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joungul.co.kr 에서
제공하는 좋은글 입니다.
바쁜 일상 속에 잠시 쉬어가는 공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
|
|
|  | 오리선생 한호림의 꼬리에 꼬리를 무는 Sign 1 |  | |
| 간판도 예술이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요리, 꼬리에 꼬리를 무는 철학, 알기 쉬운 놀이 공작, 한문…10년 전 ‘꼬리에 꼬리를 문다’는 말을 유행시켰던 디자이너 한호림 씨가 다시「꼬리에 꼬리를 무는 sign」을 들고 나타났다. 5200개가 넘는 세계의 간판들이 책 하나에 모였으니 그야말로 ‘꼬리에 꼬리를 무는 책’의 결정판이라고 할 수 있다. 사진동호회 회원에겐 사진집으로, 간판쟁이에겐 멋진 디자인북으로, 나 같은 사람에겐 독특한 여행서처럼 읽히는 매직아이.
꼬리에 꼬리를 문다는 말은 일직선으로 길게 늘어서 있다는 걸 뜻 하는 건 아니다. 어디로든 뻗어나갈 수 있는 샛길이 많아서 골목들이 거미줄처럼 엉겨 있다는 걸 의미하기도 한다. 호기심이 풍부한 사람이라면 이 책을 보는 데 1년이 걸릴지도 모를 일이다. 괴상한 간판, 판독 불가의 벽화, 다양한 메뉴보드, 용도를 알 수 없는 가게들이 서로의 꼬리를 잡겠다고 날뛰는 발랄한 몽타주는 빡빡한 활자보다 당신의 상상력을 훨씬 더 자극할테니까. 하긴, 저자가 이 책을 만드는 데 걸린 시간은 20년이라고 한다.
“우리는 외국 sign의 경우, 그저 책에서 형태만 보고 ‘디자인이 좋다, 나쁘다, 세련되었다, 유치하다, 화려하다, 후지다’하는 정도로만 보고 지나치는 수가 많습니다. 그러나 sign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중략)…예컨대 서양의 sign이나 조형물 중에서는 올빼미를 종종 볼 수 있습니다. 토론토 북구 노스욕의 도서관 심벌도 올빼미지요. 올빼미는 다른 동물과 달리 그 정면으로 난 두 눈과 뺨의 털이 지혜있는 노인과 같이 생겼다 하여 지혜의 상징으로 여겨졌고 그래서 학문과 지혜의 여신 아테나에게 바쳐졌습니다. 그러다 보니 그리스 동전에 올빼미를 새겨넣게 되었고 그걸 보고 ‘선진국의 디자인이다’ 하여 지중해를 둘러싼 여러 나라들이 유행으로 올빼미 동전을 주조했어요.”(P.10)
책을 만들기 위해 다니지 않은 곳이 없다. 술집, 관공서, 레스토랑, 구둣가게, 박물관…이 책이 여행서로 읽히는 이유도 바로 저자의 잰 발걸음에 있다. 사진을 보다 보면 어느새 그의 스텝이 느껴진다. 알레그로, 모데라토, 안단테, 스타카토, 모데라토 칸타빌레…. 바야흐로 사진이 춤을 추는 이 지점에선 여행자의 발걸음과 책을 읽는 독자의 발걸음이 행복하게 접속한다. 사진을 풀이하는 저자의 짤막한 코멘트도 책 읽는 톡톡한 재미. 치즈 베이글로 비유하면 짤막한 ‘팁’들은 작은 나이프 위에 바른 신선한 크림치즈 같다. 부족하다 싶으면 언제든 듬뿍 발라먹을 수 있는 부재료 말이다.
“이민은 우주의 생리다. 좀더 널리, 멀리, 뿌리내리고자 하는 생명현상”. 미국의 중국인 거리를 묘사하며 쓴 이런 짤막한 인상기는 꽃가루 날리는 5월과 맞물려 재미있는 생태학적 상상들을 불러온다. 가령, 납작한 세계지도가 꽃씨를 받아 임신하고, 풍선처럼 부풀어 푸른 지구가 되는 상상. 사람들이 와글거리며 어디론가 이동한다. 피가 섞이고, 문화가 섞이고, 다양한 호르몬 칵테일이 지구를 더욱 다양하고 복잡한 무엇으로 만든다. 이민을 정치적, 경제학적으로 해석하지 않고 생물학적으로 묘사한 코멘트들은 사진에 근사한 생동감을 부여한다.
책장을 넘기다 잠시 서울의 사인들을 생각했다. 너무 비슷해서 런닝머쉰 위를 반복해서 달리는 것 같은 사인. 꼬리에 꼬리를 물며 복사기를 돌린 것 같은 거리다. 책장을 덮고 난 후 느낀 가장 큰 아쉬움은 이 책의 편집 방식이라던가, 깊이 혹은 연동성에 관한 것이 아니라, 내가 사는 도시에 대한 약간 우울한 감상이었다. (백영옥 rararal93@libro.co.kr/리브로)
by www.libro.co.kr |
|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