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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벙어리 편지 2 |  | |
| 오늘도 눈을 뜨자마자 커피를 마셨고 담배를
태웠습니다. 당신이 직접 선곡해 녹음해 주신 (테이프 앞면에 좋은 글 많이 쓰라고
당신이 예쁜 글로 적어까지 주신) 음악을 듣고 있으면 이렇게 행복할 수 있나
싶습니다. 물론 당신께는 미안합니다. 눈을 뜨면 냉수를 한 잔 마시고, 빈 속에는
커피와 담배를 해서는 안된다고 매일 말씀하시는데, 당신이 걱정하시는 걸 알면
서도 눈을 뜨면 어느새 담배를 물고 커피를 따르고 있답니다. 하지만 이제 속도
많이 좋아졌고 잦던 헛구역질도 가끔씩만 괴롭힌답니다.
이게 다 당신 덕분이라 생각합니다. 한 사람이 내 몸을 위해 속상해 하는 것은
가슴이 미어질 정도로 행복한 일이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사과드려야 할 일이 한 가지 있는데, 왜 어느 해 겨울 함께 맞춰 입었던
앙고라 스웨터 기억하시지요. 당신은 진한 분홍, 나는 엷은 파란색. 당신은 제게
보라색이 어울리지만 보라색은 외롭다 하시며 엷은 파랑으로 골라 주셨지요.
그 소중한 스웨터가 글쎄 애기 조끼처럼 줄어들어지 뭡니까. 탈수를 시킨다는
것이 실수로 뜨거운 물을 틀어 세탁기에서 꺼내보니 그렇게 줄어들었답니다.
세탁소에 부탁해 봤지만 앙고라 특성상 원래의 크기로는 늘어나지 않는답니다.
어찌나 속상하던지 몇 날을 고민하다 그냥 벽에 걸어두었습니다.
그해 겨울 그 따뜻하고 포근했던 느낌을 그대로 전달받을 수는 없지만,
그 느낌이 그리워질 때마다
얼굴에 비벼도 보고 맨살에 안아도 보니 그런 대로 좀 나아졌습니다.
그러고 보니 내가 그동안 당신에게 조금 무성의했던 것 같습니다.
그렇게 소원하던 작업실을 가졌을 때, 내 정신 없고 조심성 없는 성격을
걱정하며 1년 동안 적어도 열쇠를 열두 번은 잃어버릴 거라 하더니,
이렇게 했는데도 설마 잃어버리겠냐며 만들어주신
은팔지 열쇠고리도 목욕을 할 때마저 내 몸에 붙어 있는데,
많이는 하루에 대여섯 번까지 당신의 얼굴을 못 떠올리곤 합니다.
또 한 가지 먼지 쌓인 장미 다발. 셀 수 없이 많은 장미송이로 상반신을 가리면
서 작업실에 들어선 사랑스런 모습. 비록 지금은 너무 말라 건드리기만 해도 바
스러지지만 한동안은 그 장미향에 취해 눈을 뜨곤 했는데 방안 가득 그 향기가
없어졌다고 당신의 향기를 깜빡 잊고 살았습니다(언젠가 한 번 먼지를 닦아내려
다 바스러져 포기하기는 했지만).
참으로 사랑하는 당신! 당신이 절 감동시킨 일 중 가장 귀여웠던 순간이 언제인
지 아십니까? 아닙니다. 당신이 살아계신 것만으로도 순간순간 감동 받으니 안아
주고 싶던 순간으로 정정하겠습니다.
밥을 먹을 때나 양치를 할 때, 잠을 잘 때를 제외하고는 언제나 담배를 입에 물
고 사는 절 걱정하시던 당신은 언제나, 그놈의 담배를 끊던지 날 끊던지 해. 하
며 이 세상 오직 당신만이 만들 수 있는 양미간을 찡그린 표정으로
투정하곤 했었지요. 그러면 저는 새 담배에 불을 붙이며 고개를 끄덕이곤 했습니다.
한동안 지치셨는지 어느날 많이 낡고 오래 돼 보이는 지포라이터를 건넸습니다.
즉석 사진인 듯한 반 명함판 크기의 사진 속에 그 특유의 양미간을 찌푸린 사진
을 투명한 유리 테이프에 붙여 평생 이런 인상으로 사는 거 보고 싶으면
할아버지께서 쓰시던 건데 잃어버리지 마. 하였습니다.
담배를 끊으라며 라이터 선물이라…….
당신은 그렇게도 참으로 사랑할 수밖에 없는 여인이었습니다.
엊그제 인세를 받아 관리비와 세금들을 지불하러 은행에 들렀습니다.
전화요금 고지서를 창구 안에 밀어 넣었는데 깔끔한 은행원 아가씨는
이번 달에도 한 통화도 안 거셨네요. 미소 지으며 얘기했습니다.
남의 일에 참 관심이 많은 아가씨라고 생각들었습니다.
아! 오해하지 마세요. 저는 언제나 미소 한 번 만들지 않고 영수증을 건네받을
뿐이니까. 이번 달이 당신 생일 달이기에 저금 대신 조금 큰 돈을 남겼습니다.
