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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  | |
| 노변정담(爐邊情談)
감기가 틀림없다. 불길한 예감은 너무나도 잘 들어맞아 탈이다. 뜨거운 보리차 한 잔 들고 화롯가에 앉았다. 이글이글 타오르는 장작불 옆에 앉아 볼이 달아오르는 걸 느낀다. 눈매가 가늘어지고 슬슬 졸음이 오기 시작 할 때쯤, 그가 기다렸다는 듯이 내 옆에 자리를 잡는다. 그리고 조심조심 이야기를 시작한다. 우리의 삶과 인생에 대해서.
‘인생이란 것은 이런 거야’ 라는 것을 알려 주고 싶어 하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잘난 자존심은 누군가 나에게 이건 이렇고 저건 저렇다고 말하는 것을 꿀꺽 삼켜 넘길 만큼 인자하지 않다. 그래서 시작은 어려웠다. 알 수 없는 말들의 나열과 무언가를 주입시키려 하는, 우겨 넣으려고 하는 인생 강좌에 질릴 대로 질려 버렸다. 내용 또한 엇갈리는 사랑, 배신의 연속, 서로가 서로를 옭아매면서도 벗어날 수 없는 속박의 상태. 내려지는 결론은 단 하나. 행복은 없고 불행한 최후뿐이다. 가장 전형적인 치정극의 줄거리였다. 속속들이 알고 있기 때문에 눈물 흘릴 여유가 없고, 분개할 이유가 없는 그런 내용이겠거니 했다. 이야기가 끝난 후에는 ‘자유’라는 눅눅한 변명을 늘어놓으며 ‘그래도 그들의 사랑은 아름다웠네, 누가 그들에게 돌을 던질 것인가’라고 도리어 덤벼들곤 한다. 짜여진 각본은 그랬다.
그러나 치졸한 치정극이 아닌 진지한 고뇌의 탄식과도 같은 책이었다. 계속 이어지는 생의 굴곡들과 위기의 순간들, 사랑과 욕망에 대한 단순하면서도 가볍지 않은 고민, 그리고 ‘존재’함을 확인하기 위한 방황. 무엇이 가볍고, 무엇이 무거운지, 원초적인 중량감은 찾는 네 명의 남녀에게서 기묘한 친밀감을 느꼈다. 아마 내가 찾아 헤매고 있는 것과 본질은 같은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감마저 들었다. 우리 모두 인간이기 때문에, 참을 수 없이 가벼운 ‘인생’ 이란 시간을 보내고 있기 때문에. 항상 무거운 것에 짓눌려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결과는 언제나 가볍기만 하고 한 줌 재로 남거나 흙에 짓눌려 썩어 갈 몸인데, 조금이라도 더 짐을 덜고자 아등바등 몸부림치는, 우리는 인간이었다.
토마스와 테레사, 프란츠와 사비나의 엇갈린 인생. 외딴 길목에서 갑자기 튀어나와서 이런 저런 이야기 하다가 뒤돌아보면 골목길 한 쪽 모퉁이를 돌아버리고 없다. 한 사람의 이야기가 이렇게 끝났다고 생각하면 다른 한 사람이 나와서 ‘이 이야기는 사실 이랬어‘ 라고 고분고분 속삭여 주었다. 마치 찌개 뚝배기 하나를 사이에 두고 도란도란 대화를 나누는 가족처럼. 그들은 자신의 이야기 보다는 서로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전혀 정리되지 않은 구성과 그것만큼이나 예측할 수 없는 그들의 생각과 사고. 그리고 슬그머니 모습을 드러내서는 마치 자신은 처음부터 모든 것을 다 알고 있었다는 듯 ‘그래, 인생은 이런 거야-’ 라고 장황한 가르침을 나열하는 이름 모를 사람. 네 사람의 인생에서 몇 걸음 떨어져 그들을 향해 미소 짓고 있는 얼굴 없는 사람. 위로 떠올랐다가 아래로 떨어지고, 심하게 흔들렸다가 아무 일 없었던 듯이 미동도 없이 멈추고 마는. 소설은 처음부터 끝까지 이렇게 비포장도로의 연속이었다.
