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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에곤실레 |  | |
| 김기덕의 영화 <파란대문>, 지저분한 바닷가 모래사장에서 한 창녀가 들고 있는 <서 있는 누드>를 만나게 되었다. 28년의 짧은 생을 살다간 오스트리아 빈의 천재화가 에곤 실레, 나는 그의 삶을 기어코 더듬어 보게 되었다. 에곤 실레의 작품은 크게 자화상과 누드화로 나눌 수 있다. 자화상은 실레가 비정상적일 정도로 강박관념을 갖고 추구하던 주제였다. 또 하나는 누드화인데 그의 누드화에는 수치심 이라든가 도덕심이 없다. 에곤 실레만큼 성(性)에 대해 절박한 의문을 품은 작가도 드물 것이다. 실레가 보여주는 누드화들은 고통에 사로잡혀 있는데, 이는 자신의 내면 구석구석에 스며 있는 병적인 부분들을 철저히 뒤틀어놓고 있는 듯 하다. ´모든 것을 경험하고 싶은 열망´에 사로 잡혀 있던 그는 그 열망을 극단적인 누드의 몸짓으로 표현하고 있다. 그의 작품 속 인물들은 에로틱하거나 아름답게 느껴지기보다는 눈, 코, 입, 손, 팔, 다리 어느 것 하나 정상적으로 달려있지 않다. 마치 몇 명의 인간을 분해해서 붙여 놓은 듯 부자연스럽고, 인위적으로 뒤틀린 모습 때문에 오히려 징그럽고 끔찍한, 때론 불쾌하고 역겨운 느낌마저 들게 한다. 그래서 일까, 에곤 실레의 작품을 감상하면서 예술의 진지함에 대해서 나 자신에게 물어 보지 않을 수 없었다. 실레의 작품에 나오는 주인공들의 얼굴 표정, 그리고 몸짓을 보자. <앉아있는 어린 소녀>, <검은 스타킹을 신고 앉은 소녀>,<무릎 꿇은 누드 자화상>, <자위하는 자화상>, <서 있는 누드>, <에로스> 등은 예술로써 진지해 보이기보다는 과히 엽기적이고 기괴한 동작으로 시선을 끌기에 마땅하다. 기계 부품처럼 조립되어 있는 손과 팔다리가 만들어 내는 요염하고도 퇴폐적인 자세, 과장되고 엄청나게 선정적인 포즈...과연 이런 것들이 예술의 테두리로 들어올 수 있을까, 사실 그의 작품을 보면서 이런 고민들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은 나의 편견이나 자만, 혹은 실수일 수도 있다는 것을 나 또한 알고 있다. 실레에 대해 버릴 수 없는 이중적인 생각들, 이 자체가 실레를 인정할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그러므로 예술의 경계란 인간의 자만이 만들어 낸 독선일지도 모른다. 앞에서도 잠시 언급했듯이 다른 작가들과는 달리 실레 그의 작품에는 성에 대한 도덕심과 수치감이 보이질 않는다. 오히려 그의 작품에서 그는 성을 과감히 드러내므로 인해 성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지 않았나 하는 생각까지 들게 한다. 그가 그려낸 여인들은 놀라울 만큼 저속하다. 그러나 실레는 수치스러운 것을 아름답게 치장하거나 번지르한 웃음으로 그려내지 않았다는 점에서 오히려 도덕적이라고 평가받을 수 있지 않을까. 이런 점에서 어느 화가의 논평처럼, 실레는 인간들의 내면적 삶이 안고 있는 모든 문제들을, 편견 없이 가장 솔직하게 표현한 어쩌면 마지막 화가일 지도 모른다. 스스로 쳐 놓은 예술의 덫, 그것은 성을 통한 삶의 환희, 자기 마취적인 환락의 세계일 것이다.
by 영풍문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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