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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소설 속의 철학 |  | |
| ♧소설 속의 철학♧
이 책은 김영민·이왕주라는 이름을 가진 두명의 철학자가, 1995년 봄부터 1996년 가을까지 부산일보의 ´문학 속의 철학´란에 매주 연재한 글을 한데 모은 것이라 한다. 나는 부산일보의 오래된 구독자이며, 특히 ´문학속의 철학´란을 흥미롭게 지켜 본 사람 중 하나인지라, 이 란이 책으로 엮어졌다는 사실에 새삼 반가움을 느꼈다. 저자들이 이 책을 통해서 추구했던 것은, 작품 뒤에 숨겨지기를 원하지 않는 글쓰기에 있었다고 한다. 제목 그대로 이런 저런 소설속에 담겨있는 이데올로기나 속뜻을 새롭게 새겨보고, 그 속에서 철학적 의미를 짚어내는 데 이 책의 의의가 있을 것이다. 동·서양의 대표적 소설들을 대상으로 하여 철학에 접목시키고 있는 이 책은, 행간읽기를 통해 문학작품을 의미있게 읽는 방법을 제시하는 길라잡이 역할을 자처하고 있다. 작가는 본문 중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쉿! 조금은 목소리를 낮추고 이제 진실을 이야기 해 보자. 우리는 만난 적이 있는가. 지난 일 년 반 동안 2주일에 한 번 나는 꽤 성실하게 여러분께 편지를 띄웠다. 때로는 작품을 고르느라 그 시간을 다 써버리기도 했고 풀리지 않는 논리 때문에 밤을 지새기도 했으며 가끔은 애써 써놓은 글을 쓰레기통에 던지며 참담해하기도 했다. 어쨌든 이제 피할 수 없는 물음 앞에 서 보자. 창백한 철학과 피가 뛰는 문학을 접맥시키려는 우리의 시도는 성공했는가 실패했는가. 좀체 판단이 서지 않는다.」
굳이 저자의 고백이 아니더라도, 나는 작품 전체에서 저자의 치열한 고뇌와 열정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었다. 저자는 김동인의 <광화사>에서 가치의 최고 범주는 무엇이며, 순수 예술, 혹은 절대의 아름다움이란 과연 생을 걸 만한 가치가 있는 것들인가 라는 화두를 던진다. 현진건의 <운수 좋은 날>에서는 어느 인력거꾼의 운수 좋은 하루를 통해, 대립된 양극단이 어떻게 일치에 도달하는가 하는 중용의 묘를 뽑아낸다. 계용묵의 <백치 아다다>에선, 삶을 ´문제 해결의 과정´이라고 정의한 실용주의 철학자 존 듀이의 사상을 텍스트와 접목시킨다. 김유정의 <봄 봄>에선 기다림과 만남이 주는 황홀한 미학을, 이상의 <날개>에선 야스퍼스나 키에르케고르, 혹은 하이데거 같은 철학자들이 천착한 인간의 실존 문제를 펼쳐 보인다. 김동리의 <무녀도>를 통해선 ´지혜를 사랑´하는 철학의 본질을 밝히고, 제대로 보려면 낭이처럼 귀와 입을 닫아야 한다고 역설한다. 황순원의 <소나기>는 ˝느끼지 않는 삶은 살아갈 만한 가치가 없다˝는 걸 속삭이고 있고, 김정한의 <축생도>에선 동양의 安分知足과 서양의 플라톤적 논리가 교차한다. 박완서의 <마른 꽃>에선 카뮈와 키케로를 통해 ´노인 철학´의 새로운 활로를 모색하고 있으며, 최문희의 <눈길>에선 노자와 공자의 입을 빌어 순리에 따를 것을 천명한다. 이제하의 <초식>은 민주주의에 대해, 이청준의 <떠도는 말들>은 名實相符의 虛와實에 대해, 전상국의 <우상의 눈물>은 ´타인의 시선´을 지옥이라 부른 사르트르를 끌어 오고, 위선이니 기만이니 하는 시뮬라시옹의 개념을 가져 와 우리는 누구인가 하는 물음을 던지고 있다. 김승옥의 <무진 기행>을 통해 안개속의 실존을, 안정효의 <하얀 전쟁>을 통해 ´하얀 색은 모든 색이 어울린 것이다´라는 메타포를, 황석영의 <삼포 가는 길>을 통해선 삶의 변증법적 도정을 그려내고 있다. 최인호의 작품 <타인의 방>에서, 프롬의 소외와 물화가 주는 폭력성을 감지할 수 있으며, 복거일의 <캠프 세네카의 기지촌>에선 매판 지식에 대한 비판의 메시지를 읽을 수 있다. 이윤기의 <나비 넥타이>에는 헤라클레이토스의 만유 유전설의 원리가 등장하고, 오정희의 <동경(銅鏡)>에선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을 빌어 삶과 죽음의 문제를 비춰본다. 이문열의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엔 앎·힘·삶에 대한 담론이 있으며, 이인성의 <당신에 대해서>는 존재와 부재에 대한 데카르트식 명제가 드러나고 있다. 최윤의 <하나코는 없다>는 마르틴 부버의 만남과 스침에 접근해 있고, 하일지의 <경마장의 오리나무>는 프로이트 이후의 정신분석학적 성과와 베르그송의 통찰에 힘입어 가능해진 ´무관심의 철학´이 요체를 이룬다. 양선규의 <칼과 그림자>는 지식의 線과 體達의 境을, 김형경의 <담배 피우는 여자>는 和而不同의 인간관계를 유지하는 기본인 합리성을, 장정일의 <너희가 재즈를 믿느냐>는 본질보다는 현상을, 인식보다는 느낌을 중시하는 시대정신을 제시한다. 신경숙의 <풍금이 있던 자리>는 훗설의 현상학에 바탕을 둔 ´현상학적 사랑´을 말하고, 공선옥의 <우리 생애의 꽃>은 알레고리 수법으로 칸트의 정언명법을 일깨운다.
