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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열두첩 수라상으로 차린 세월 |  | |
| 궁중음식 대중화의 길
이 책은 선생이 예전에 잡지에 연재했던 원고들과 일기들을 토대로 세명의 딸들이 함께 만들었다. 선생의 세 딸인 한복려, 한복선, 한복진씨는 각각 궁중음식 기능보유자 후보, 한복선 요리학원장, 전주대학 교수로서 모두 이름난 요리연구가이다.
출간을 준비하는 데는 불과 3개월이 걸렸지만, 오래 전의 원고를 토대로 한 만큼 몇십년 동안이나 쓰여진 책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인지 글의 깊이나 웅숭스러움에 있어 여느 자서전과 비교할 수가 없다. 또한 이 책은 한국판 ‘여자의 일생’으로 읽어도 좋을 만큼 소설적인 재미까지 갖추고 있다. 어릴 때는 공주마마같이 지내다, 20대 초반에 부모를 한꺼번에 잃고 처녀가장으로 교수생활을 하던 이야기, 결혼 후 전쟁이 나자 피난 가다 딸을 잃어버린 이야기, 어린 두 딸을 남의 자전거에 태워 보내고 그 뒤를 내내 달려서 따라간 얘기, 고된 시집살이 이야기, 궁중음식을 연구하는 동안 알게 된 궁중 사람들 이야기, 스승을 기어이 무형문화재로 만드는 데 성공한 이야기 등, 인간의 창작을 뛰어넘는 기막힌 인생 이야기들이 펼쳐진다.
충남 천안에서 5천석지기의 딸로 태어난 선생은 어린 시절 아무나 누릴 수 없는 부유한 생활을 체험하며 호사스럽게 자랐다. 시집온 후 10년 동안이나 태기가 없어 심려가 많았던 어머니가 외할머니와 함께 백일 기도를 드려 얻은 귀한 자식인데다 열살이 되도록 아래로 동생이 없었으니 오죽 사랑받았겠는가.
일본 교토여자전문학교 유학시절에는 학교에서 돌아오는 길에 백화점 쇼윈도에 맘에 드는 원피스가 걸려 있는 걸 보면 어머니에게 돈을 부쳐달라고 전보를 쳤다. 한달 하숙비가 18원, 20원 하던 시절, 그녀가 어머니에게 요구한 원피스값은 50원이었다.
누구에게나 운명처럼 찾아온다는 만남. 이러한 인생 최고의 만남은 선생이 숙명여전 교수가 된 직후에 찾아왔다. 숙명여전의 교장선생이었던 오다 쇼고씨가 선생으로 하여금 창덕궁에 가서 조선요리를 배우라고 제안한 것이다. 이렇게 해서 선생은 창덕궁의 낙선재 주방에서 한희순 상궁을 만나게 된다.
‘처음 한 상궁을 뵈었을 때는 얼굴 모습이 어떤지, 키가 큰지 작은지, 마음씨가 너그러운지, 내가 잘 배울 수 있을 것인지 전혀 알 수가 없었다. 항상 그림자처럼 한 발짝 뒤에 물러서서 음식 재료를 다듬고 만드는 전 과정을 조용히 공책에 적어야 했다. 질문을 해서도 안되었고 나도 좀 거들겠다는 청도 할 수 없었다.’(p148)
선생은 한상궁에게 궁중음식을 배우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학문적 기초를 만들고 기록을 남기는 일을 시작했다. 한 사람 마마를 위해 만드는 수라상 음식을 네 사람 분으로, 여섯 사람 분으로 계량화하는 일에는 수없이 많은 실패가 따랐다. 책을 쓸 때에도 궁정요리의 어상에서부터 수라상 등 종류와 식단을 비롯해 2백가지가 넘는 음식 만드는 방법을 현대식으로 개량해서 정리했다. 되와 홉, 말을 킬로그램과 큰술, 작은술로 바꾸는 일은 전혀 선례가 없던 일이라 어렵기만 했다. 일일이 저울을 두고 달아 보면서 만들어야 했으니 마음은 급하나 일은 더디기만 했다. 좀더 자세한 문헌을 찾아보기 위해 창경궁의 규장각을 드나들기 시작했다. 선생은 규장각의 먼지 낀 두루마리를 뒤지면서 하나씩 찬품 단자를 발견했을 때의 기쁨을 ‘세월을 거슬러 임금님과 함께 진수성찬의 잔칫상을 마주하고 앉은 기분’이라 표현했다.
구중궁궐 담 안에서 왕조의 쇠퇴와 함께 사라져갈 위기에 처해있던 궁중음식은 황혜성이라는 집념의 인물에 의해 현대화되고 개량화된 것이다.
팔십 고령이 되어 눈에 진물이 나고 손이 떨려 칼질을 하지 못하게 되었을 때까지 한 무릎을 세우고 앉아 궁중음식 요리법을 전수해준 스승 한희순 상궁과, 한결 같은 마음으로 평생 학습과 연구를 중단하지 않았던 제자 황혜성씨의 이야기가 너무나 감동적이다.
험난한 시기를 견뎌온 한 여자의 역사로서, 우리 전통문화의 위대한 개척자이자 인간문화재의 이야기로서 손색이 없는 책이다.
by 리브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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