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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헤르메스의 기둥 1 |  | |
| 송대방 : <헤르메스의 기둥 1>
출판사 : 문학동네 / 출판일 : 1996/12/12 / 쪽수 : 376
<˝연금술의 이념=경계의 미학>
낮에서 밤으로 넘어가는 황혼녘, 밤에서 낮으로 넘어가는 새벽녘, 집안에서 집밖으로 넘어가는 아케이드, 그 아케이드를 둘러싼 무한한 열주들.
파르미지아노라는 무명의 화가가 있었다. 일명 ´매너리즘´ 시대의 화가라는 그가 그린 그림 중에 ´목이 긴 성모´라는 그림이 있다. 그 그림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오른쪽 하단 귀퉁이에 두루마리 종이를 들고 있는, 성 제롬으로 추정되는 축소된 사람이 하나 서 있고, 그 뒤로 역시 자세히 들여다보지 않으면 안 될, 갈래갈래 열주가 늘어서 있다. 한가지 놀라운 사실. 아래 부분의 열주와 윗부분의 하나의 기둥은 성모의 푸른 겉옷자락에 의해 절묘하게 그 경계가 감춰져 있다는 점이다. 이 소설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그 방대하고 장황한 지적 전시(展示)에도 불구하고, 의외로 간단하다. 처음부터 끝까지, 이 소설은 하나의 기둥이면서 여러 개의 기둥(열주)인 그 그림 이야기를 하고 있다.
´하나이면서 전체´, ´천천히 서둘러라(festina lente)´와 같은 모순어법의 나열 역시 결국엔 그 경계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단순히 ´신들의 전령´으로만 알려져 있는 헤르메스의 어원이 고대 그리스 시대 이정표로서 길 위에 놓여져 있던 기둥 위의 돌이라는 것과, 그로부터 파생된 ´나그네들의 신´이란 상징적 의미, 그리고 서양회화에서 곧잘 등장하는 기둥이 어떤 식으로든 헤르메스와 연관이 있다는 점, 신과 인간, 이승과 저승을 넘나드는 경계에 서 있는 중재자로서의 신이 바로 헤르메스라는 점, 이런 의미에서 헤르메스와 예수는, 수세기 동안 이단으로 단죄받았던 연금술이니 헤르메스사상이니 그노시스주의에 의해서 거의 동일시되었다는 점, 이 모든 것들이 결국엔 하나의 결론으로 귀결된다. 진실은 때론 모순과 경계에 있다는 것, 바로 그것이다.
연금술은 단순히 화학이란 자연과학의 모태가 아니다. 연금술은 수세기 동안 서양문화를 지배해온 엄연한 신앙이자 철학이다. 수많은 중세, 르네상스 예술가들 중에 연금술사로 알려져 있는 사람이 적지 않은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여성, 유동의 상징적 의미를 갖고 있는 수은(이는 또한 수성mercury의 수호신인 메르쿠리우스[헤르메스의 로마이름]과도 연결된다)과 남성, 고정의 상징적 의미를 갖고 있는 유황의 결합으로 금을 만들어낸다는 기술적 의미를 훨씬 뛰어넘는 개념이다.
연금술사들끼리의 암호로 주로 사용하던 알레고리화에 자주 등장하는, 반은 남자이고 반은 여자인 그림(남녀추니, 안드로지니,헤르마프로디테), 각각 독과 치유를 상징하는 두 마리의 뱀이 서로 얽혀 있는 모양의 카두세우스(헤르메스의 지팡이) 등은 연금술의 핵심이랄 수 있는 ´반대물의 합일´(Coincidentia oppositorum)을 상징한다. 얼핏 모순되어 보이는 ´반대물의 합일´을 통해 지고지순한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것, 그것이 연금술의 처음이자 끝이고, 또한 이 백과사전식 소설의 처음이자 끝인 것이다.
내 나이 열여덟 때 이 소설이 준 충격은 이루 말할 수 없다. 극동의 한 소녀가 오랜 세월 감춰져왔던 서양 역사의 엄청난 비밀을 알아버린 느낌이었다. 알아서는 안될 것을 알아버린 듯한 죄책감과 함께, 그래도 역시 그럴 수밖에 없는 운명을 타고 난 것이 아닐까라는, 해질녘 황혼 무렵의 그 아찔한 현기증을 느꼈던 걸로 기억한다. 나를 이루는 모든 부분요소들을 연금술의 갖가지 상징과 결부시켜 생각하고, 마치 소설에서 언급된 ´동방의 현자´라도 되는 양 치기를 부리고 다니던 한심한 시절이었다. 하지만 이제 그 경계에서 간신히 빠져나오려 하는 지금에 와서, 이쪽도 저쪽도 아닌 4차원의 세계에 홀로 남겨진 듯한 그 황홀감이 새삼 그리워지는 이유는 왜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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