다음은 외국 작품으로 넘어가 보자.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에선 데카르트 뒤집기가 시도되고, 다니엘 디포의 <로빈슨 크루소>에선 타자의 이중성에 초점이 맞춰져 있으며, 볼테르의 <캉디드>에는 신학과 종교의 공리공론 아래 신음하고 있던 당시인의 분노가 표출되어 있다. 나다니엘 호손의 <주홍글씨>에선 존재와 글자 사이의 관계역학을, 에드거 앨런 포의 < 도둑맞은 편지>에선 ´생각´에 대해 생각하는 방법을, 멜빌의 <백경>에선 에이헙 선장을 통해 신화적 본질주의의 한 전형을 보여준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카라마조프의 형제>에선 우연과 필연을 통한 인식론의 요체가 상정되며, 에밀 졸라의 <목로주점>에선 텐느의 환경 결정론이 화두로 등장한다. 헤르만 헤세의 <싯다르타>는 구도와 깨침을 통한 열반의 과정을 담아내고 있고, 카프카의 <심판>은 부조리한 현실에 대응하지 않고 있는, 즉 시지프스적 저항과 반항의 실종상태를 개탄하는 작가의 목소리가 실려 있다.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희랍인 조르바>는 ´삶에 대한 사랑´이라는 니체 사상의 일관된 주제를 깨닫게 해 주고, 헤밍웨이의 <킬리만자로의 눈>에는 행동주의적 인간관이 나타난다. 보르헤스의 <불한당들의 세계사>에는 영웅 없는 역사, 천재 없는 문명사가 담겨 있고, 사르트르의 <구토>에는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는 사르트르의 유명한 명제가 투영된다. 카뮈의 <이방인>은 다원화의 인정과 해석의 다양성이 요구되고, 오야마 가츠코의 <미야모도 무사사>는 칼 끝에 맺히는 세상의 이치를 반영하며, 엔도 슈사쿠의 <침묵>은 순교와 배교라는 眞僞의 경직된 대치 구조를 넘어선 대화합의 경지를 증거한다. 밀란 쿤데라의 <느림>에선 인문 정신의 시간성을 구축하는 느림의 철학, 삭힘의 지혜가 빛나고,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좀머씨 이야기>에서는 들뢰즈의 유목론을 내세워 해방을 꿈꾸는 영혼을 노래한다.
지금까지 난 ´철학´이란 대단히 형이상학적이고 까다롭기만 한 학문이라고 생각해 왔다. 그 동안 얼마나 많은 철학책을 읽었던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 얼마나 많은 철학책이 나의 이해를 받지 못한 채 내 손을 떠났던가. 물론 책 한 권 달랑 읽고, 내가 철학에 대해서 깊이있게 알게 되었다고 말할 수는 없다. 하지만 이 책을 읽음으로써 그동안 어렵게만 생각해 왔던 철학을, 문학이라는 ´糖衣定´을 통해 한결 가깝게 접근할 수 있었다. 나의 책 읽는 방법에 있어서도 새로운 전환점이 이루어진 셈이다. 작가도 말하듯이, 해석의 틀안에 쉽게 들어오지 않는 여러 이치들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그 긴장을 견디면서 해석의 틈을 노리는 성숙한 자세야말로 다원화 된 우리 시대의 독자가 갖추어야 될 기본 자세일 것이다. 책 읽기를 유난히 즐기기 때문인지, 이 책에 소개되어 있는 책들 중 내게 낯선 책은 거의 없다. 그러나 나의 이해를 이미 한 번 거쳐간 책들임에도, 내가 읽고 감상했던 방식만이 다는 아니었다는 걸 새삼스레 느꼈다. ´똑같은 내용이라도, 이런 각도에서 볼 수도 있구나.´ ´나는 이렇게 해석했는데...저렇게도 해석이 가능하구나.´ 하는 식의 생각을 하며 재밌게 읽었다. 내 정서엔 외국작가들이 쓴, 소위 베스트셀러로 일컬어지는 철학과 문학에 대한 현학적 담론서(이를테면, 윌 듀란트의 ´문학 이야기´나 콜린 윌슨의 ´아웃사이더´같은 책들)보다, 이 책이 훨씬 더 정겹게 다가온다. 그건 전적으로 작가들의 노련하고 걸출한 필력에 기인한다고 여겨진다. 가볍고 부담없이 읽을 수 있어서 좋았다. 한 마디로 말해 내겐 신선한 충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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