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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간밤에 다녀간 마법사 ( 원선화) |  | |
| 2001년도 강원일보 신춘문예 당선 작품
간밤에 다녀간 마법사
원선화
비구름이 하늘을 덮더니 이내 장독 소래기에 빗방울 부딪히는 소리가 요란했다. 대문 앞에 서툴게 꽂아놓은 나무말뚝이 휘청거렸다. 덩달아 말뚝에 새겨진 글자도 말뚝 따라 그네를 탔다. 글자는 위아래가 거꾸로 새겨져 있어서 물구나무를 서야만 「함께 크는 아이들」이라고 제대로 읽을 수 있었다. 마을에서 제일 많은 아이들이 사는 이 집을 사람들은 「함께 크는 아이들」이라고 불렀다.
미소는 태어나자마자 「함께 크는 아이들」에서 자랐다. 엄마, 아빠는 계시지 않았지만 형제자매는 누구보다 많았다.
『꽃잎아, 좋지? 빗물도 받아먹고 바람도 받아먹고 세상 구경도 하고….』
미소는 마루에 배를 깔고 누워 책갈피에 끼워놓은 민들레꽃잎을 들여다봤다. 오랜만에 소풍을 나와선지 마른 꽃잎에선 향내가 나는 것 같았다. 마당 한 구석에선 병아리 궁전이라고 문패를 단 상자가 비를 홀딱 맞고 있었다.
『언니! 병아리가 추워서 바들바들대. 병아리 집 좀 같이 옮기자.』
바다가 다급하게 소리쳤다. 하지만 억수같이 퍼붓는 빗소리 때문인지 미소는 그 소리를 듣지 못했다.
『또 들레 언니 생각하는구나.』
혼자서 상자를 옮기느라 낑낑대며 바다가 입술을 샐룩거렸다.
들레와 미소는 소문난 단짝이었다. 하지만 지난 겨울, 유난히 몸이 약했던 들레는 무지개너머 세상으로 훌쩍 가버렸다. 그때부터 미소에겐 버릇이 하나 생겼다. 둘레가 보고싶어질 때면 으레 책갈피에서 민들레꽃을 뒤져내곤 하는 것이다. 이름이 같아서일까? 들레는 유난히 민들레를 좋아했다. 민들레꽃을 보고 있으면 금세라도 들레가 「미소야, 놀자!」하고 대문밖에서 부를 것 같다. 미소는 자꾸만 대문을 흘끔거렸다. 그 때 담 너머로 파란 우산 한 개가 빠르게 지나가는가 싶더니 성큼 대문으로 들어섰다. 영아였다. 줄곧 뛰어왔는지 숨을 헐떡거렸다.
『미소야! 큰일났어. 들레네 할머니가 편찮으시대.』
『그게 무슨 소리야?』
『엄마가 그러시는데 들레네 할머니가 몸살이 나셨대.』
미소의 얼굴이 먹구름처럼 어두워졌다.
『내가 자주 찾아갔어야 했는데….』
눈물이 핑 돌았다. 영아가 미소의 어깨를 토닥였다.
오늘처럼 예고없이 소나기가 내리면 미소는 발을 동동 구르며 비가 멎기를 기다리거나 친구들의 우산을 기웃거려야 했다. 하지만 들레와 짝이 되고부터 미소에게도 우산을 가져다 주는 사람이 생겼다. 들레네 할머니가 수업이 끝나기를 기다려 들레와 미소 앞으로 우산 두 개를 나란히 내밀곤 하셨다.
『어떻게 하면 할머니가 빨리 나으실까?』
『영양가 있는 걸 드시면 곧 나으실 텐데.』
병아리 상자를 흘끔거리며 영아가 대답했다. 바다가 「병아리 궁전」앞에 쪼그리고 앉아 빵부스러기를 떼어주고 있었다.
『잘 먹어야 해. 병아리야. 그래야 빨리 알을 낳지.』
닭이 되려면 한참 멀었는데도 바다는 틈만 나면 알을 낳으라고 성화였다. 며칠 전부터 「함께 크는 아이들」의 식구가 된 병아리는, 영아가 미소의 생일선물로 준 것이었다. 정작 미소보다도 바다가 더 신났다. 모이를 주고 청소도 하고 자기에게도 돌봐줄 동생이 생긴 것에 여간 즐거워하는 눈치가 아니었다. 잠보인 바다는 요 며칠동안 꼭두새벽에 일어났다. 그리고 아침 인사를 한다며 병아리가 깰 때까지 지켜보다가 상자 곁에 쪼그려 잠들곤 했다. 영아가 병아리를 곁눈질하며 눈짓을 했다.
