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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석사
신경숙 외 : <부석사>(제25회이상문학상수상작품집 2001년도)

출판사 : 문학사상사 / 출판일 : 2001/2/5 / 쪽수 : 372

그래서?
나는 집요하게 물어댔다. 물론 그녀가 그렇게 쉽사리 대답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아까부터 낮에 먹은 커피가 위장에서 부글부글거리면서 끊임없이 존재감을 알리고 있었다. 낮도 아니고 밤도 아닌 그 비겁한 시간에 우리는 그렇게 서있었다.
평소 그녀는 벙어리처럼 보일 정도로 말을 하지 않는다. 대신 다른 방식으로 소통하는 것을 즐긴다. 이를테면 가벼운 눈짓이라든지 살짝 올라가는 입꼬리라든지 섬세한 손가락이라든지... 그런 것 말이다. 그렇기에 어떨 때는 한 마디로 끝나면 되는 것이 몇 십분은 족히 걸리는 장황한 동작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오늘도 그런 날 중의 하나이다.
짐짓 모르는 척 집요하게 나는 물었다. 모든 일에는 시작과 끝이 있고 원인과 결과가 있는 법 아니야? 너의 그 무책임한 인텔리 의식은 결국 아무 것도 해결하지 못하지 않아? 금방 그녀는 슬픈 눈이 돼 버린다. 파. 커다란 버스가 육중한 문을 열며 수많은 교복 입은 아이들을 뱉어낸다. 그 주위로는 으슥한 시간을 즐기는 연인들과 바쁘게 종종 걸음을 걷는 어른들이 있다. 그녀의 눈은 거기에 가서 머무른다. 나는 그만 알아버렸다.
신경숙의 <부석사>는 그렇게 망연자실해진 나를 길 한복판에 놓아두었다.
이 소설에는 여자와 남자가 나온다. 이름도 나이도 알 수 없고 어쩌면 국적도 상관없는 그런 여자와 남자이다. 둘 모두 사람에게 배신당한 경험이 있다. 둘 모두 상처 입은 짐승을 돌본 경험이 있다. 사소한 버릇의 차이를 제외하고는 둘은 거의 닮은꼴이다. 어쩌면 나의 이야기일 수도, 어쩌면 정류장에 선 사람의 이야기일 수도, 어쩌면 이 나라가 아닌 다른 나라에서 일어날 수도 있는 철저한 익명성을 지닌 그런 소설이다. 마치 돌멩이 같다. 아니 처음부터 그녀가 파 놓은 함정이다. <부석>이라는 이름의 함정 말이다.
<부석>이란 말 그대로 ´떠있는 돌´이라는 뜻이다. 두 개의 큰 바위가 위아래가 맞닿지 않은 채 약간의 틈을 만들며 떠 있어서 <부석사>라고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그녀가 내 보인 첫 번째 상징은 이 ´단절감´에 있다. 인간관계의 단절성과 유한성이 그것이다. 이것을 극복하기 위한 여자와 남자의 노력은 눈물겹다. 여자는 P에게 입은 상처에 괴로워하면서 기존의 자신을 모두 바꾸어버린다.
한 줄로 선 화분을 도저히 참지 못하고 괜히 흩트려놓는다든지, 지금까지 갖지 않았던 운전 면허증을 억척스럽게 따서 한밤중에 괴성을 지르며 고속도로를 질주한다든지. 그런 것 말이다.
남자는 사실상 이별한 K의 집 근처에서 하루종일 서성거린다. 결국 다른 남자에게 자신에게와 똑같은 행동을 하는 K를 발견하고 돌아서긴 하지만 그의 노력은 끝나지 않는다. 동료를 신뢰한 것이 그것, 하지만 그의 노력은 배신으로 결실 맺는다.
사람에게 상처받은 여자와 남자에게 ´사랑´은 허락되지 않은 마약이다. 외로운 이들의 사랑은 개와 수리부엉이에게 향하게 된다. 하지만 무의식적으로 이들은 일말의 희망을 가지고 있다. 낯선 집을 향한 끊임없는 관심과 결국은 담을 넘는 용기가 그것이다. 이름도 모르는 이성과 1월 1일 부석사로 향하는 용기도 그것이다.
결국 이들의 종착지는 <부석사>여야 했다. 하지만 여자와 남자의 바람은 손에 잡힐 듯 하면서도 잡히지 않고, 결국은 부석사가 아닌 지도에서도 찾을 수 없는 낭떠러지에 도달하게 된다.
낭떠러지는 과연 절망이었을까?
나는 그녀의 대답을 들을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녀가 대답을 하지 않았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이미 그녀는 <부석>에서 질문과 함께 답도 던져놓은 것이다. 떠있는 두 개의 돌은 끝내 만나지 않는다. 하지만, 그것은 하나이다. 독립성을 가진 하나인 것이다. 마치 저고리와 치마가 한 벌이듯이 이들은 하나인 것이다. 그녀의 대답은 사뭇 진지하다. 서로의 차이를 좁혀 가는 것, 결국 붙어버리지는 못할지언정 포기하지 않는 것, 그 과정에 의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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