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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잃어버린 나를 찾아서 (송재찬) |  | |
| 그 집을 나서는 아저씨의 몸이 잠깐 휘청했습니다. 손으로 해를 가렸는데도 눈이 부셨습니다. 10년만에 보는 햇빛입니다. 아저씨는 저 ´깊고 단단한 집´에 10년을 갇혀 지냈습니다.
아저씨는 이제 늙었습니다. 10년이라고 했지만 그 전에도 10년, 그리고 또 그 전에도 5년의 세월을 그 집에서 썩혔습니다. 아저씨라 하기에는 너무 늙었습니다. 그냥 할아버지라고 해야겠어요.
햇빛 속으로 나왔지만 할아버지는 막상 갈곳이 없었습니다.
막막했습니다. 가족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동안 아무 도움도 주지 못했는데. 아내 혼자 아이들을...... 이제 와서 늙은 짐이 될 수는 없어. 가선 안돼. 내가 가도 모르기는 할거야. 세상을 속이기 위해 얼굴까지 바꾸었으니깐. 그것도 두번이나.´
그 때였습니다.
막막한 눈으로 가을이 오는 길을 보고 있는데 누군가가 자신을 지켜보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누굴까? 나처럼 감옥에서 나온 사람인가?´
이렇게 생각하자 웬지 친밀감이 느껴졌습니다.
이상하게 그의 눈빛만 느껴졌습니다. 할아버지는 그를 향해 걸었습니다. 그도 할아버지를 향해 걸어왔습니다. 할아버지는 문득 자신의 눈이 아주 나빠진 것 같다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그러고 보니 세상 모든 것들이 아주 뿌옇게 보였습니다. 눈이 나빠질 때도 되었지, 이런 생각을 하며 할아버지는 입을 열었습니다.
˝누구신지.......˝
자신이 없는 소리입니다. 모든 일에 자신이 넘쳤던 할아버지였습니다.
그가 뭐라고 하는 것 같은 데 그 소리가 들리지 않았습니다.
어디로 갈거냐고, 그가 묻는 것 같아 할아버지는 혼자 말했습니다.
˝이제는 어디서 곱게 눈을 감고 싶어요. 그동안 세상에 해를 끼쳤으 니 그저 조용히 흙이 되고 싶어요. 어디로 가는 길입니까?˝
그가 다시 뭐라고 하는 것 같은데 그 소리가 들리지 않았습니다. 할아버지는 자신이 너무 늙어 귀에도 이상이 왔다고 생각했습니다.
이상했습니다. 조금 전 깊고 단단한 집에서 나올 때만 해도 막막했었는데 마음이 편안했습니다. 할아버지는 함께 걷는 이 사람 때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함께 감옥소 생활을 했으니 이 사람도 내 마음을 이해해 줄거야.´
할아버지는 자기 마음대로 생각하며 마음의 위안을 받았습니다. 마음이 든든했습니다.
두 사람은 말없이 걸었습니다. 말없이 버스를 타고 말없이 기차를 탔습니다.
할아버지는 알 수 없었습니다. 그를 따라 이 바닷가까지 왔는지, 할아버지를 따라 그가 왔는지. 어쨌든 할아버지는 그가 고마웠습니다.
˝......댁도 나처럼 그 집에서 나온거, 맞지요? 나처럼 갈곳이 없는거 요? 사실은......내 집은 저기 저 집이오. 그러나 이런 몸으로는 갈 수 가 없다오.˝
두 사람은 아직도 여름의 열기가 남아있는 바닷물에 발을 담그었습니다.
˝나는 어렸을 때, 이 바닷가에서 살다시피 했다오. 그리고 지금은 저 집에서 할망구가 되어 집을 지키고 있을 내 아내를 이 바닷가에서 처음 보았다오. 깨끗한 물처럼 투명하고 아름다운 소녀였다오.˝
할아버지는 두 손을 물에 담궜습니다. 손을 통해 바다의 빛깔과 바다의 힘이 온몸으로 스며들었습니다. 마음의 때가 다 씻겨내려가는 것 같았습니다. 문득, 이 자리가 아내와 처음 눈웃음을 나누었던 자리었다는 생각도 스며들었습니다. 그 때 어린 소녀였던 아내는 노래를 부르다 말고 할아버지를 보았습니다. 그 소녀가 저기 저 집에 할머니가 되어 살고 있습니다. 할아버지가 없어도 할아버지의 아이들을 잘 키우며 지내고 있습니다.
할아버지는 천천히 일어서서 자신이 살던 집 대신 저 쪽 여관이 있는 곳으로 걸음을 옮겼습니다.
˝난 저 여관에서 잘거요. 댁은 어떻게 할거요?˝
옆에 있던 사람은 아뭇 소리도 없었습니다.
´아니.....?´
할아버지는 갑자기 옆이 허전해 졌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옆구리가 서늘했습니다.
˝여보시오?˝
그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싱거운 사람 같으니. 간다면 간다고 할 것이지. 간다면 누가 붙잡나, 원.˝
할아버지는 이렇게 말했지만 못내 섭섭했습니다.
이튿날 할아버지는 점심 시간이 훨씬 지나서 다시 바다로 갔습니다.
