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joungul.co.kr 에서
제공하는 좋은글 입니다.
바쁜 일상 속에 잠시 쉬어가는 공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
|
|
|  | 붉은 손 클럽 |  | |
| 배수아 : <붉은 손 클럽>
출판사 : 해냄출판사 / 출판일 : 2000/9/27 / 쪽수 : 210
<차라리 무너지고 싶다>
살아가는 게 쉽지가 않다. 나 자신을 지탱하기 위해선 끊임없이 노력하고 세상의 변화에 따라가야 한다. 한편으론 계속 약한 생각이 들지만 겉으로는 그렇지 않은 척하며 강한 척하며 사는 수밖엔 없다. 하지만, 때때로 그렇게 나 자신을 지탱하는 게 정말 힘들고 다 포기해 버리고 싶은 생각이 들 때도 있다.
이 소설은 다소 메저키즘적인 성향이 있는 소설이다. 자신을 학대한다는 것은 고통스러워 지고 싶은 게 아니라 나를 지탱하던 삶의 의지, 자존심에서 벗어나 고통스러움을 인정하고 확인함으로써 내 내면을 솔직하게 드러내 보이는 일이 아닌가 한다. 계속 나는 내 자신에게 말해야 한다. 상처를 입어도 ´괜찮아.´, 실패해도 ´다음에 잘할 수 있어.´ 하지만, 항상 내 내면은 전혀 괜찮지 않은 게 사실이었고 그냥 그걸 무시해야 했다. 왜냐하면 나는 세상을 살기 위해선 강해야 했으니까. 그런 무시된 나의 내면은 계속 응어리로 남는다. 강한 척하지 않아도 되고 실패해도 되는 게 세상이라면 좋지 않을까? 나는 그런 데에 메저키즘의 의미가 있다고 본다.
상처를 계속 받게 되면 사람은 자신이 강해졌다고 느낀다. 어쩌면 정말 강해지는 걸지도 모르지만..하여간 그래서 상처를 입어도 ´이까짓 것쯤 아무것도 아니야..금방 잊을 수 있어´라고 말할 수 있게 되는데, 아마 자학은 거기서 쾌감을 얻기보단 ´나는 이러한 일을 해도 아무렇지도 않다.´ 라는 사실을 확인하기 위한 행동이기도 할 것이다.
나는 자학이 깊은 상처를 의미한다고 본다. 이미 한나가 상처에 무감각하기에 어디서도 슬픔은 드러나지 않지만, 육체의 순결의 맹세 같은 것은 상처가 깊은 사람이 하는 행동이 아닐까? 더 이상 상처받기 싫어서가 아닐까? 소설에서도 한나는 남자에게 강한 인상을 주지도 못하고 그냥 기억 속에서 잊혀져가다 생각나면 한 번 찾아오는 여자에 지나지 않는다. 나는 한나가 실제로는 상처 입었음에도 ´난 그런 건 아무렇지도 않아´란 생각 때문에 자신이 상처입지 않았다고 생각하고 상처 입어 더 이상 버티기 힘들어진 자신을 자학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어찌 보면, 그냥 특이해 보이기만 하는 소설이지만 잘 곱씹어보면 깊은 상처와 슬픔이 느껴지는 소설 같다.
|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