아직 말을 놓지 못했던 시절, 얼핏 얘기하신 그 디자이너 숍을 찾아갔습니다.
세상에, 그곳에는 마치 당신을 위해 디자인된 듯한 옷들이
온통 진열되어 있었습니다.
선물하실 건가요?
점원은 다가왔고, 저는 고개를 끄덕여 주었습니다.
애인 되실 분은 행복하시겠어요.
사이즈를 물은 다음 점원은 그렇게 말을 건네었고, 여자의 몸매는 애를 낳기
전 과 낳은 후가 눈에 띄게 달라진다는 얘기를 기억해 내고 저는 머뭇했습니다.
몸이 많이 불었으면 어쩌나 싶었는데 당신은 평소에도 몸매 관리를
잘하셨으니 크게 불어나진 않았을 거라 믿고, 예전 그 싸이즈를 써 주었습니다.
점원이 주차장까지 쇼핑백을 들어 주었고, 그 안에는 눈이 부실 정도로
아름다운 당신의 이브닝 드레스가 들어 있었습니다.
몰론 당신이 입고 계셔야 그렇겠지만 말입니다.
은팔찌를 차고 있는 왼손을 구부려 한 달 전처럼 작업실 문을 열었습니다.
이번 달에는 술을 좀 많이 사셨네요.
배달 소년은 라면과 술, 봉지 김치, 인스턴트 캔 등을 내려 놓으며, 죄송합니다.
부탁하신 아이리쉬 커피는 모레 가져다 드리겠습니다. 하며 돌아섰습니다.
당신께서 향이 좋다고 하셔서 그 커피 외에는 입에 대지도 않게 됐지요.
아! 물론 고맙다는 눈인사를 잊지 않았습니다.
이제 그런 예절쯤은 몸에 배어 있으니 걱정 않으셔도 됩니다.
참 볼수록 아름다운 드레스입니다. 작년에 사드렸던 잉크색 높은 굽 구두와
함께 놓으니 그렇게 어울릴 수가 없습니다.
집을 조금 늘려야 할까 봅니다. 당신이 입으실 옷들을 벽에 걸어두다 보니
조금 답답한 느낌이 듭니다. 내년에는 걸어둘 자리가 없을 것 같아서 말입니다.
조금 넉넉하게 띄엄띄엄 걸어놔야 보기도 좋을 것 같고. 그 동안 저축한 돈이
꽤 되니까 큰 무리는 없을 겁니다. 당신의 당부대로 저축을 습관화하니까
예전처럼 금전적으로 큰 불편은 없습니다.
제가 이렇게 정신이 없다니까요. 당신은 소주를 못하시는 걸 알면서 깜박 하고
내 술만 사왔지 뭡니까. 할 수 없이 오늘도 예전처럼 그냥 한 잔 받아만
놓으시고 보고만 계셔야겠습니다.
참, 그리고 모레 그 소년이 아이리쉬 커피를 가지고 오면 투명한 유리 테이프를
하나 가져다 달라고 부탁해야겠습니다. 소중하게 간직한다고 했는데도 5년 밖에
안 지났는데 벌써 금이 가다니. 당신이 언제나 부주의하다고 걱정하실 만합니다.
테이프가 거의 끝나갑니다. 이 곡만 끝나면 당신의 목소리를 들을 수가 있답니다.
들을수록 마음에 와닿는 곡들입니다. 마지막 곡이라 당신이 꽤 신경을 써 선곡
하신 것 같아요. 당신은 늘 시작부터 마지막을 준비하는 마음을 갖는다고 그러셨
잖아요. 들을 때마다 늘 가슴 한 곳에 날카로운 바람이 지나가긴 했지마는. 하긴
매일 아침에 듣고 있으니 모레 아침에 일어나 들어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투정부린다고 화장실을 안 갈 수는 없으니……, 참 이상도 하지.
왜 이 David Lanz의 Cristofori´s Dream 란 곡이 끝날 때쯤 되면
화장실이 가고 싶어지는지.좀 진득하니 끝까지 듣지 못하고 이 곡만 끝나면
당신의 사랑스런 음성을 들을 수 있는데. 하긴 매일 아침 들려 주시니
오늘도 부담 없이 화장실에 다녀오겠습니다.
빨리 다녀온다고 하는데도 와보면 테이프가 멈춰 있답니다.
금방 다녀와야 할 텐데.
「……미안해. 용서하지 말아요…….
어디 아프지 말고…….
아침에 눈을 뜨면 냉수부터 마시는 거 잊지 말고…….
빈 속에 커피, 담배 너무 하지 말아요.
……용서하지 말아요. 건강하고…….」
추 신 : 모레 아이리쉬 커피가 배달될 때까지 잠을 잘 생각입니다. 제 작업실 열
쇠를 잃어버리신 것 같아 경비원 할아버지께 맡겨 놓았으니 잠이 깊이 들어 제가
열어드리지 못하면 직접 열고 들어오세요.
경비원 할아버지가 잊고 계실지도 모르니까
5년 전 이맘 때쯤 3층 벙어리 총각이 부탁했을 거라 하면 기억하실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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