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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GATE 21 |  | |
| 21번 게이트, 앞에서 네 번째,
옆에서 일곱 번째 파란색 의자에 앉아 있던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방금 방금
안타로 타점을 올린 송구홍의 이름을 외치며 환호하고 있었다.
순간 그녀의 왼쪽 허벅지에 올려 놓았던 오징어 다리 두 개와 몸통이 조금 붙어
있는 머리가 그녀의 왼쪽 허벅지에서 송구홍의 안타와 함께 땅으로 곤두박질 하
였다. 하지만 지금 그녀는 떨어진 오징어 다리 두 개와 몸통이 조금 붙어 있는
머리가 문제가 아니었는지, 슬쩍 한 번 쳐다보지도 않고 21번 게이트, 앞에서 네
번째, 옆에서 일곱 번째 파란색 의자에 다시 앉았다.
이번 타석에서 안타가 나온다면 2루에 나가 있는 송구홍이 빠른 발을 이용해 홈
으로 들어올 테고 경기는 역전되어 버리는 아주아주 중요한 상황이었다.
타석에 들어온 유지현은 신인답지 않은 침착한 자세로 타석에 임하고 있고, 선
발로 나와 지금껏 역투하고 있던 해태의 강심장 조계현 투수는 경기의 중요성을
피부로 느끼는지 긴장하고 있는 모습을 역력히 드러내고 있었다.
그녀 역시 목이 타는지, 음료수를 들고 다니는 아주머니가 게토레이를 그녀에게
건네주고 있었다. 평소 어떤 물건이든지 정가가 아니면 구입하지 않던 그녀였는
데 경기에 열중한 나머지 지금 자기가 산 게토레이가 정가의 두 배나 된다는 사
실도 잊은채 그녀는 두 개의 게토레이 값을 건네고 있었다.
그러한 그녀의 뜨거운 응원에도 불구하고 평소찬스에
강한 유지현은 오늘은 날이 아니었는지 유격
수 옆 평범한 범타로 끝났고 그녀는 매우 실망한 표정으로 자리에 앉았다.
그녀의 왼쪽 이어폰에서는, 사랑하기 위해서는 이 책을 꼭 봐야 한다는
라디오광고가 들려왔다. 그 다음 광고, 100만 개를 팔았고,
3년 연속 능력개발 히트 상품이라는 메로나 광고에는
관심이 없었는지, 왼쪽 귀에서 이어폰을 빼내고 게토레이를
21번 게이트, 앞에서 네 번째,
옆에서 일곱 번째 파란색 의자 옆에 놓고 있었다.
야구장 측에서 홈 관중을 위한 서비스로 응원 분위기를
고조시키기 위해 고용한 치어리더들이 준비해 온 동작들을
음악에 맞추며 흥을 돋우고 있을 때
그녀는 21번 게이트, 앞에서 네 번째, 옆에서 일곱 번째 파란색 의자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가고 있었다.
늘 긴장된 순간이 지나고 나면 화장실에 갔던 그녀는 지금 화장실 문을 열고 있
을 것이다. 그녀는 평소 습관대로 누누히 강조하는 오리지널 샤넬 백에서 종이
비누를 꺼내어 땀 맺힌 손을 깨끗이 닦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볼 일을 보고 나와 또 손을 씻을 것이다.
그녀는 화장실에 들어가기 전에 한 번 손을 씻고, 화장실을 나와서 또 한 번 손
을 씻어 내는 깔끔한 습관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 그녀의 청결한 습관은 음식을
먹거나 차를 마실 때 특히 심해지곤 하는데 그 덕분에 나도 이빨이 비칠 정도로
투명한 유리잔에 와인을 먹을 수 있었다.
물론 그녀가 자주 찾는 음식점이나 찻집은 언제나 긴장된 상태에서
주위를 의식해야 했고, 오늘은 조금 느끼했다. 그래도 잘 먹었다.
하며 내게 인사를 건넬 때면 무척 행복하긴 했지만 월말이면
어김없이 날라오는 카드 고지서는 조금 부담스럽기도 했다.
21번 게이트로 돌아온 그녀는 다시 이어폰을 왼쪽 귀에 꽂고 서너 알인가 대여
섯 알인가 되는 팝콘을 입 속에 넣고 오물오물 씹고 있었다.
언제 봐도 귀여울 수밖에 없는 모습이었다.