˝아니......?˝
할아버지보다 먼저 바닷물에 발을 담그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할아버지는 반가워서 그 옆에 가서 앉았습니다. 어제 그 사람이었습니다.
˝어디서 잤소?˝
˝내가 태어난 집에서요.˝
그의 소리가 아주 희미히게, 잔 물결 소리처럼 들렸습니다.
˝댁도 이 근처요?˝
그는 더 이상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당신은 나보다 나은 사람이군요. 태어난 고향 집으로 갈 수 있었던 걸 보면. 이 바다를 보니 후회가 되는구려. 나는 왜 그처럼 바보같이 살았을까요? 어째서 아내가 그렇게 울면서 말렸는데도 나 는 정신을 차리지 못했을까요? 다시 어린 시절로 갈 수 있다면 새 사람이 되고 싶어요.˝
˝지금도 늦지 않았어요. 지금이라도 새사람이 된다면 기뻐하실거요.˝
옆에 앉은 이의 소리가 아까보다 조금 더 낮게 들렸습니다.
˝이렇게 다 늙어서 새 사람이 된다고 누가 눈여겨 보겠소. 다 부질없 는 생각이지요.˝
˝아니요, 그렇지 않아요.˝
그의 소리가 조금 더 크게 들렸습니다. 눈도 조금 환해지는 것 같았습니다.
˝기뻐할겁니다.˝
˝누가요?˝
˝당신을 이 세상에 보내신 분요. 그리고 당신을 기억하는 모든 분들 도 함께 기뻐할거요. 그러지 말고 할아버지의 집으로 들어가요. 할머 니는 아직도 할아버지를 기다리고 있어요.˝
옆에 있는 그가 큰 소리로 말했습니다. 이상한 일입니다. 그의 소리가 점점 크고 선명하게 귀에 들어왔습니다. 그의 모습도 뚜렷이 보였습니다. 어디선가 많이 보았던 얼굴이었습니다. 젊은 청년의 모습이었습니다.
˝도대체 당신은 누구요? 나처럼 늙은줄 알았는데 젊은이구려.˝
젊은이는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어서 가요, 기다리고 있어요.˝
그가 다시 재촉하듯 말했습니다.
할아버지는 집으로 향하며
˝그럼 같이 가요, 오늘은 우리 집에서 같이 묵어요.˝
하고 들뜬 소리로 말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어느새 보이지 않았습니다.
할머니는 할아버지를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지나가는 나그네라고 하자 아주 정중히 할아버지를 대접하는 것이었습니다.
˝자식들이 없나요? 여기 이처럼 넓은 집에서 혼자 사시게.˝
할아버지는 넌지시 물었습니다.
˝있지요, 성공한 아들과 딸, 남매가 있답니다.˝
˝근데, 왜?˝
할아버지는 다른 사람처럼 물었습니다.
˝기다리는 분이 계셔서요.˝
˝누구를 기다리는데요?˝
˝그럴만한 분이 계시답니다. 내 귀에는 그 분의 발자국 소리가 조금 씩 들리는 것 같은데 아직도 안 오시는 군요.˝
할아버지는 뜨끔했습니다. 그러나 입을 열지는 않았습니다.
그 날 밤 할아버지는 자신이 태어났던 방에서 자게 되었습니다. 모든 게 그대로였습니다. 방 주인이 항상 살고 있는 것처럼 모든 것이 깨끗하게 정돈되어 있었습니다. 그 방은 할아버지가 태어난 방이고 젊은 시절을 보낸 방이기도 했습니다.
할아버지는 잠이 오지 않았습니다. 할머니가 한 말이 자꾸 귓가에서 맴돌았습니다. 그분의 발자국 소리가 조금씩 들리는 것 같은데.......
´혹시 할멈은 나를 알아본 게 아닐까? 그런데도 내가 미안해 할까봐 아무 소리도 안 하는 게.......´
할어버지는 잠이 오지 않았습니다. 이리 뒤척 저리 뒤척 하는데 문득 머리맡이 이상해서 일어나 앉았습니다.
˝아니!˝
할아버지는 소스라치게 놀랐습니다. 낮에 보았던 그 젊은이. 그가 빛으로 빚은 사람처럼 환하게 머리맡에 서 있었습니다.
˝도대체 당신은 누구요?˝
˝젊었을 때, 당신이 내팽개쳐 버린 당신의 양심이오. 이제 내 소리와 내 모습이 뚜렷이 보이오? 고맙소? 나는 그동안 젊은 채로 떠돌아 다녔다오. 아니 당신이 나를 받아들이 때까지 당신 주위에서 떠돌고 있었다오. 고맙소.˝
할아버지의 양심이 할아버지에게 들어갔습니다.
순간 할아버지는 킁 하고 넘어졌습니다. 뜨거운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리고 가슴이 뜨거워서 할아버지는 가슴을 그러쥐었습니다.
´하나님, 고맙습니다. 전 그 동안 양심을 잃어버린 줄도 모르고 살았 습니다. 하마터면 영영 잃어버릴 번했어요.´
할아버지는 잠이 올 것 같지 않아 일어나 창가로 갔습니다. 하늘에는 아직도 별이 떠있는데 멀리서 닭 울음소리가 날아왔습니다. 그리고 새벽 종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참으로 오랫만에 듣는 새벽 종소리. 도시에서는 죽어버린 소리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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