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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은 물건들의 신화 |  | |
| 현금지급기와 비닐봉지를 보고 상념에 빠진 적이 있는가?
샘 멘데스가 연출하고 케빈 스페이시가 열연했던 영화 ‘아메리칸 뷰티’에는 이상한 장면이 하나 등장한다. 캠코더로 사물을 찍으며 자신만의 공간에 침잠해 있던 리키가 여자 친구 제인에게 자신이 찍은 비디오를 보여주는 대목인데 화면 속에는 덩그라니 비닐봉지 하나만 등장한다. 붉은 벽 앞에 반투명의 비닐봉지 하나. 무지하게 썰렁하다. 가만히 있던 비닐봉지는 바람에 날리며 이리저리 움직이다가 하늘로 치솟아 올랐다가 다시 땅으로 내려앉는다. 처음에는 그저그런 비닐봉지로 보일 뿐이다. 그런데 한참 화면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비닐봉지가 무언가 말을 건네는 듯 느껴진다. 춤을 추는 것 같기도 하고 마임을 하는 것 같기도 하다. 비닐봉지의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속삭임처럼 들리기도 한다. 아무렇지도 않게 지나치던 일상의 물건들에서 새로운 아름다움을 느끼는 순간이었다. 그야말로 비닐이라는 문장으로 만들어낸 한 편의 시였다.
정신분석학자 세르주 티스롱의 「작은 물건들의 신화」를 보고 ‘아메리칸 뷰티’의 비닐봉지 댄스 장면을 떠올린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세르주 티스롱 역시 휴대폰, 현금지급기, 디지털 카메라, 리모콘, 비닐봉지 등 일상의 아주 작은 물건들에서 새로운 이미지를 발견해 낸다.
사실 이 책의 성격은 약간 모호하다. 철학서도 아니며 문학서도 아니고 문화비평서도 아닌 어정쩡한 위치에 놓여 있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책을 읽어나가다 보면 그런 장르구분이 필요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기도 한다. 뛰어난 통찰과 시적인 상상력으로 가득하기 때문에 그저 책을 따라가기만 하면 된다. 마치 비닐봉지의 스텝을 따라가며 춤을 추듯이 말이다. 예컨대, 현금지급기와 고해성사실을 연결시킨 이런 시적인 상상력을 보라.
“우리는 현금지급기가 놓여 있는, 한 사람 정도가 간신히 들어갈 수 있는 공간 속에 머리와 어깨를 밀어넣는다. 이것은 고해성사실의 경우, 다른 사람의 귀로부터 보호받고자 함이고, 현금지급기의 경우 다른 사람의 눈으로부터 보호받고자 함이지만, 행동 자체에 있어서는 서로 차이가 없다.…‘저는 제가 죄를 지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용서해주십시오. 다시 죄를 범할 수 있게끔 말입니다.’ 자동현금지급기 앞에서는 우리는, 스스로에겐 고백하지 못하지만, 다음과 같이 생각하고 있지 않은가? ‘저는 제가 돈을 썼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더 쓸 수 있게끔 돈을 좀 주십시오.’”(pp.39∼41)
고해성사실와 자동현금지급기를 연결시키며 현대인의 성향을 드러내는 이런 문장들 속에서도 재기발랄한 상상력이 가득하다. 슈퍼마켓에서 마음대로 집어갈 수 있는(요즘 대형할인매장같은 곳에서는 돈을 받고 팔지만) 비닐봉지에 대해서도 글쓴이는 새로운 의미와 이미지를 포획해 낸다.
“이것은 가볍고, 버릴 수 있으며, 심지어는 재활용까지 할 수 있는 일종의 현대판 장바구니이다. 그러나 비밀봉지는 장사꾼이 우리에게 제공하는 착한 사마리아인 만은 아니다. 그것은 일종의 다양한 영역에서 우리와 함께 한다. 그리고 많은 사람이 자기 집에 이 소중한 봉지 몇 개를 -많은 경우에는 비닐봉지 안에 담아서!- 가지고 있다. 어떤 사람들은 여행시 그들의 팬티, 혹은 더러운 양말 같은 것들을 따로 보관하기 위하여, 어떤 사람들은 간단한 도시락을 운반하기 위하여 그것들을 사용한다.”(p.58)
글쓴이는 비닐봉지와 이미지와의 연관관계 외에도 비닐봉지와 신체와의 관계, 비닐봉지와 음향과의 관계에까지 접근한다. 그러니 이 책은 비닐봉지의 사회학적 의미를 탐색하거나 정치적 함의를 캐물으려는 책은 아니다. ‘작은 것들에 숨겨진 일상의 의미’를 건져 올릴 뿐이다. 리모컨을 마법의 지팡이에 비유한다거나 디지털카메라를 ‘새로운 혁명’이라 규정짓는 것만 봐도 그렇다. 물론, 베네통의 광고전략을 분석하며 기업들이 이미지를 어떻게 조작하는지를 드러내기도 하지만 이 책은 사물을 분석하는 책이 아니라 비유하는 책이다. 책 제목 ‘작은 물건들의 신화’에서도 드러나듯 ‘작은 물건’들은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지만 우리의 무의식을 지배하고 있는 어떤 ‘이미지’이기 때문이다. (김중혁 vonnegut @libro.co.kr/리브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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