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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산해관 잠긴 문을 한 손으로 밀치도다 |  | |
| 홍대용, 18세기 베이징 거리에서 이 세계를 이해하다
북학론이란 18세기 청나라를 정벌하자는 숭명유림(崇明儒林)들의 북벌론에 맞서 청조의 문물을 가려 배우고 흡수하자는 이용후생의 관점에서 제기된 주장이다. 17세기 이래 조선 사회에서 제기된 실학 사상은 성호 이익, 연암 박지원, 완당 김정희 등으로 대표되는 세 갈래 길로 나뉜다.
담헌 홍대용이라면 박지원으로 대표되는 이용후생학파 중에서 가장 선구적으로 북학사상에 접근한 사람이다. 왜 선구적이냐 하면 박지원이 쓴 〈회우록서(會友錄序)〉 중 “홍군 덕보가 일찍이 어느 날 한 필의 말을 타고 사신을 따라 중국에 갔다가, 시가(市街) 사이에서 방황하고 서민 속에서 맴돌다가 항주의 유학하는 선비 세 사람을 만나게 되었다”라는 문장의 ‘일찍이’라는 표현에서 알 수 있다. 홍대용이 지금의 베이징을 뜻하는 오랑캐의 수도 연경행에 나선 것은 1765년의 일이다. 이는 북학파 중에서 가장 이른 시기였다. 이번에 출간된 홍대용의 베이징 여행기 「산해관 잠긴 문을 한 손으로 밀치도다」(김태준·박성순 옮김, 돌베개)는 바로 이런 사정에서 그 의미가 남다르다.
이 책은 이런 사상사적 의미 외에도 서지학적 의미를 여럿 담고 있다. 「산해관 잠긴 문을 한 손으로 밀치도다」가 저본으로 삼은 책은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소장 한글본 「을병연행록」으로 그 분량만 장장 20권 20책에 이른다. 이처럼 방대한 분량은 좀체 찾아보기 힘들다. 한편 홍대용은 집안의 부녀자들을 위한 한글본 외에 한문본 「담헌연기(湛軒燕記)」를 남기기도 했는데, 책을 엮은 동국대학교 국문학과 김태준 교수는 “전체적으로 보아 한문본이 두 나라 선비들의 교우를 중심으로 한 학술적 보고서라면, 한글본은 문학적 일기라고 할 수 있다”고 밝혔다.
노론학파의 중심 인물이었던 김원행에게 주자학을 배웠으나 여러 번 과거에 실패한 바 있는 홍대용이 서장관으로 청나라에 가는 숙부를 따라 자제군관(子弟軍官)으로 연행길에 나선 것은 그의 나이 서른 다섯의 일이었다. 책의 서두에 나와 있다시피 당시의 중국에 대한 조선 지도층의 인식은 “오랑캐의 땅은 군자가 밟을 바가 아니요, 호복을 한 인물과는 함께 말을 못하리라”고 할 정도였다. 그럼에도 홍대용이 연행길에 따라나선 까닭은 “문물이 비록 변했다고 해도 산천은 의구하고, 의관이 비록 변하나 인물은 고금에 다름이 없으니, 어찌 한번 몸을 일으켜 천하가 큼을 보고 천하 선비를 만나 천하 일을 의논할 뜻이 없겠는가”라는 말에서 찾을 수 있다.
하지만 홍대용이 생각했던 것보다 중국은 더 컸다. 이는 베이징의 서점가 유리창과 천주당을 방문한 사건으로 대표된다. 유리창을 둘러본 홍대용은 책에서 “대개 이곳의 푸자가 천 개에 가까운데, 이런 부류의 기물을 벌인 곳이 열에 칠팔이 넘을 것이다”라고 밝혔다. 베이징 상점가에서의 충격을 다룬 이 부분은 뒤에 사농공상을 막론하고 생산 활동을 해야한다는 홍대용의 ‘국민개로(國民皆勞)’론을 떠올리게 한다. 또한 남천주당에서 할러스타인과 고가이슬 등 두 명의 서양 신부를 만난 홍대용은 천주교의 교리와 천문학에 대한 대화를 나눈다.
이 연행길에서 가장 중요한 대목은 엄성, 육비, 반정균 등 항주에서 과거를 보기 위해 올라와 베이징에 머물던 세 명의 중국 선비들과 만난 일일 것이다. 이 책에서 상당 부분을 차지하는 이 대목은 당시 동아시아인들의 세계 인식을 보여주는 진귀한 기록이 아닐 수 없다.
「산해관 잠긴 문을 한 손으로 밀치도다」는 북학파의 연원이 어디인지, 세계사의 흐름에서 북학파와 베이징의 지리적 관계는 어떠했는지 보여주는 대단히 상세한 자료가 아닐 수 없다. 이 책을 두고 불교와 도교에 두루 관심이 많은 중국 선비들에게 유학만을 강조하는 완고하고 좁은 식견을 보였다고 홍대용을 폄하하는 기사도 있었지만 이는 전적으로 당대의 시선으로 홍대용을 바라보지 못한 결과다. 이 중국 여행기의 직접적인 결과물인 「임화경륜」과 「의산문답」이 한 권으로 묶여 출간된 바 있으니 이를 읽으면 그가 이 여행에서 얼마나 많은 것을 배워왔는지, 또 얼마나 열린 자세로 연경을 바라봤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한편 이 책에서는 몇 부분이 생략됐는데, 빠진 부분은 지난 1997년 태학사에서 출간된 숭실대학교 본 「주해 을병연행록」에 담겼다.(김연수 larvatus@libro.co.kr/ 리브로)
by 리브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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