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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버지의 카메라 |  | |
| 사진 찍는 모습을 보거나 카메라를
보게 되면 그다지 기분좋은 일도 아니면서 입가에 정말로 즐거워서,
우스워서, 미소를 만들어 주는 일이 있다. 벌써 십일 년이 지난 일이고,
오늘도 내 앞에 존재하는 웃지 못할 우스운 일이다.
이 얘기는 어머니가 일본에 다녀오시면서 두 개의 카메라를 사오시면서 시작된다.
중학교 때 사진부에 들었던 누나는 작고 예쁜 카메라를 부탁했고,
어머니는 그 약속을 지키셨다. 지금이야 손바닥만한 카메라가 흔하고 전 자동으로
손가락만 누르면 찍히는 카메라가 전자 대리점에 가면 취향별로
진열되어 있지만 그때만 해도 요즘처럼
흔하지 않았다.
몰매 맞을 얘기겠지만 국산품을 애용하는 요즘 어머니가 사오신 누나의
18㎜ 카메라는 정말 예뻤고 소풍갈 때 내 주위에 친구들이 모이는
이유 중에 하나였다.
누나의 카메라만 사오셨으면 이 얘기를 쓸 필요가 없는데 문제는
아버지의 카메라였다.
어머니는 절대로 사치하시는 분이 아니셨는데 왜 그러셨는지는 모르겠지만
어머니는 아버지의 카메라도 사오셨고, 그 카메라는 사진 작가용으로
십일 년 전 일본에서 히트한 것이었다. 온통 영문과 일어로 설명이 되어 있고,
자동이 아닌 수동이었기 때문에 난 줘도 못 만지는 그런 카메라였다.
어렸을 때 이후 아버지가 그렇게 열심히 공부하시는 모습을 본 적이 없다.
영어와 일어 사전으로 한참을 그 설명서와 씨름을 하신 아버지는
결국 그 카메라의 기량 중 지극히 단순한 렌즈 조절법과
셔터 누르는 법만을 알아내셨다.
니들은 작은 누나의 18㎜ 카메라만 쓰고, 이건 결혼식이나
어디 놀러 갈 때만 써야 한다.
그런 아버지의 말씀으로 보기만 해도 어지러운 아버지의 카메라는
장롱 속에 두툼한 수건으로 싸여져 보물처럼 우리들의 손길을 피했다.
그해 여름 우리 가족은 설악산으로 피서를 떠났다.
당연히 아버지의 목에는 조금은 무거워 보이는 목이 아프시지 않을까 생각케 하는
아버지의 카메라가 너무도 당당히 걸려 있었다.
그때만 해도 난 아버지의 카메라로 찍으면 모델처럼 나올 줄 알았고,
당연히 아버지가 카메라의 기량을 십분 발휘하실 줄 알았다.
그러나 그 카메라는 아버지의 목만 장식해 주었을 뿐 우리 가족이
어렵게 잡은 포즈는 전혀 무시해 버렸다.
누구의 얼굴인지 분간하기 힘든 사진이 태반이었고,
그나마 얼굴이 나온 사진은 몸이 옆으로 삐딱하게 나와 있었다.
그해 우리 가족 피서 사진은 아버지 카메라 덕분에 앨범에 꽂혀지지 못했고,
다시 아버지는 영어와 일어 사전으로 설명서와 씨름을 시작하셨다.
나도 좀 배워보려 했지만 아버지는 애들이 만지는 물건이
아니라며 내가 카메라와 친해질 틈을 주지 않으셨다.
우리 가족의 즐거웠던 한때마저 간직해 주지 못했던 그 카메라는 그래도 당당히
아버지의 보호 아래 날로 그 위상을 더해 갔고 어느덧 우리에게는
누나의 18㎜ 카메라가 우리집을 대표하는 카메라로 자리잡았다.
