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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사같은 아이.....이금희
새벽 출근길이면 벌써 선뜻한 기운이 느껴진다. 이제 곧 찬물로 세수하기 싫을 떄가 올 것이다. 이런 즈음이면 예전에 만났던 그 아이가 떠오른다.

시청자들의 힘으로 어려운 이웃을 도와주는 프로그램 ´사랑의 리퀘스트´에서 소개했던 열 다섯 살 소년. 뺑소니 교통사고로 아버지는 전신마비가 됐고, 병간호에 지친 어머니는 집을 나갔다고 했다. 어린 나이에 가장이 된 아이는 한마디 불평 없이 한겨울에도 찬물로 밥 짓고 빨래하고 아버지 대소변까지 받아냈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아이의 얼굴엔 불행이나 절망의 그늘이 없었다. 부드럽고 편안한 모습이 평온해 보이기까지 했다. 힘들지 않느냐는 질문에 아이는 말했다. ˝괜찮습니다. 남들 보기엔 어떨지 몰라도 아버지가 옆에 계시는 것만으로도 행복합니다.˝

그러던 아이가 방송에 소개된 후 상처를 입고 말았다. 도와주고 싶다면서 찾아온 낯선 아저씨가 사나흘 함께 지내며 이들 부자의 마음을 풀어놓은 후, 시청자 후원금에서 나온 한 달치 생활비와 선물로 받은 손목시계를 들고 도망 가버린 것이다.

천사 같은 아이 앞에서 어른이라는 사실조차 부끄럽게 여겨져 ˝어떡하니, 속 상하지? 그 아저씨 밉지 않아?˝ 묻는 내게 아이는 이런다. ˝할 수 없지요. 근데...시계라도 두고 가면 좋았을 텐데요...˝

누구나 제 등에 짊어진 짐은 유난히 무겁게 느껴진다. 어떻게든 내려놓고 못 본 체하고 싶기도 하고, 누구에게든 원망의 화살을 날리고 싶기도 하다. 그러나 이렇게 나이보다 어른스럽게 제 짐을 감당하는 아이도 있다.

다가오는 계절의 찬바람이 남보다 훨씬 더 세차게 느껴져 마음 시리고 가슴 휑한 분들도 많을 것이다. 모두에게 이 계절이 무사히 지나가기 바란다. (아나운서)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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