그때 해태의 강타자 홍현우가 그녀의 가슴에 못을 박아버리는 역전 솔로 홈런을
때렸고 서너 알인가 대여섯 알인가밖에 먹지 않았던 팝콘은 봉지째 땅바닥에 나
뒹굴게 되었다. 옆사람들 모두가 엘지의 열성 팬이었는지 자기들 발 밑에 그녀가
집어던진 팝콘이 너저분히 흩어져 있는 줄도 모른채, 그녀처럼 뭘 집어 던지거나
쌍소리로 투수를 욕하는 듯했다. 투수는 더 이상 다음 공을 던지지 못했고, 플레
이 오프 진출이 결정되는 경기인만큼 이광환 감독이 투수에게로 다가가고 있었
다. 언제나 썬글라스를 쓰고 있는 이광환 감독의 표정에는 별변화가 없었지만 평
소 때와는 달리 직접 투수의 공을 건네 받아 특급 소방수 김용수에게 볼을 건네
주었다. 언제 봐도 조용할 것 같고 어느 순간에도 생각에 잠겨 있는 듯한 이광환
감독의 느낌을 그녀는 나와는 조금 다른 시각으로 보는 듯했다.
왜 우리 나라 야구 감독들은 없어보이는 거야? 감독은 수입 안하나? 미국이나
일본은 감독부터 있어 보이잖아, 안 그래?
그녀는 언제나 내게 의견을 물어주었고, 생각해 보면 또 그런 것 같기도 해
그럴 때마다 맞장구를 쳐 주는 것을 나는 잊지 않았다.
특급 소방수 김용수는 연속으로 볼을 세 개 던지고 있었지만
제구력에 자신 있었는지 크게 흔들리고 있는
모습은 아니었다. 그녀는 왼손으로 왼쪽 이어폰을 빼고 오른손을 사용해 누누히
강조하는 오리지널 샤넬 백을 열어 담배를 입에 물었다.
필터가 밤색이었고 담배각이 자그마한 걸 보니 여성용으로
시판되어 호흥을 얻고 있는 콤팩트 담배인 것같았다.
21번 게이트, 앞에서 네 번째, 옆에서 옆에서 여덟 번째 파란 의자에 앉아 있던
짧은 머리를 위로 올려 넘긴 듯한 남자가 그녀의 밤색 필터에 불을 붙여 주었고
그녀는 귀여울 수밖에 없는 미소를 보이며 연기를 내뿜었다.
특급 소방수 김용수는 볼을 세 개나 연속으로 던진 후 안쪽으로 스트라이크를
하나 잡고, 구질을 알 수 없는 바깥쪽 볼로 평범한 내야 땅볼을 유도했다. 해태는
팔회초 솔로 홈런으로 경기를 동점에서 재역전시켰다.
다시 팔회말 엘지의 공격이 시작될 때 그녀는 들고 있던 게토레이 캔 안에 반을
넘게 핀 필터가 밤색인 콤팩트 담배를 쑤셔 넣었다. 내가 무심코 다 마신 와인
병에 꽁초를 쑤셔 넣거나 담배를 테이블 밑에 털면, 무식하게 왜 그래? 다른 사
람들이 쳐다보면 어쩔려고. 또 그 한 병 세척하는 데 돈이 얼마나 드는지 알기나
해? 쓸데없는 데서 돈 아끼지 말고, 애국한답시고 쳐! 이렇게 내 무식한 습관을
지적하던 그녀였는데 경기가 경기인 만큼 크게 흥분하고 있는 것이 틀림 없었다.
그 순간 21번 게이트, 앞에서 네 번째, 옆에서 여덟 번째 파란색 의자에 앉아 있
던 짧은 머리를 위로 올려 넘긴 듯한 남자가 오른쪽 귀에서 이어폰을 빼내고 뒷
주머니에서 자그마한 핸드폰을 이어폰을 빼내었던 오른쪽 귀에 갖다 대었다. 관
중들의 환성 때문에 잘 들리지 않았는지 자리에서 일어나 핸드폰에다 뭐라뭐라
이야기하며 21번 게이트 밖으로 나가고 있었다.
선두 타자 한대화가 투수 옆을 스치는 안타로 일루에 진출해 있었고, 엘지 관중
들은 모두 관중석에서 일어나 그녀처럼 깡충깡충 뛰며 열광하고 있었다.
다음 타자는 요즘 연속 안타 기록으로 주목을 끌고 있는 김동수였고
경기는 충분히 뒤집어질 수 있는 상황이었다
야구장 전체가 긴자 상태였고 앉아 있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그때 21번 게이트, 앞에서 네 번째, 옆에서 여덟 번째 파란색 의자에 앉아 있던
짧은 머리를 위로 올려 넘긴 듯한 남자가 이제 양쪽 다 이어폰을 끼고 있는 그녀
의 뒷목을 쓸어 안으며 귓가에 대고 무언가를 얘기하고 있었다.
김동수는 이번 타석에서 안타를 만들어 내면 연속 경기 안타기록과 팀을 플레이
오프에 진출시킬 수 있는 찬스를 한꺼번에 얻을 수 있는 것이다.