어느 곳에도 정착할 수 없는 사람들, 하나는 무거움으로, 하나는 가벼움으로 살아가려 한다. 하지만 그들의 최후가 보여 주는 것은 무거움도 가벼움도 결국은 옳지 않다는 것이다. 우리의 존재는 너무나도 ‘참을 수 없이 가벼운’ 것이기 때문에 정체성을 논한다는 것,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가를 따진다는 것조차 사치였을까. 어디선가 툭툭 불거져 나오는 네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있노라면 얼기설기 엮어지긴 했지만 호시탐탐 어긋날 기회만을 노리고 있는 틀이 생각난다. 네 사람이 모두 원했던 것은 영혼의 자유. 육체를 벗어난 인식의 자유. 다수의 무명씨들과는 어딘가 다른 생각. 그 생각은 그들을 이방인으로 만든다. 어디에 머무른다 해도 그들에게 뒤따르는 것은 흐릿해서 보이지는 않지만 분명히 느껴지는 눈총과 남들과는 다르다는 괴리감이다. 숨이 막히지만, 도망칠 곳은 어디에도 없다. 모든 인간에게서 ‘다름’을 찾아낼 수 없기 때문에.
서로를 억압하면서도 서로에게서 벗어나려고 애쓴다. ‘사랑’이라는 것에 끊임없이 위협 받으면서도 언제나 ‘자유’를 갈구한다. 그러나 서술자는 어떠한 도움도 주지 않는다. 다만 중간 중간 이야기를 박차고 나와 그들의 생각하는 것이 무엇이고, 그들의 인생은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지 ‘일반인’ 인 우리에게 설명해 줄 뿐이다. 언제나 명쾌한 결론을 내려주고 존재의 가벼움을 깨닫게 해 주는 것은 서술자이다. 문제는 그 결론이 너무 어렵다는 것. 너무 어려워서 무엇이 진실이고, 무엇이 궤변인지 가늠할 수 없다는 것이다.
글은 장황하고 추상적이다. 무엇을 말하려는지 알 수 없다. 이 소설은 많은 생각을 요구한다. 한 줄 한 줄, 허투루 넘길 수 있는 구절이 없을 정도로 난해하다. 난해하다기 보다는 차라리 부산하다. 부산하기 보다는 어지럽다. 주인공들의 삶처럼, 나 또한 이 책에서 제시하는 반전에 의해 배신을 맛보고, 쭉 나열되는 무언가에 속박된다. 하지만 무언가를 알고 싶어 하는 욕망 때문에, 이 책을 덮지 못한다. 나도 토마스와 테레사, 프란츠와 사비나, 그리고 서술자와 같은 쳇바퀴를 돌리며 화롯불 옆에 둘러앉아 존재의 가벼움에 대해서 읊조리고 있는 것이다. 끊임없이 욕망하고 있으나 찾지 못하고 그 자리에 서 있다.
무언가를 위해 치열하게 살아가고 있지만, 결국은 텅 빈 광장에 서 있는 나를 보게 된다. 그 때의 허무함, 알 수 없는 공허. 진공 상태에서 축 늘어진 빨랫감 같다. 존재는 사랑도, 배반도, 옳은 것을 위한 결심도, 누군가를 지키기 위한 굴복도 아닌 가벼운 공기 같은 것이었다. 너무나 가벼워 손에 쥐어도 그 양감을 알 수 없는. 그래서 손에 쥐고 있지만 놓쳐버렸다고 생각하게 되는. 존재감이란 그런 것이었다.
화롯불이 점점 거무스름하게 흐릿해진다. 쇠를 먹는 불가사리의 열기도 사그라져 갑자기 한기가 밀려온다. 아무래도 이번엔 제대로 걸리려나 보다. 몸이 무거워 일어서기가 쉽지 않지만 그들과의 정담이 끝난 이후 나는 알게 되었다. 육체야 말로 정말 참을 수 없이 가벼운 존재라는 것을.
by 북퀴즈 글마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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