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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4 충청일보 신춘문예 동화 당선작: 할머니의 선물(백은하) |  | |
| 찬바람이 불면서 추위가 콧속으로 파고듭니다. 유민이는 동생 유성이와 함께 입김을 뿜어내며 시장에서 뭘 살지 난감합니다. 유성이는 제사상에서 맛있는 걸 먹을 수 있다는 생각에 누나의 뒤만 졸졸 따라 다닙니다. 결국 막걸리 한 병과 가래떡, 붕어빵, 귤, 샘베과자를 샀습니다.
유민이는 동생의 손을 꼭 잡고, 굽은 골목을 올라와 느티나무 앞에 멈춥니다. 툇마루에 앉아 나물을 손질하던 할머니의 모습이 아련해집니다. 대문 앞에 다다르자, 할머니가 나오실 것만 같습니다.
밤이 되어 상을 펴고는 벽에 걸린 하얀 달력을 찢어 상위에 깔았습니다. 그리고 제사상을 차립니다.
“누나, 왜 군고구마는 안 샀어? 작년에 할머니랑 고구마도 먹었잖아.”
동생의 말에 유민이는 연탄불에 구웠던 고구마 생각이 났습니다. 유성이는 다시 감자를 들먹이며 1년 전 기억들을 되살립니다.
“누나, 감자는?”
“아, 감자도 있었지. 내년에는 잊지 말아야겠다.”
유민이는 고구마가 없으면 감자라도 쪄서 놓는다는 걸 깜빡 잊었습니다. 배고플 때 할머니가 쪄주신 감자의 맛을 잊지 못합니다. 아무리 봐도 초라한 제사상이 마음에 걸립니다. 사진도 한 장 없다는 게 너무 아쉬웠습니다. 할머니의 이름 석자 ‘박분영’을 하얀 종이에 까만 펜으로 써 밥풀로 상 앞에 붙입니다.
“누나, 엄마 제사 때는 이런 음식 없었잖아.”
“그건……”
유성이가 그렇게 말을 하자 할머니께 미안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사실 돈도 없고 제사 음식을 할 줄 모르기 때문입니다. 엄마 제사 때 만큼은 시골에서 이모라도 오시지만, 할머니 제사 때는 아무도 올 사람이 없으니까요.
“네가 남자니까 먼저 막걸리 따르고 절하는 거야.”
“이렇게 하면 되는 거야? 누나.”
유성이는 수줍으면서도 누나가 시키는 대로 곧잘 했습니다. 차린 건 별로 없지만, 제사상을 바라보며 작년 생각이 났습니다.
유민이의 아빠는 공사장에서 막노동을 합니다. 막노동 일거리는 서울에서만 있는 게 아닙니다. 일거리가 없을 때는 지방 곳곳으로 오랜 기간 다녀야 합니다. 예전에 살던 반 지하방이 세가 많이 밀려 이사를 해야만 했습니다.
“?너희들끼리 애를 써야겠구나. 집주인이 퉁명스럽긴 해도 좋은 분이야.”
대전의 공사현장에서 아빠에게 전화 한 통이 걸려 왔습니다. 아빠는 이사하는 날만큼은 오신다고 약속을 했는데 오지 못했습니다. 그렇다고 하늘에 계신 엄마가 나타날 수도 없구요. 얼마 되지도 않는 이삿짐을 나르는 건 유민이와 유성이의 차지였습니다.
이사를 하는 곳은 오르막길이 있는 산동네입니다. 좁은 골목을 올라오면 다닥다닥 여러 채의 집들이 붙어 있습니다. 용달차 아저씨가 짐을 운반해주긴 하지만, 차가 들어오지 못해 직접 들고 올라가야만 합니다.
이삿짐을 바라보면서 유민이는 순간 아빠가 원망스러웠습니다. 유성이는 누나를 도와 거울을 나르기 시작했습니다.
“거울은 깨지니까 딴 거 나르라고 했잖아.”
유민이는 애꿎은 동생에게 화를 냅니다. 거울을 뺏으며 대신 들고 올라갑니다. 그러다 그만 발을 헛디뎌 느티나무 옆 툇마루 쪽으로 넘어지고 맙니다.
“에이구, 똑바로 보고 다녀야지. 정신을 어디다 두고 다니는 거냐?”