가끔 누나들과 나만 있으면 장롱을 뒤집어 아버지의 카메라를 연구했지만
우리의 어린 기대를 무참히 저버리고 볼수록 만질수록 침범할 수 없는 성역처럼
멀어져 갔다. 분명히 우리집에는 크고 멋진 카메라가 있었는데
아버지 친구분들과 여러 팀이 놀러 갈 때면 다른 집들과는 달리 우리는
작은 카메라가 초라히 누나 손에 있을 뿐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지극히 유치하고 어린애 티나는 말도 안되는 자격지심인데도
그땐 솔직히 자존심이 상했다. 나도 렌즈를 조절해가며 찍고 싶은데
다른 애들처럼 어깨에 멋진 카메라를 둘러메고 걷고 싶은데
왜 아버지의 카메라는 장롱 속에만 있는 것일까라고 짜증이 나기까지 했다.
더 웃기는 얘기는 사오 년 전부터 18㎜ 필름이 구입하기 힘들어졌고,
나도 이제는 그 카메라를 찍어도 될 나이가 되었으니 당연히 꺼내주시겠지 했는데
아버지는 국산 자동카메라를 하나 사가지고 오시면서
걱정거리 하나를 덜으셨다는 표정으로 너무도 기뻐하시는 것이었다.
이제 더 좋은 신형이 나왔고 그건 들고 다니기 너무 불편하다며
아무리 말씀드려도, 이건 아무나 못 찍는 거야, 임마! 이게 얼마나 좋은건데.
하시며 근처에도 못 오게 하시는 거였다.
그즈음 미국에서 사진 공부를 하던 연태가 귀국했고, 난 그 카메라를 보이며, 이거
정말 기가막힌 카메라야! 라며 자랑을 했었다.
그때의 연태의 표정은 아버지가 못 본 것이 다행이었다.
유행 지난 노래를 자기가 처음 들은 것처럼 친구에게 자랑할 때
그 상대방의 표정보다는 조금 덜한 표정을 지으며,
요즘 이 무거운 걸 누가 쓰냐? 촌티나게, 나올 때는
신경 좀 끌었는데 이건 실패한 카메라야. 하며 그렇게도 위대해 보이는
아버지 카메라의 체면을 땅바닥으로 추락시켜 버렸다.
그때 내가 얼마나 웃었는지, 우리 아버지가 얼마나 귀엽게 느껴졌는지
글로는 도저히표현이 안된다.
재작년 작은 누나 결혼식날도 아버지의 카메라는 칙칙한 장롱 속에 있어야 했다.
그러다보니 이젠 집안 식구 누구도 아버지의 카메라에 관심을 두지 않는다.
하지만 아버지는 가끔 한가하실 때마다 여전히 카메라를 꺼내어
보고 닦으면서 뿌듯해 하신다.
얼마 전에 장난삼아 한 번 아버지에게 카메라를 빌려달라고 한 적이 있다.
이젠 별생각 없이 빌려주실 줄 알았는데 역시 우리 아버지는 대단한 분이셨다.
십일 년 전 그 카메라의 애정을 그대로 간직하신 채, 이건 아무나 못 찍는 거야,
임마! 이게 얼마나 좋은 건데…….
하시며 당신이 그 카메라의 제작자인 것처럼 자랑스러워 하셨다.
세월이 흘러 기술이 발달해 손톱만한 카메라가 나와 사람들의 마음을 찍어 낸다고
해도 장롱 속에 카메라보다 아버지의 마음을 끌 수 있는 카메라는 없을 것이다.
어떻게 보면 너무도 고지식하게 보이시지만 신상품만 나오면
가지고 있던 것에 기다렸다는 듯이 싫증을 내는 내게
아버지의 카메라는 웃고 있을 수만은 없는 잔잔하고 깊은 그 무언가를 준다.
언제 시간이 나면, 아니 시간을 내서 아버지의 카메라를 한 번 닦아봐야겠다. 어찌
그 깊은 마음을 다 느낄 수 있겠냐마는 감히 십일 년 아버지의 손길을 조금이라도
느껴보고 싶다. 언젠가 내게도 소중한 그 무엇이,
내게도 가장 사랑스런 그 무엇이 생길거라는 꿈을 꾸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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