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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키재기 |  | |
| 울고 싶어라, 꽃이 지는 아침은
시간은 대부분 손가락 사이로 스르르 빠져 나가지만 그래도 가끔 이쯤해서 내 인생의 또 한 부분이 매듭지어지는구나 하는 것을 온몸으로 느낄 때가 있다. 그렇게 직감하는 순간 무심히 사라져가던 시간은 빛의 밝기와 그것이 만들어내는 색깔, 맡아지는 냄새, 심지어 부유하는 먼지 하나 하나까지도 뚜렷하게 각인시킨다. 그리고 방부제를 뿌리듯, 극심한 통증이라기보다 스멀거리는 가려움에 가깝고 그래서 더욱 견딜 수 없는 이상야릇한 슬픔을 덧입힘으로써 그 순간을 완성한다.
˝그러던 어느 서리 내린 아침. 수선화의 조화를 격자문 밖에서 안으로 넣어 둔 이가 있었다. 누가 한 일인지 알 수는 없지만, 미도리는 까닭 없이 그리운 생각이 들어서 선반 위에 있는 작은 꽃병에 꽂아두고는 그 외롭고 깨끗한 모습을 바라보며 아꼈다. 그런데 어디선가 구름처럼 전해진 얘기로는, 그날 아침이 신뇨가 다른 학교에 가서 스님이 되는 수행을 시작한 바로 그날이었다고 한다.˝ (p.93)
일본 근대 초기의 여성 소설가 히구치 이치요는 「키재기」에서 어른이 되기 직전에 있는 소년 소녀의 아름다운 한 때를 이렇게 마무리 짓는다. 「키재기」는 히구치 이치요가 스물 다섯 살의 나이로 요절하기 전해에 쓴 그녀의 대표작이다. 일본 유곽 마을을 배경으로 10대 소년 소녀들의 일상을 섬세하고도 깔끔하게 담아낸 이 작품엔 근대 일본의 생활상이 생생하게 담겨 있다. 대부분의 마을 사람들이 유곽에서 일하는 유곽 마을의 풍경, ´닭날´ 이라고 불리는 날에 행해지는 풍습, 일본 고유의 다양한 의상과 신발, 머리 모양 등이 묘사된다.
책의 뒷부분에 상세한 주석이 덧붙여져 일본의 생활상을 어렵지 않게 따라갈 수 있지만 굳이 뒷부분의 주석을 들추지 않아도 재미있게 읽힌다. 그 재미는 화끈한 성격의 예쁜 미도리, 반듯하고 조숙한 신뇨, 붙임성 있고 귀여운 쇼타로 등 10대 등장인물들의 매력과 그들이 만들어내는 미묘한 관계에서 비롯된다. 그들은 유곽 마을이라는 불우한 환경과는 상관없이 어떻게하면 축제를 재미있게 즐길 수 있을까라고 고민하는 아이들이다.
그러나 즐거웠던 축제는 조키치와 그 무리들이 행패를 부리면서 순식간에 깨져버린다. 특히 마을 제일의 유녀인 언니를 자랑스러워하던 미도리는 욕설과 함께 얼굴에 흙 묻은 신발을 맞고 큰 충격을 받는다. 이때부터 비애를 모르고 천진난만하기만 하던 이들의 축제 같은 세계에 금이 가기 시작한다. 이 밖에도 용화사라는 절의 주지 스님 아들인 신뇨는 스님이면서도 세속적 욕심이 지나친 아버지 때문에 괴로워하고, 동네 최고 재산가로 통하는 할머니와 단둘이 사는 쇼타로 역시 자신 때문에 더욱 악착같이 구두쇠가 되가는 할머니를 보는 것이 괴롭다. 또 서투름과 오해로 미도리와 신뇨, 쇼타로의 관계 역시 자꾸 엇갈리기만 한다.
이 소설을 읽으면서 지켜 봐야 하는 것은 순수하고 찬란했던 시절에서 점점 멀어져가는 인물들의 ´성장´이다. 초경을 맞아 아무리 싫어도 어른이 되어야함을 깨닫게 되는 미도리에게 있어서 해마다 다시 돌아오는 축제는 더 이상 예전의 마냥 흥겹기만한 축제가 아니다. 소설 중간 중간 글쓴이가 암시한 대로 유녀의 화려한 생활을 자연스럽게 보고 자랐고 ´3년 후의 모습이 기대´될 정도로 예뻤던 미도리는 어쩌면 3년 뒤 마을 제일의 유녀가 될지도 모른다. 할머니 대신 일수돈을 받으러 다니면서 마음이 약해 울기도 했던 쇼타로 역시 마찬가지다.
《키재기》는 황순원의 ´소나기´를 연상시키기도 하지만 조지훈의 시 ´낙화´를 연상시킨다. 성장하기 직전에 떨어져서 사라져가는 영원히 닿을 수 없는 첫사랑과 유년시절의 아름다움에 대한 애상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혹시 그날 그 순간을 기억하는가? 항상 보아오던 것들이 여전히 그대로 놓여있지만 이후로는 그것들이 같아도 같지 않음을 확신하며 마지막인듯 각별하고 이유없이 슬퍼지던, 아주 사소한 일이 일어났던 그날 그 순간. 「키재기」는 책에 끼워 말린 떨어진 꽃처럼 우리가 작별해야 했던 수많은 순간 순간을 선명하게 떠오르게 한다. (윤정윤 phyllis@libro.co.kr/리브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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