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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열정 |  | |
| 더 오래 살아남는 것은 곧 배반인가
헝가리 문학의 거장 산도르 마라이의 이 작품을 독자들에게 권하기란 사뭇 조심스런 일이다. 느릿느릿 더디게 흐르는 문장, 단어와 단어 사이 곳곳에 숨어있는 저자의 암시, 인생을 향해 던지는 근원적이며 묵직한 메시지… 결국 성마른 독자라면 ‘잘 안 읽히는 책’이라는 낙인과 함께 이 책을 저만치 던져둘 것이 분명할 것.
사건은 단순하다. 헨릭과 콘라드라는 두 친구가 있었고, 어린 시절 사관학교에서 처음 만난 두 사람은 만나던 첫 순간부터 ‘자궁 속의 일란성 쌍둥이’(p.46)처럼 붙어 지낸다. 군위장교의 아들인 헨릭과 가난한 농가출신 콘라드의 우정은 부유함과 가난함이라는 현실적 제약에도 불구하고 어른이 되도록 더욱 깊어만 간다. 그러나 이러한 우정과 신뢰는 콘라드가 헨릭의 부인 크리스티나에 대한 연정을 품으면서부터, 욕망을 주체할 수 없어 헨릭의 등에 총을 겨누면서부터, 그리고 그로 인한 죄책감을 가누지 못해 바로 그날 밤 여자도, 친구도 버리고 세상의 다른 끝, 열대로 떠나면서부터 뿌리째 흔들린다. 헨릭은 배신감과 절망에 휩쓸려 아내와의 대화를 일체 거부한 채 고독으로 칩거하고, 사랑하는 사람의 예고 없는 배신, 남편의 냉담한 침묵 속에서 괴로워하던 크리스티나는 결국 사건이 있은 지 8년 만에 누구도 지켜보지 않는 가운데 죽음을 택하게 되었다.
피보다 더 진한 우정을 나눈 두 친구 사이의 사랑과 배신. 그러나 산도르 마라이는 세 사람 사이에 벌어진 이 사건에 대해서는 정작 10페이지 남짓 밖에는 할애하지 않는다. 저자가 방점을 찍는 것은 바로 지금, 41년 만에 콘라드가 열대로부터 숲속에 웅크린 헨릭의 저택을 찾아온 날 밤부터 동이 트기까지 불과 몇 시간. 실재로 이 소설 전체 분량의 8할 이상을 차지하는 두 사람의 대화 속에는 누가 누구를 사랑하였는가, 그 사랑이 사실이었는가, 왜 그렇게 하였는가라는 물음에서부터 헨릭은 무엇 때문에 아내가 죽고, 절친한 친구마저 떠난 숲속의 성을 혼자 지켜왔는가, 무엇을 기다리는가, 우리 사이에 벌어진 현상은 무엇이고, 그 속에 감추어진 진실이란 무엇인가… 라는 등의 형이상학적 물음들이 담겨 있다.
저자는 과연 인간 관계에 있어서의 본질은 무엇인가, 사욕도 사심도 없는 관계는 어떻게 형성되는가 따위의 물음을 독자에게 끈덕지게 던지며, 바로 여기에서 카프카, 토마스만, 로베르트 무질과 나란히 서 있기에 손색이 없다는 헝가리의 대문호 산도르 마라이의 문장력과 사색은 빛을 발한다. 그리고, 그가 마지막으로 헨릭의 독백을 빌어 던지는 물음, “궁극적으로 배반당한 사람은 과연 누구인가, 친구의 아내를 사랑한 사실이 두려워 열대로부랴부랴 열대로 떠나간 콘라드인가, 남편을 두고 다른 사람을 사랑한 크리스티나인가, 죽어가는 아내를 끝내 외면한 채 혼자서 칩거한 헨릭인가?” 은 이 소설 열정의 절정을 이루며 이쯤해서 독자는 움찔하며, 사랑과 우정 배신이 엇갈린 소설 속으로 종횡무진 질주하게 된다. 그래, 과연 우리는 누구의 편을 들어주어야 하는가.
“자네는 떠나고 나는 여기 머무르고, 우리는 그렇게 살아 남았네. 비겁했는지 맹목적이었는지, 아니면 자존심이 상했는지 현명했는지 모르지만, 어쨌든 우리 두 사람은 살아남았어. 우리 두 사람은 그녀에게서 달아났으며, 살아남는 것으로 그녀를 배반했지. 이것은 진실이네. “(p.270)
살아남는 것은 곧 배반이며, 죽은 자만이 진실을 말할 수 있다는 것을 이유로 산도르 마라이는 죽은 크리스티나의 손을 들어주지만, 그러나 우리는 알고 있다. 제3의 인물이 아닌 친구 콘라드의 입을 통해 진실을 듣기 위해 진실을 알기 위하여 41년 동안 그를 기다린 헨릭과 역시 끊을 수 없는 우정을 확인하기 위하여 지구 반대편에서 초라하게 늙은 얼굴로 친구를 찾아온 콘라드. 둘 중 누구도 진실이 아니거나 사랑이 아닌 자 없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추신> 문학은 곧 현실의 반영이라든가, 작가가 곧 작품이라든가 하는 환원주의를 지지하는 것은 결코 아니지만, 아무튼 이 작품을 읽는 내내 ‘어디로 떠밀려 가든지 나는 헝가리 작가로 남아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던 산도르 마라이의 얼굴이 뇌리에서 떠나지 않았다고 고백하고 싶다. 모국을 향한 굳은 신념 내지는 고집 따위가 이 작품 속에 고스란히 문학 언어로 형상화되어 있다는 말이다. 존재와 정신의 자유를 지키고 불의와 폭력에 동조하지 않기 위해, 1948년 ‘조건 없이, 흥정 없이, 귀향에의 희망 없이’ 조국을 떠난 산도르 마라이는 41년이라는 긴 망명 생활 후 1989년 2월, 89세의 나이로 망명지 캘리포니아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그의 망명세월 41년은, 우연찮게도 헨릭과 콘라드가 떨어져 지낸 세월과 일치한다. (이현희 imago@libro.co.kr/리브로)
by 리브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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