툇마루에 앉아 야채를 다듬던 할머니는 유민이에게 소리를 지릅니다. 다행히도 거울은 깨지지 않았지만, 야채가 전부 엉망이 되어 버렸습니다. 할머니는 주름진 목을 길게 빼고 자리에서 일어나 바닥에 떨어진 파, 마늘을 주우며 말을 합니다.
“뭐하냐? 이거 줍지 않고.”
유민이 역시 미안한 마음은 들었습니다. 그런데 할머니가 소리를 지르자 순간 서러움이 복받쳤습니다. 옆에서 눈치를 보던 유성이가 달려와 야채들을 줍기 시작합니다.
“저 집 이사오는 거냐?”
“네”
누나가 대답을 하지 않자 마지못해 유성이가 얼른 대답을 합니다. 유민이는 야채를 줍는 유성이를 보자 서러워 눈시울이 젖어 들었습니다.
“다 큰 게 왜 애꿎은 눈물을 빼려고 하냐?”
유민이는 참고 있던 눈물이 왈칵 쏟아졌습니다. 얼른 옷소매로 눈물을 닦아내며 할머니에게 퉁명스럽게 말합니다.
“제가 언제 울었다고 그러세요.”
“어린 게 말버릇하고는, 울 일도 쌨다. 그러다 눈물샘 마른다.”
유민이는 비아냥거리는 투로 말하는 할머니가 얄미웠습니다. 그래서 들은 척도 않고, 얼른 대문 안으로 들어갑니다. 할머니도 자리에서 일어나 나물을 들고 뒤따라 들어갑니다. 할머니는 유민이네 집주인이었습니다.
이삿짐을 다 나르고 저녁이 되었습니다. 언제 재개발이 될지 모르는 산동네 골목 안의 작은 불빛이 더욱 밝아 보였습니다. 할머니네 마당 한쪽 창고에는 후리지아가 핀 듯 콩나물 시루 여러 통이 보입니다. 다듬다 만 시금치며 도라지, 파, 마늘이 널브러져 있습니다.
여든이 가까운 할머니의 흰머리는 하얀 눈이 소복히 온 듯 합니다. 얼굴에는 검버섯이 피어있고 주름이 쭈글쭈글했습니다. 할머니는 부엌에서 삶은 감자 소쿠리를 들고 나와 유민이네 방문을 두드립니다.
“밥들은 먹었냐? 이거라도 먹어봐라.”
마침 배가 출출했던 유성이는 누나의 눈치를 볼 틈도 없이 재빨리 소쿠리 앞으로 달려갔습니다.
“니들 애비도 어지간하구나. 방 얻으러 왔을 때 이삿날 만큼은 꼭 와본다고 했는데, 쯧쯧……”
“할머니가 뭔데 왜 우리 아빠를 뭐라고 하는 거예요?”
“저것이, 어린 게 너무 억척스러우면 못쓴다.”
이삿짐을 정리하던 유민이는 할머니에게 말대꾸를 하고, 방문을 확 닫아버렸습니다. 그리고 소쿠리를 밀쳐내자 삶은 감자들이 뒹굴기 시작했습니다. 유민이 역시 할머니만큼이나 이삿날에 오지 못한 아빠가 원망스러웠습니다.
이사하고 며칠이 지났습니다. 유민이는 학교에서 수업이 끝나고 집에 오는 길에 시장에 갔습니다. 시장 좌판에서 쭈그리고 앉아 야채며 도토리묵을 파는 할머니를 먼발치에서 볼 수 있었습니다. 강아지를 안고 화장을 진하게 한 아줌마가 할머니에게 지지 않고 따집니다. 할머니 역시 쩌렁쩌렁한 큰 목소리로 손님과 싸우고 있습니다.
“묵이 어떻다고 이 난리야.”
옆에서 생선을 파는 할아버지도 할머니를 한몫 거듭니다.
“이 할망구는 집에서 직접 도토리를 갈아서 만들어 파는 거야. 도토리 맛이 이상할 리가 없지.”
“글쎄, 우리 애가 이걸 먹고 두드러기가 났다니까요.”
유민이는 시장에서 아무 것도 사지 못한 채 집으로 오면서 할머니의 모습이 자꾸 지워지지 않았습니다. 할머니가 직접 도토리묵도 만들고, 직접 콩나물도 키우고, 야채도 다듬는걸 뻔히 알기 때문입니다. 옆에서 아니라고 거들기라도 할 걸 그랬나 봅니다.
