의 낡은 사명을 벗어 던진, 생태주의에 대한 그의 희망이 아직 생태주의에 대한 정치적 인식이 푸릇한 이곳에서 복음으로 퍼져나갈 수 있을까.
스스로 고백하듯 과거 좌파이자 맑스주의자였던 알랭 리피에츠는 진정한 사회운동으로서의 녹색 정치로 진영을 바꾸었다. 녹색주의자는 적색과 마찬가지로 혁명과 사회, 패러다임의 변화가 일어날 때 흥하리라는 확신을 공유하고 있지만 노동운동이 ‘자본주의’라고 부르는 사회를 정치적 생태주의에서는 ‘생산지상주의’의 개념으로 인식하는 지점에서 두 길은 결정적으로 갈라선다. 녹색에게 생산력을 통한 진보가 또 다른 진보를 낳는다는 관념은 없다. 맑스에게 자연은 인간화되어 이용해야 할 또 다른 단순한 생산요소 불과하기 때문에, 리피에츠는 맑스주의는 이제 변혁의 길이 아니라고, 희망은 정치적 생태주의에 있다고 말한다. 그는 자신의 사회적 문제의식이 과거 “사회주의냐, 야만이냐”에서 오늘날 “생태주의냐, 죽음이냐”로 옮아갔다고 선언한다.
1992년 리우회의에서는 인류의 공동재산인 자연에 대한 자유로운 접근을 종식시키는 문제를 민주적인 합의와 참여민주주의를 통한 해법을 추구해야 한다는 결론을 얻었다. 민주주의가 원래의 모습인 생태적 성격인 책임성과 자율성, 그리고 연대라는 인간 활동의 기본 가치로 재정립되어야 함을 저자는 설파한다. 우리 문화 속에서 생태주의에 대한 인식이 아직 주변부적 부분운동 정도에 머물러 있는 것과 비교해 상당히 격차를 보이고 있다.
녹색주의자들은 많은 것을 변혁하는 데는 찬성하지만 권력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권력의 주변이 아닌 다른 곳에서 일어나는 것, 즉 수많은 행동양식의 변화이다. 환경을 훼손하는 수십 억의 사람들 속에서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라는 질문은 당연할 것이다. 하지만 그 의문은 행동양식의 변화를 겨냥하지 않고 권력의 문제만을 겨냥하는 방식이다. 권력에 대한 과도한 이미지에 사로잡힐 때 사람들은 정치적으로 무기력해진다. 정치적 생태주의는 생명 세계의 공존을 위한 ‘이성의 겸손’(뒤늦게 깨달은)이며, 소수정예부대의 적색 사회혁명이 아닌 자율성과 연대라는 민주적 행동양식의 혁명을 향한 ‘의지의 포부’라고 당당하게 외친다.
생태주의는 단순히 환경 보호론적 시각에 한정된 특정한 사회의 분파가 아니라 정치와 경제, 인간적 삶의 양식 전체를 바꾸는 패러다임이다. 그것은 우리가 자본주의, 공산주의라고 부를 때의 그것과 같은 사회 시스템을 규정하는 패러다임인 것이다. 생태주의는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모두에 저항하고 그것을 극복하고자 하는 새로운 ‘이름’이다. 다른 모든 이름과 구별되는 독자성을 가진 이름이다. 「녹색 희망」은 환경 보호론적 시각에 한정하려는 모든 시도들과 고작해야 정치의 주변범주로 구석에 처박혀진 생태주의를 사회 전면에 나서는 정치로 부각시키고 있다.
알랭 리피에츠는 ‘생산 지상주의’ 시스템과 그 이념에 대항하여 생태주의라는 대안 시스템과 이념을 제시하고 있다. 우리가 생태주의를 자연보호와 혼동하고, 미디어가 그렇게 다루려는 것처럼 보호와 개발 사이의 극한 대립으로 이 문제를 사고하는 것만큼 생태주의와 거리가 먼 것도 없을 것이다. 환경보호인가, 아닌가의 문제로 말하자면 생태주의는 여타의 환경을 변혁하는 것이라고 하는 것이 보다 정확한 대답이 될 것이다. 단, 그 변혁이 지향하는 바가 생산 지상주의가 아니라 생명 세계의 공존과 자율성과 연대에 기초한 민주주의라는 점이 기억되어야 할 것이다
by 리브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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