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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이버-맑스 |  | |
| 만국의 ‘다중’이여 접속하라?
1980년대 대학가에서 맑스는 필독서였지만 지금 맑스를 진지하게 읽는 학생은 거의 없다.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곧 이어 소련이 해체되면서 맑스주의도 함께 사라져 갔기 때문이다. 그 자리를 메운 것은 세계화와 미래학, 그리고 신자유주의였다. 사회주의 혁명은 정보혁명으로 대체되었고, 앤서니 기든스가 지적한 것처럼 정보통신의 혁명은 세계화의 가장 큰 동인이 되었다. 물론 반세계화 운동도 활발하다. 하지만 이들 역시 세계화와 신자유주의에는 반대하지만 맑스를 전면에 내세우지 않는다. 맑스라는 ‘코드’는 이제 자리를 완전히 잃은 것일까?
이 책「사이버-맑스」는 정보사회와 정보혁명에 모두가 외면하는 맑스를 과감히 끌어들였다. 저자 닉 다이어 위데포드의 의도는 간단하다. ‘새로운 정보혁명의 시대, 첨단기술로 무장한 자본주의 시대에 어떻게 효과적으로 투쟁을 할 것이냐’이다. 이것을 위해서는 맑스주의의 한계를 혁신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다른 사상들과 마찬가지로 맑스주의 역시 시대적, 당파적 한계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맑스가 「자본」곳곳에 상충되는 언급을 해 놓았기 때문에 그 해석을 둘러싸고 많은 학파들이 갈라졌다. 위데포드는 이 중에서 이른바 ‘자율주의’에 입각한 마르크스주의를 해답으로 제시한다.
위데포드는 논의를 본격적으로 시작하기에 앞서 다니엘 벨, 앨빈 토플러, 프랜시스 후쿠야마 등 미래학자들의 이론을 신랄하게 비판한다. 다니엘 벨의 ‘탈산업사회론’(지식계급이 출현해 통합과 번영의 시대가 오며 고전적 계급투쟁은 사라진다), 토플러의 ‘제3의 물결’(정보가 이끄는 제3물결이 산업사회의 모순을 제거한다), 후쿠야마의 ‘역사의 종언’(자본주의는 공산주의와의 대결에서 최종 승리를 거두었다) 등은 정치(精緻)한 예견이 아니라 그렇게 되기를 바라는 ‘자기 예언적 계획’에 가깝다는 것이다. 마치 새뮤얼 헌팅턴의 「문명의 충돌」이 미국 신보수주의자들의 계획을 예견으로 포장해 실제 상황으로 만들었다는 일각의 비판과 같은 맥락이다. 물론 이런 생각이 정확히 검증된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저자가 말하는 ‘자율주의적 맑스주의’란 무엇일까? 이것의 핵심은 기술(기계)을 보는 관점이다. 다시 말해 기술에는 노동자를 통제하고 탈숙련화시키려는 자본가들의 욕망이 새겨져 있는 동시에 노동에서 해방되려는 노동자들의 욕망도 새겨져 있다는 것이다. 쉽게 말하자면 기술이라는 것은 사용하기에 따라서 노동해방의 훌륭한 도구가 될 수 있다는 뜻이다. 전지구적 네트워크는 노동자들의 국제적 연대를 가능케 할 뿐 아니라 자본에 대한 투쟁을 더욱 심화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나이키 불매운동, 실리콘밸리에서 벌어진 투쟁, 사파티스타 혁명, 프랑스 총파업, 맥도날드 불매운동 등이 바로 그런 예다. 여기에 참가한 사람들은 프롤레타리아트를 대체한 새로운 개념인 ‘다중’으로 범주화된다. 이 다중들은 정보를 공유화하며 결국에는 ‘버추얼 코뮌’이라는 신질서를 창조하게 된다. 요컨대 ‘자율주의적 맑스주의’는 정보시대의 자본이 스스로 만들어 놓은 전지구적 네트워크를 역으로 이용하며 노동자들의 연대와 잠재성, 자발성을 강조한 새로운 투쟁방식을 지향한다.
저자 위데포드는 한국어판 서문에서 한국이 세계에서 가장 ‘통신망이 발달한’ 나라이며 세계시장의 규칙에 이의를 제기하는 다중과의 창조적 조우라는 ‘가설’을 검토할 좋은 실험실이라고 말한다. 글쎄, 진보정당의 지지율이 10%를 채 넘지 못하는 상황에서 이런 주장은 지나친 비약이 아닐까? 또 하나 아쉬운 것은 기존 좌파 담론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왜 정보사회에서 맑스주의를 살려야 하는가?’에 대한 답이 부족하다는 점이다. 단지 세계자본의 지배와 신자유주의에 대항하기 위한 투쟁이라는 설명은 너무 추상적이라 와 닿기가 힘들다.
그럼에도 이 책의 문제의식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정보/디지털 자본주의라는 것이 마냥 좋은 것은 아니며, 거기에도 모순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니엘 벨이나 토플러 등 ‘미국파’ 미래학이 ‘장밋빛 환상’ 이거나 ‘자기 예언적 계획’은 아닐까 라는 의심을 하게 만드는 것만으로도 일독할 가치가 충분하다.
by 리브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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