「그래. 병아리를 가져다 드려야지. 병아리를 삶아 드시면 금방 나아지실 거야.」
미소는, 바다가 맘에 걸렸지만 할머니에게 병아리를 드리기로 마음먹었다.
종일 내리던 비는 다음날 오후가 되어서야 그쳤다. 미소는 학교에서 돌아오자마자 책갈피에서 민들레를 뒤져냈다. 그리고 바다 몰래 병아리를 품에 감추곤 문을 빠져나왔다. 한 손엔 민들레를, 한 손엔 병아리를 들고 미소는 들레네로 향했다. 들레네 집은 마당이 넓어서 동네 아이들에게 근사한 놀이터였다. 장난감이며 맛있는 과자도 언제나 넘쳐났다. 하지만 들레가 죽은 후로 할머니는 멍하니 먼 산만 바라보는 때가 많으셨고 아이들은 그런 할머니를 무서워했다. 점점 할머니네 집은 아이들의 발걸음이 뜸해져갔다.
들레네가 가까워질수록 조바심이 생겼다. 콧잔등으로 땀이 배어 나왔다. 마침내 들레네 집에 다다랐지만 주위는 쥐죽은듯 고요했다. 벨을 눌러도 인기척이 없었다. 돌아갈까 망설이다가 혹시나 싶어 살그머니 문을 밀어보았다. 삐걱, 문이 열렸다. 문틈으로 빼꼼 들여다보니 넓은 뜰과 화단이 보였다. 초여름 햇살이 내리쬐는데도 을씨년스러웠다. 무성한 잡초가 화단에 가득했다. 나비도 벌떼도 못본척하고 향기 없는 화단을 지나쳐 갔다.
「지난 여름엔 꽃이 한가득 이었는데… 들레가 슬퍼할 거야.」
들레는 싱그러운 꽃무더기 곁에 앉아 책 읽는 걸 좋아했다. 가만가만 귀기울이면 꽃의 목소리가 들린다며 다리가 저리도록 앉아 있곤 했었다. 미소의 마음은 북극보다 시렸다.
미소는 천천히 계단을 올라가 현관 손잡이를 돌렸다. 문이 열리는 소리에도 할머니는 의자에 앉아 창 밖만 내다보고 계셨다.
「깜짝 놀라게 해드려야지.」
미소는 가지고 온 선물을 뒤로 감추고 살금살금 할머니께 다가갔다. 그리고는 뒤춤에 감춘 민들레를 불쑥 내밀었다.
『짜잔~ 들레가 제게 준 민들레예요. 할머니 드릴게요.』
할머니의 잿빛 눈동자가 헤드라이트만큼이나 커졌다. 민들레를 건네 받는 깡마른 손가락이 바르르 떨렸다. 미소가 걱정스럽게 물었다.
『할머니! 많이 아프세요?』
『아니란다. 꼬마 아가씨가 걱정이 되어서 왔구나. 괜찮단다. 이제 다 나았지.』
『이 병아리도 할머니 드릴게요. 꼭 나으셔야해요.』
『이건 병아리 아니냐?』
할머니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할머니는 영양가 있는 걸 드셔야 한대요.』
입 밖으로 병아리를 도로 달라는 말이 튀어나올 것 같아 미소는 부리나케 서재로 들어갔다. 허둥대는 뒷모습을 바라보며 어느새 할머니가 환하게 웃고 있었다.
서재엔 들레가 즐겨 읽던 책들이 여전히 같은 자리에 꽂혀있었다. 미소는 피터팬을 꺼내들었다. 책장이 너덜너덜했다. 피터팬은 들레가 가장 좋아하던 책이었다. 책장을 막 넘기려는데 손바닥만한 종이가 발등으로 떨어졌다. 종이엔 얼어붙은 웅덩이에서 썰매를 밀고 당기는 두 아이의 모습이 그려져 있었다. 빨간 목도리를 칭칭 둘러맨 아이는 미소였고 토끼 귀마개를 눌러쓴 아이는 들레였다. 미소의 볼에 보조개가 패였다.