집에 와서 방에 들어오자, 할머니가 갖다준 감자소쿠리가 그대로 놓여 있었습니다. 감자는 유성이가 이미 다 먹어치웠는지, 소쿠리에는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유민이는 책가방에서 급식으로 받은 요구르트를 꺼내 감자소쿠리에 넣었습니다. 그리고 부엌에서 잘 보이는 곳에 두었습니다. 사실 요ㅜ르트는 밤에 유성이가 배고프면 주려고 했던 것입니다.
밤이 되어 장사를 마치고 돌아온 할머니가 부엌으로 들어갑니다. 그리고 애꿎은 유성이를 일부러 크게 부릅니다.
“유성아, 이 요구르트 네가 올려둔 거냐? 잘 먹으마.”
아무런 영문을 모르는 유성이는 아니라고 말해도 할머니는 아랑곳하지 않았습니다. 유민이는 할머니가 일부러 놀리는 걸 알지만 마음만은 편했습니다. 할머니에게 유민이의 마음은 전해졌지만 어색함은 하루아침에 풀리지 않았습니다.
어느새 느티나무는 앙상한 가지만 남았습니다. 겨울에는 공사현장에 일거리가 별로 없습니다. 아빠는 동네에서 이 집 저 집을 다니면서 얼어붙은 수도 녹여주는 일을 했습니다. 유민이는 겨울방학이 되면서 신문을 돌리기 시작했습니다.
유난히도 눈보라가 많이 치던 날이었습니다. 장독대 위로 눈이 소복하게 쌓였습니다. 새벽에 신문보급소로 향하기 위해 하얀 눈을 보며 유민이는 투덜투덜 대문 앞을 나섰습니다.
“어, 어～”
평상시 아무 생각 없이 지나쳐온 길이 달라 보였습니다. 며칠 내내 눈이 쌓여 하얗던 골목이 말끔히 치워져 있었습니다. 눈이 오는 날에는 연달아 미끄러진 발을 간신히 추스르며 내려갔는데 말이에요.
유민이는 누가 눈을 치우는 건지 궁금했습니다. 하루는 궁금한 마음에 조금 일찍 서둘렀습니다. 발자국 소리도 내지 않고, 대문 밖을 몰래 내다봤습니다.
대나무 빗자루로 열심히 눈을 쓸고 있는 사람은 할머니였습니다. 할머니는 장갑도 끼지 않고, 빗자루로 쓸고 또 쓸었습니다. 유민이는 할머니를 향해 걸어갔습니다. 할머니는 순간 빗자루를 떨어뜨리며 놀라셨습니다.
“할머니, 지금까지 눈을 치운 사람이 할머니셨어요?”
유민이가 미안한 마음에 울음 섞인 목소리로 물었습니다.
“쬐그만 게 사람 놀라게 하는 재주도 있다니까, 할미 간 떨어지겠다.”
“왜 그랬어요?”
“지난번에 너 이 골목 내려가다 미끄러질 뻔 했잖냐?”
“저 때문에 그러신 거라구요?”
할머니는 평소답지 않게 말을 얼버무립니다. 좀 전에 손이 시려워 입김으로 녹이던 것과는 달리, 이마에는 땀이 송글송글 맺혀 있었습니다. 틀니가 다 보이도록 유민이에게 따뜻한 미소를 보여주었습니다.
그후 유민이 역시 할머니가 좋아하는 붕어빵이며 샘베과자를 가끔 사다드리며 점점 가까워질 수 있었습니다.
어느 날, 유민이와 유성이는 따뜻한 방에 앉아 할머니가 연탄불에 구워준 군고구마를 먹었습니다. 유민이는 엄마가 왜 돌아가셨는지, 그 동안 어떻게 살아왔는지 털어놓을 수 있었습니다. 할머니 역시 똑같은 비밀이라도 말하 듯 이야기를 했습니다.
“너희들 이게 무슨 반지인 줄 아냐?”
“어, 할머니도 반지가 다 있네요.”
“죽은 아들이 첫 월급 탔다며 처음으로 해준 금가락지여. 나에게 남긴 유일한 선물이지.”
반지를 보며 할머니는 눈시울이 젖어듭니다. 같이 살던 아들이 교통사고로 죽고, 딸은 결혼을 해서 춘천에 살고 있었습니다. 아들과 함께 살던 집을 떠나기 싫어 혼자 사는 것이었습니다. 할머니는 눈시울을 닦으며 다시 말을 이었습니다.
