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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 역시 김영하 특유의 상상력과 환타지적인 구성이 잘 표현된 작품이지만, 상상력의 측면에서는 역시 장정일보다 한 수 아래임을 보인다. 그러나 장정일의 상상은-´외로운 사나이´의 성기가 점점 커져서 결국 지구를 파괴하고 어느 행성 전체와 섹스하는-어디까지가 허구지만, 김영하의 상상은 -자살 안내자라는 작중의 ´나´-소설의 치밀한 구성 속에서 보아 현실적인 상상임을 보여준다. 상상의 권한이 현실의 초월 내지는 그것으로부터의 이탈인지, 현실 속에 스며들어 현실의 진행에 개입해야함인지의 판단에 따라 두 작가의 평가가 엇갈릴 수 있을 듯. (적어도 두 작품의 상상력의 측면에서)



흔히들 도박을 인생에 비유하곤 하는데,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에서는 이를 아주 적절히 설명해주는 구절이 있다. 도박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진지함과, 자해와도 같은 쾌감을 즐기는 내게 너무도 절실히 와 닿아 옮긴다. (29면)




´이런 게 인생일까, K는 생각한다. 어차피 패는 처음에 정해지는 것이다. 내 인생의 패는 아마도 세 끗쯤 되는 별 볼 일 없는 것이었으리라. 세 끗이 광땡을 이길 가능성은 애당초 없다. 억세게 운이 좋아서 적당히 좋은 패를 가진 자들이 허세에 놀라 죽어주거나 아니면 두 이나 한 끗 짜리만 있는 판에 끼게 되거나 그 둘 중의 하나뿐이다. 그래봐야 그가 긁을 수 있는 판돈이란 푼돈에 불과하다. 어서어서 판이 끝나고 새로운 패를 받는 길. 그 길만이 유일한 희망이다. 그러나 세 끗이라도 좋다. 승부가 결판나는 순간까지 나는 즐길 것이다.´



김영하는 68년, 장정일은 62년 생이다. 비록 6년의 차이가 있긴 하지만 둘 다 80년대를 20대에 통과하는 만큼, 그 시대에 진 빚을 어떻게 청산하고 있는지 살펴보는 것도 재미있다.


장정일은 <너에게 나를 보낸다>에서 직접적으로 맑스적 근대주의에 관한, 소설이 아니라 사회과학 서적에 더욱 어울릴만한 내용의 글을 단장으로 할애한다. (단장 75, 149, 207의 군데군데) 그리고 ´주체사상선집´이란 부제의 ´불타는 침대´와 ´사회사상사´나 ´민중과학사´가 출판한 ´마르크스를 대신하여´, ´불멸의 역사´라는 제목의 도색소설을 보여주기도 하고, 87년도의 노동자 대투쟁에 갔던 ´바지 입은 여자´의 ´오만과 자비´가 백골단에게 쫓겨 숨어 들어간 화장실에서 섹스를 하는 따위의 장면을 보여주기도 한다. 장정일은 80년대를 가볍게 가로지른다. 80년대에 진 빚이란 애당초 존재하지도 않는다. 닭 잡아먹고 오리발을 내미는 것이 아니라 숫제 닭도 잡아먹지 않은 것이다. 장정일의 가벼움은 경찰서에 끌려가 ´원산 폭격´을 하는 ´바지 입은 여자´의 엉덩이를 찍은 사진이 퓰리쳐 상을 받으면서 전 세계에 알려지는 사건으로, ´바지 입은 여자´의 엉덩이와 남한의 민주화를 연관시켜버리는 것에서 숨김 없이 드러난다.


비록 ´은행원´이 ´수정궁´으로 상정한 거대 자본주의 관료제 사회에 대해 총을 쏘는 행위가 등장하기는 하지만 (단장 169-174) 이는 사회 법칙에 대한 믿음으로부터 나오는 저항이 아닌, 즉자적이고 소시민적인 저항일 뿐이다. 오히려 이것은 예술과 현실의 관계를 드러내기 위한 전주였음은, 결국 ´은행원´이 사창가 출입만이 수정궁이 허락하는 허용치 안에서 그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총질이었음을 피력한 후 들여오는 그의 웃음소리 ´하하하´로 명확해진다.


이는 장정일 후기에서 밝히는(293면) ´오만과 자비´ 가 운동권을 폄하하려는 의도는 아니었다고 밝히는 것과는 별개로, 그의 80년대 빚 청산 방식을 보여준다.


반면 김영하의 경우에는,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에서는 찾아보기 힘들지만 그의 다른 작품들에서 80년대를 관통한 그의 자의식을 엿볼 수 있다. (후에 나의 이러한 견해는 수정된다) 그 역시 80년대를 무겁지 않게 통과한다. 비록 장정일과 같이 거의 발도 땅에 닿지 않을 만큼 빨리 뛰는 것은 아니지만, 결코 진흙을 온 몸에 묻히고 무릎과 팔꿈치가 까지면서 낮은 포복으로 통과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신내림을 받아 작두 위를 걷는, 한 때는 시위 현장에서 ´베 가르기´라는 춤을 추던 무당(단편 <베를 가르다>)의 얘기에서 언뜻 내비치는 그의 의식은 <전태일과 쇼걸>에서 두드러진다.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과 ´쇼걸´이라는, 선명하게 상반되는 두 영화의 이미지를 대비함으로써, 비록 예전에 소위 운동권에 몸담았던 두 남녀가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을 상영하는 극장 앞에서 만났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왠지 힘이 업다. 두 남녀의 대학 시절, 2년간의 연애 기간 동안 단 한 차례의 섹스가 없었음을 씁쓸하게 상기하는 주인공은 왜 혁명과 금욕이 접 붙어야 하는지 의문을 던진다. 비록 ´80년대는 전혜린을 욕하는 시기가 아니었지만´, 90년대 말의 지금, 당시의 운동권은 <삼국지라는 이름의 천국>에서처럼 서로가 서로에 대해 불쾌한 채권자와 채무자로서, 간혹 있는 모임을 꺼리는 파편화된 개인으로 존재할 뿐이다. 80년대의 이념에 대한 문제 제기와 현실의 386세대의 모습을 다소의 야유와 애상이 뒤섞인 눈길로 바라봄으로써 김영하는 80년대가 요구하는 물음에 답하고 있다.



두 작가의 향후 인식의 변화를 살펴보는 것도 재미있을 터이나 그들에게는 이러한 주제 의식에서 머무르는 것 이상의 작가적 역량 발휘가 충분히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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