『저녁이면 들레는 피터팬을 읽어달라고 조르곤 했단다.』
어느 결에 할머니께서 등뒤에 서 계셨다. 미소가 깜짝 놀라 벌떡 일어났고 그 바람에 책이 방바닥으로 떨어졌다. 할머니께서 책을 줍다말고 그림을 잠시 눈여겨보셨다. 그리고는 책갈피에 그림을 도로 꽂아 넣으시며 말했다.
『모처럼 만에 온 꼬마손님을 그냥 보낼 수는 없지. 나는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도넛 만드는 할머니다! 이제 곧 도넛 맛을 보게 해주마.』
할머니께서 빙그레 웃으시더니 앞치마를 질끈 두르셨다. 이윽고 분주한 손놀림이 시작됐다. 도넛 튀기는 냄새에 군침이 절로 나왔다. 그러나 막상 한 입 베어 무는 순간,
「윽!」
도넛은 소금에 절인 듯 몹시 짰다. 아마도 소금을 설탕으로 착각해서 집어넣으셨나보다. 미소는 입 속으로 도넛을 굴리며 애써 웃음을 지었다.
『와아! 정말 맛있어요. 이거 전부다 제가 먹어도 되나요?』
『이런! 욕심꾸러기 같으니라고….』
할머니가 미소의 코를 잡아 비틀며 큰소리로 웃으셨다. 아팠지만 미소의 마음은 새털 같았다.
집에 돌아와 보니 바다가 퉁퉁 부은 눈으로 병아리 궁전을 끌어안고 있었다.
『병아리가 없어졌어. 쥐가 물어갔나봐. 아앙!』
달래고 얼러주어도 좀처럼 울음을 그치지 않았다. 미소는 슬그머니 방으로 들어갔다. 바다에게 미안했다. 울음소리가 점점 거세졌다. 미소는 머리끝까지 이불을 덮어쓰고 낮게 중얼거렸다.
『용돈 생기면 제일 먼저 바다에게 병아리를 사다 줘야지.』
다음날 학교수업이 끝난 후 미소는 회의를 열었다. 안건은 「쓸쓸한 할머니를 신나게 해드리자!」였다. 「함께 사는 아이들」을 비롯한 동네 아이들이 운동장에 둥글게 모여 앉았다. 제일 먼저 미소가 입을 열었다.
『들레네 할머니가 굉장히 외로우신 것 같아! 꽃 가꾸는 일도 좋아하셨는데 화단이 엉망인데도 그냥 놔두시고 말야. 그래서 우리가 할머니를 즐겁게 해드렸으면 좋겠어.』
『그래. 엄마가 그러시는데 허리가 더 구부러지신 것 같대.』
영아가 옆에서 거들었다.
『어떻게 즐겁게 해드리지? 할머니는 무서운 표정만 짓고 계시잖아. 화를 내실지도 몰라』
「함께 사는 아이들」의 한 식구이며 주근깨 투성이 옥희가 시큰둥하게 말했다.
『아니야. 어제 미소가 문안 갔었는데 도넛도 만들어주셨대. 우리가 할머니를 기쁘게 해드릴 일이 있을 거야. 찾아보자.』
『그래. 그래.』
영아의 말에 아이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래. 그래」를 연발했다.
『그런데 어떻게 할머니를 기쁘게 해드리지?』
아이들은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 물을 끼얹은 듯 잠잠했다. 고요를 깨고 말문을 연 건 미소였다.
『화단이 잡초 밭이 됐더라. 꽃은 없고 온통 잡초투성이야.』
그 때 꽃집 아이가 손가락을 퉁기며 일어났다.
『그래 그거야. 우리가 화단을 꾸며드리자. 예쁜 꽃을 심는 거야.』
아이들이 일제히 동그란 눈을 빛냈다.
『와! 화단이 금세 환해질 거야.』
꽃을 심기로 정하자 이번엔 만날 날짜를 정했다.
『금요일로 하자.』
『토요일 저녁이 좋을 것 같아.』
『그래 토요일마다 할머니는 서울에 있는 병원에 가시잖아.』
『할머니가 돌아와서 꽃밭을 보면 감짝 놀라시겠지.』
『기절하시면 어떻게 하지?』
『하하하.』
깜짝 선물을 계획하면서 아이들은 몹시 신이 났다.