“니들 아버지가 처음에 여기로 방 얻으러 왔을 때 내가 별로 탐탁지가 않았어. 방 얻을 돈도 많지 않고, 애들만 있다고 해서는…… 그런데 지난번 여름에 비가 많이 온 날이 있었지. 그때 시장으로 우산을 들고 와서 나를 씌어 주며 기다리더구나.”
“우리 아빠가요?”
“뜨끈한 설렁탕을 사주면서 그러더라. 돈을 한 푼이라도 모으려면 지방에서 일을 해야 한다고, 너희들을 여기에서 살게 해달라고 사정을 하더라구.”
할머니는 유민이의 아빠를 보면서 죽은 아들이 생각났다고 말했습니다. 아빠는 그 후에도 서울에 계시는 날에는, 가끔씩 시장으로 할머니를 모시러 갔던 것입니다. 유민이는 그 사실을 이제야 알게 되었습니다.
유민이는 아빠를 미워하고 원망했던 마음이 할머니 덕분에 눈 녹듯 사라질 수 있었습니다. 따뜻한 방안에서 오랜만에 웃음소리가 들렸습니다. 일을 마치고 들어오던 아빠는 마당에 서서 가만히 듣고 있었습니다. 아빠 역시 오랜만에 흐뭇한 미소를 지을 수 있었습니다.
봄이 오면서 점점 할머니의 몸이 계속 좋지 않았습니다. 결국 춘천에 사는 딸이 할머니를 모시러 왔습니다. 거동이 불편해진 할머니는 딸을 따라 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얼마 후 할머니의 딸에게서 전화 한 통이 걸려왔습니다. 할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연락이었습니다. 아이들은 그 날 평생 울어야 할 눈물을 하루 사이에 다 울어버린 듯 합니다.
하루는 우체부 아저씨에게 편지 한 통을 받습니다. 유성이는 마당으로 뛰어 들어가며 호들갑을 떱니다.
“누나, 이 편지 주소가 춘천이야.”
“뭐?”서투른 필체를 봐서 할머니가 쓴 것임에 틀림없었습니다. 아이들은 편지를 뜯어보기도 전에 눈가에 눈물이 맺혔습니다. 어디선가 할머니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 했습니다.
“울 일도 쌨다. 눈물샘 마른다고 우는 거 아니라고 했지.”
할머니가 아이들을 위해 써두었던 편지를 할머니의 딸이 보낸 것이었습니다. 죽은 아들과 함께 살던 집이 재개발 될 때까지 만이라도 유민이네 가족에게 지켜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어둑어둑해진 하늘에서 마당 한 가운데로 유난히도 밝은 달빛을 비춰주었습니다.
계절이 바뀌면서 할머니의 흔적들은 점점 사라졌습니다. 겨울이 되어 유난히도 눈이 많이 온 날입니다. 유민이는 새벽에 신문배달을 하기 위해 집을 나섰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골목길 눈이 깨끗이 치워져 있었습니다. 잠시 잊혀졌던 할머니가 다시 살아 오셨나 할 정도였습니다.
며칠 동안 그런 꿈같은 일은 계속 되었습니다. 유민이는 누구인지 확인하기 위해 작년처럼 대문 뒤에 서 있었습니다. 눈을 치운 사람은 시장에서 할머니 옆에서 생선을 파는 할아버지였습니다.
“왜 할아버지가 여기 눈을 치우고 계세요?”
유민이가 다그치며 물어보자 할아버지는 깜짝 놀라는 얼굴이었습니다. 할아버지는 조금 망설인 후에야 입을 여셨습니다.
“원래 나이가 들어 늙으면 저 세상 갈 날을 안다더니, 이 할망구가 저 세상으로 갈 줄 미리 알았나보다.”
유민이는 할아버지의 말을 도무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습니다.
“할아버지, 그게 무슨 말씀이에요?”
“내가 한사코 안 한다고 했는데, 작년에 딸네 집에 가기 전에 나를 찾아와서 손에 낀 금반지까지 빼주며 부탁을 하더구나.”
“금반지요?”
유민이는 할머니의 금반지가 어떤 반지인지 알고 있기에, 그 순간 감당할 수 없는 서러움이 뿜어져 나왔습니다.
“우리 손녀가 여기에 살 때까지 겨울이 되면 골목길 눈 좀 치워주소.”
할머니의 목소리가 귓가를 맴도는 듯 했습니다. 유민이는 눈물을 흘리며 골목길을 뛰어 내려갑니다. 하늘에서는 함박눈이 내리면서 유민이의 눈물을 살포시 덮어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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