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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마르크스의 복수 |  | |
| “나는 마르크스주의자가 아니다”
「마르크스의 복수」라는 제목을 보고 스친 생각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마르크스가 누구에게 복수를 한다는 것인가에 대한 의문이었다. 자본주의에 대한 복수? 글쎄 그의 노선을 추구했던 나라들이 붕괴한 상황을 볼 때 사회주의 국가가 복수를 하기에는 힘이 미약하고 이미 늦은 건 아닐까. 후쿠야마 같은 사람들은 아예 국가사회주의에 대해 ‘종말’까지 선언해 버리지 않았던가. 또 하나는 ‘마르크스’라는 제목을 달고 많은 사람들에게 어필할 수 있을까였다. 현실적으로도 그렇지만 이론적으로도 마르크스는 이미 ‘한물간’ 사람 취급받지 않았던가.
하지만 이 책을 읽으면서 두 가지 생각이 모두 틀렸음을 알게 됐다. 이 책에서 마르크스는 복수를 해도 야무지게 한다. 누구에게? 자신을 그토록 떠받들던 마르크스주의자에게 한다. 마르크스가 지하에서 변절이라도 한 걸까? 그게 아니다. 마르크스는 애초에 마르크스주의자가 아니었다. 독일 사민당의 강령을 보고 마르크스는 단호하게 말했다. “나는 마르크스주의자가 아니다.”
마르크스의 복수란 다름 아닌 구소련을 비롯한 동구권 사회주의의 붕괴다. 저자 데사이는 자본주의가 의기양양하게 득세하고 전지구적으로 확장되는 가운데 확실하게 명예를 회복할 자는 마르크스라고 단정한다. 시장이 경제를 지배해야 하느냐 아니면 국가가 지배해야 하느냐 하는 선택에 직면한다면 그는 시장을 선택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 말은 곧 레닌이나 모택동, 룩셈부르크 등 사회주의 혁명을 주도한 사람들이 대부분 마르크스를 제대로 읽지 않았다는 반증이 될 수도 있다. 데사이는 이런 사람들을 ‘Marxist’라고 부른다. 반대로 마르크스 경제학을 충실히 공부하고 이해하는 사람들을 ‘Marxian’이라고 부르면서 Marxist 와 구별한다.
사실 자본주의를 가장 잘 정의한 사람은 스미스도, 하이에크도 아닌 마르크스라고 할 수 있다. 마르크스는 인생의 절반 이상을 자본주의 연구에 바친 자본주의 전문가다. 그가 말하는 자본주의의 종말은 철저한 연구 끝에 나온 논리적 귀결이었지 특정 시한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당시 많은 Marxist 들은 마치 자본주의가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처럼 서둘렀고 그 근거로서 마르크스를 거론했다. 그의 「자본론」은 제대로 읽지 않은 채 「공산당 선언」만을 탐독하면서 말이다. 데사이는 자본주의가 존재하는 한 마르크스 경제학은 유효할 것이라고 힘주어 말한다.
이 책의 또 하나의 특징은 결코 마르크스만을 다루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책에는 애덤 스미스, 케인스, 슘페터, 하이에크 등 경제학의 역사를 만든 대가들이 모두 등장한다. 마르크스를 주연으로 내세우되 스타급 조연들이 무더기로 등장하는 ‘경제사상사’인 셈이다. 마르크스에 별 관심이 없는 사람은 다른 부분만을 따로 떼어 읽어도 무방할 정도로 내용이 알차고 균형감각을 유지하고 있다. 특히 애덤 스미스나 헤겔을 다룬 부분은 마르크스 경제학을 이해하기 위해서도 필요하지만 그 자체로서도 매우 훌륭한 분석이다.
데사이에 의해 마르크스는 혁명가에서 뛰어난 경제평론가, 사회천문학자로 다시 태어난다. 고종석은 “마르크스주의는 문화이론이라면 모르되 경제체제나 역사해석으로서는 숨이 가쁘다”라고 말했다. 이 말은 ‘마르크스주의’에 한정하면 맞는 말이다. 하지만 마르크스 경제학에까지 적용하면 틀린 말이다. 시중에 돌아다니는 경제학원론 중 아무거나 들춰봐도 이른바 ‘이윤의 원천’을 명쾌하게 분석한 책은 없다(이윤의 원천과 경기순환은 주류 경제학의 양대 미스터리다). 자본주의의 이 미스터리를 그나마 풀어낸 사람이 마르크스다. 데사이처럼 마르크스 경제학을 ´살리는´ 것까지는 동의하지 않지만 자본주의의 장점과 모순을 함께 안고 가야 한다면, 싫든 좋든 마르크스 경제학에 눈길을 줘야 되는 건 아닐까?
by 리브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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