약속한 토요일 밤, 아이들이 하나 둘 공터에 모여 들었다. 손에, 손에 씨앗과 꽃을 들고 있었다. 꽃가게 아이의 지시에 따라 아이들은 씨앗과 꽃을 화단에 심었다. 가져온 화분들은 층계 난간과 창마다 두었다. 선인장 가시에 찔려 발갛게 부어오른 피부를 박박 긁으면서도 아이들은 즐거웠다. 꽃 한 송이 심을 때면 웃음도 같이 묻혔다.
아이들이 모두 돌아가고 할머니네 뜰에 새벽이 찾아왔다. 할머니는 일요일 아침 일찍 집에 돌아오셨다. 열쇠를 대문에 꽂을 때만해도 할머니는 밤새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짐작조차 못했다. 그러나 마당으로 한 걸음 떼어놓는 순간 화들짝 놀라서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다.
『에구구, 엉덩이야!』
할머니는 엉덩이를 감싸쥐고 황급히 되돌아나가셨다. 그리고는 연거푸 문패를 확인하셨다.
『내 집이 맞는데….』
눈을 문대봤다. 역시 똑같은 문패였다. 이번엔 돋보기 안경을 찾아 걸치셨다.
『집을 잘못 찾은 건 아닌데… 간밤에 천사가 다녀갔나?』
텅 빈 뜰이 하룻밤새 꽃으로 가득 차다니 신기할 뿐이었다. 문득 층계 난간에 이리저리 나있는 손자국들이 눈에 띄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없던 흔적이었다. 아이들이 흙투성이 손으로 층계난간을 잡고 오르락내리락 할 때 생긴 게 분명했다. 작고 귀여운 수십 개의 손바닥이 사방에서 햇빛을 받아 반짝였다. 그제야 할머니는 이 멋진 마술의 주인공이 누군지 깨달았다. 야윈 뺨에 눈물 방울이 떨어졌다.
『이런, 이런… 엉터리 마법사들이구먼. 뿌리가 제대로 묻히지 않았는걸.』
할머니는 소맷부리로 눈물을 훔쳐냈다. 그리고는 창고에서 물뿌리개와 꽃삽을 들고 나오셨다. 화단에 심은 꽃은 뿌리가 너무 깊이 들어간 것도 있었고 하얀 뿌리가 비어져 나온 것도 있었다. 하지만 할머니의 꽃삽이 닿을 때마다 알맞은 깊이로 심어졌다.
그 날 이후 할머니의 화단에는 꽃향기가 넘실댔다. 더 좋았던 건 아이들의 웃음소리였다. 할머니에겐 수십 명의 손자손녀들이 새로 생긴 셈이었다. 굳게 잠겼던 대문은 언제나 활짝 열려 있었다.
마술 같은 토요일부터 일주일째 되던 날, 미소는 마침내 병아리를 샀다.
뛸 듯이 좋아하는 바다를 생각하자 콧노래가 절로 나왔다.
『바다가 굉장히 기뻐할거야.』
신바람이 난 미소는 마당에 들어서기가 무섭게 고래고래 외쳤다.
『바다야! 쥐가 물어간 병아리를 찾아냈어. 우리 학교 담벼락에서 떨고 있더라.』
그러나 어찌된 영문일까? 바다는 좋아하기는커녕, 오히려 이마를 샐룩거리며 골똘히 생각에 잠긴 눈치였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감싸쥐고 있던 손바닥을 펼쳐보았다.
『그럼 이 병아린?』
어디선가 본 듯한 병아리가 손바닥 위에서 놀고 있었다. 이번엔 미소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바다가 마루 한구석에 놓인 바구니를 가리켰다. 바구니 안엔 작은 선물꾸러미가 담겨 있었는데 「꽃의 마법사 미소에게」라고 적혀 있었다. 포장을 펼치자마자 미소의 입에서 환호성이 터졌다.
『와아!세상에.』
미소와 들레가 썰매를 끄는 그림이 액자에 담겨있었다. 미소는 액자 귀퉁이에 꽂힌 엽서를 뽑아내 큰소리로 읽어 내려갔다.
「네 선물 덕에 몸살이 다 나았구나! 그리고 병아리는 너희에게 더 소중할 것 같아서 돌려준단다. 할머니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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