그 순간 너무나 어처구니없이 21번 게이트,
앞에서 네 번째, 옆에서 일곱 번째 파란색 의자에 앉아 있던
그녀가 21번 게이트, 앞에서 네 번째, 옆에서 여덟 번째 파란색 의자에
앉아 있던 짧은 머리를 위로 올려 넘긴 듯한
남자와 함께 자리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누누히 강조하는 오리지널 샤넬 백과 다정히 왼쪽 오른쪽에 끼고 있던
소니 워커맨과 신문 등을 챙기는 것으로 보아 화장실이나 구내 매점을
이용하려고 가는 것은 아닐 테고,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지금 타석에서는 김 동수가 어떻게든 안타를 만들어 보려고
투수와 신경전을 펴고 있고 엘지는 플레이 오프에 진출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는데, 평소에 좀처럼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는
이광환 감독이 투수 교체까지 손수 할 정도로 긴장되는 경기인데 그들은
도대체 무슨 일이 생겼길래 그렇게 저렇듯 아무런 망설임 없이 자리에서
일어날 수가 있을까?
내 생각으로는 21번 게이트, 앞에서 네 번째, 옆에서 여덟 번째 파란색 의자에
앉아 있던 짧은 머리를 위로 올려 넘긴 듯한 남자의 핸드폰에서 무슨 급한 연락
이 온 것 같다. 그렇지 않고서야 밥보다 야구가 좋다던, 겨울이 싫은 이유가 단지
야구 경기가 없기 때문이라던 그녀가 이런 중요한 경기를 포기하고 야구장을
떠날 일이 없었다.
작년 엘지가 종합 5위에 그쳤을 때 우승도 아무런 타이틀도 없었던 경기에서 뒤
쪽에 앉아 있던 어느 관중이 터뜨린 폭죽으로 내 머리가 다 타고 목덜미에 화상
을 입었을 때도 곧 끝나니 조금만 참아 보라던 그녀였는데, 상대팀이 어디였는지
기억은 나지 않지만 그 팀이 점수를 너무 많이 내는 바람에 경기가 지연이 돼 수
학 경시 대회에서 초등부 일등을 한 첫째 조카 녀석을 위해 형님 부부가 마련했
던 저녁 약속에도 참석을 못했었는데 도대체 저렇게 급히 야구장을 떠날 사건이
생긴 것일까? 그녀의 왼쪽 어깨를 감싸안은 21번 게이트,
앞에서 네 번째, 옆에서 여덟 번째 파란색 의자에 앉아 있던 짧은 머리를
위로 올려 넘긴 듯한 남자의 표정엔 덧니가 살짝 보이는 미소가 담겨 있고
그녀의 표정도 야구 경기에는 크게 미련이 없는 것으로
보아 그녀 신변상의 문제는 아닌 것 같아 마음이 놓인다.
이제 저 둘은 사무실 앞 카페 S에서 함께 타고 온 초록색으로 유리가 선탠이
된 흰색 소나타를 나고 핸드폰이 불렀던 곳으로 떠날 것이다.
들어올 때 보니까 뒤에 차들이 많이 주차되어 빠져 나가기가 싶지 않을 텐데.
요즈음 차량이 많이 늘어난 문제에 대해서
그녀는 매우 심각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짜증이야 정말! 난 주차금지 푯말만 보면 꼭 놀리는 것 같아 싫더라.
어디를 가도 온통 차니, 하긴 거긴 주차 걱정 없으니 속은 편하겠어!
아마 그때 김동수는 안타를 쳤을 것이다. 아니면 조계현이 삼진 처리했을 것이
다. 어떤 상황이 벌어졌는지 관중들은 크게 흥분하고 있었고, 옆에서 심한 전라도
사투리를 쓰던 사람이 3주나 넘게 청계천 시장을 돌아다녀 한달 봉급이 넘는 액
수를 지불하고도 2주나 넘게 기다려 구입할 수 있었던 내 저격용 망원렌즈를
한 마디 상의도 없이 빼앗아 갔다.
주위가 한층 더 시끄러워진 것으로 보아 두 팀 중 한 팀이 매우 좋은 플레이를
보였거나 어느 한 팀이 매우 저조한 플레이를 보였을 것이다.
심한 전라도 사투리를 쓰던 사람은
3주나 넘게 청계천 시장을 돌아다녀 한달 봉급이 넘는 액수를 지불하고도
2주나 넘게 기다려 구입할 수 있었던 내 저격용 망원렌즈를
돌려 주었을 때, 가져갈 때와는 전혀 다른 표정을 보이며 손에 묻었던
물기를 허벅지에 쓱쓱 밀었다.
뭔일이다냐! 시방 우는겨? 우리가 이겼당께! 이겼어!
다음 주에는 크리에티브 1팀장에게 부탁을 해야 할 것 같다. 아주 특별한 소품
이 필요한 광고 콘티를, 꼭 이 저격용 망원렌즈가 들어가는 콘티를 만들어 달라
고, 그러면 다음 주 내 생일날에 그녀는 다시 나를 만나자고 할 것이고 나는 단
하루만에 그녀에게 이 망원렌즈를 줄 수 있을지 모른다. 그때 나는 망원렌즈와
함께 구입한 공기총을 준비할 것이다.
청결한 그녀를 위해 깨끗이 손을 씻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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