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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건전한 사회 |  | |
| 소외(疏外)의 극복(克服)
―에리히 프롬의 ˝건전한 사회˝를 읽고―
현 종 헌
현대인들은 언제까지고 매카니즘 문명에 의해 관심 밖으로 밀려나야만 하는가?
교교한 달빛 속에 우수가 창가로 깃드는 가을밤, 턱을 괸 채 사뭇 이 생각에 깊이 빠져들다가, 끝내는 끝나지 않는 미궁을 헤매이며 나는 곧 절망해버리고 만다. 현대를 매카니즘으로 분장하는 것은 필요 불가결한 것인가. 숱한 사회 문제를 야기시켜 없어져야 하면서도 결코 그래서는 안 되는 것. 이런 복잡 다단한 사회 구조 속에 현대인들은 마치 하나의 부속품처럼 슬픈 운명을 부여안고 하루하루를 버텨나가는 것이다. 자기가 손수 만들어 놓은 것들로부터 내버려진 채.
이 ´내버려진다는 것´은 곧 ´疏外´라는 개념으로서 철학적인 의미를 띠게 된다. ˝절대적 관념(혹은 절대적 정신)은 자연 또는 사회로서 자기를 외화(外化)함으로써 비로소 존재한다˝는 소외를 문제성 있게 맨 처음 제시한 이는 헤에겔이었다. 그리고 거기에 보다 분석적으로 인간과 사회를 관련지어 해석하려 했던 이가 다름 아닌 에리히 프롬(Erich Fromm)이다.
그는 불후의 명저 ˝건전한 사회˝(The Sane society)를 통하여 소외 문제를 피상적인 것에서부터 심층적인 내부로까지, 사회를 들여다보며 여러 각도에서 조명하고 파헤친다. 이 속에 비치는 프롬의 사상이야말로 현대인이 애타도록 기다리던 지성의 갈증을 일시에 풀어주는, 고쳐 말해 우리가 삶의 좌표에서 현대를 비판하면서 떠돌고 있을 때 가까이 다가와 깜빡거리며 나갈 길을 일러주는 ´의지의 신호등´이라 하겠다. 그래서 나는 첫 페이지를 넘기며 흥분을 삭이지 못하던 그 삭막한 군영(軍營)의 시절에 밀려오던 가슴 뿌듯함을 아직도 기억 속에 생생하게 간직하고 있다. 지금도 참참이 그때 밑줄 그어놓았던 부분들을 되새김하면서 명상에 잠겨 마음의 위안을 얻곤 한다.
현대의 뭇 지성 중에 샛별 같이 유난스레 돋보이는 에리히 프롬은 미국의 심리학자로서, 본시 태어나기는 독일이고, 그곳에서 사회학과 심리학을 전공한 후 베를린의 정신분석 연구소에 몸 담고 있다가, 1933년 미국의 초청으로 시카고로 건너가 이듬해 귀화했다. 베트남 e대에서 강의해오던 1949년, 부인의 건강 이유로 다시 멕시코로 옮겨 65년 정년 퇴임 시까지 줄창 멕시코 국립대학에 재직하면서 오로지 연구에만 골몰하는 비교적 순탄한 생애를 살아온 인물이다. 하지만 그의 사회심리에 관한 고구(考究)는 저서와 만나면서 느낄 수 있듯이 사상의 고뇌가 응어리져 몸부림치는 소용돌이 속으로 빠져들어가는 듯하다. 마치 현대가 안고 있는 온갖 병폐에 대한 대가를 혼자 지려는 양 그의 묘체(妙諦)가 빛을 발하면 발할수록 정신적 방황은 걷잡을 수 없는 것이다.
˝건전한 사회˝에서 먼저 프롬은 현대인의 정신 건강을 여러모로 진단해 본다. 전쟁과 같은 어떤 극한 상황에 처하여서도 인간은 항용 자신을 비호하며 합리화시키려 드는, 자기 방어의 본능을 지니고 있다고 서론을 펼친다. 노동에 시달리면서도 그것은 곧 자신에게 없어서는 안 될 숙명적인 것이라고 사람들은 생각한다. 허나 전과 달리 시간적 여유가 남아도는 현대인들은, 정작 남은 시간을 아까워하면서도 활용하는 방법에 갈팡질팡하며 앓기 시작한다. 여기서 프롬은 경제 성장을 가져온 근대 문명이 결국 인간의 깊은 욕구를 만족시키는 데 실패했다고 정곡을 찌르며 의미 깊게 문제성을 제시한다.
서문에서 ˝건전한 사회˝가 이미 저술된 ˝자유로부터의 도피˝(Escape from freedom, 1941)와 ˝주체적인 인간˝(Man for Himself, 1947)의 속편임을 저자는 밝히고 있다. 그 두 권이 문제의 제기라 하면 본 저서는 인간의 성격과 인간성 편에 서서 그 문제에 답하려 했던 것이라 볼 수 있는 바 제3장인 ´인간의 상황´ 편에 이르면 나타내고자 하는 의견이 뚜렷해진다. 전장에서 ´문명사회의 병리에 관한 연구 시도´를 명백히 했으면서도 다시 인간으로 돌아가 그 속성을 매만져 보는 것이다. 연구 의도와는 걸맞잖게 전편 곳곳에서 ´인간´이라는 낱말이 눈에 띄게 현저한데, 요는 모든 과학이 아무리 사유적이고 분석학적이라 하더라도 어디까지나 인간의 범주를 벗어나서는 안되고, 인간끼리 결속된 애정을 품고 있는 알맹이 있는 이론이어야 한다는 프롬의 휴머니티가 스며 있어 한결 읽는 이의 감정을 훈훈하게 해준다.
Libido에 얽매어 인간 심리를 분석하려는 S. Freud를 사회심리라는 매체를 통해 조심스럽게 비판하면서, 인간이 그의 실존에 대한 해답을 얻고자 하는 의미 추구의 욕구가 기본적이라고 확실하게 의사를 밝힌다. 이러한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고향, 즉 자연을 상실해 버린다. 인간이 선택한 길은 하나뿐, 자연의 고향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는 것이다. 이로써 불행이 싹트고 끝없는 방황으로 이어지는 운명이 가로놓이게 되는 것이다.
그렇지만 인간에게 이 비극적인 상황에서 탈출하는 수단이 결코 없는 것은 아니다. 그 유일한 길은 ´사랑´이다. ˝사랑은 자기 자신의 완전성과 격리감을 유지하는 조건 아래 자기 이외의 어떤 사람과 결합하는 것이다. 사랑은 공감하고 공유하는 경험이며 자신의 내적 행위의 충분한 발현을 허용하는 영적 교섭인 것이다.˝ 나를 그토록 사로잡았던 이 대목의 감동은 두고두고 잊지 못하리라. 실로 성경의 고리도 전서에 나타난 사랑과 견주어 요만치도 진부함이 없는 오늘날의 사랑의 바이블이자 여기서 프롬의 사상은 이미 결론지어졌다고 생각해 본다.
허나 여기에 그치지 않고 사고는 줄기차게 이어진다. 멀리 17,8세기 자본주의에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이미 발표된 갖가지 이론을 인용하며 사회적 성격을 해설한다.
´노동의 적´으로 서서히 대두하기 시작하는 17,8세기 자본주의 문제와 19세기 노동자에 대한 잔혹한 착취로 인하여 경제적 영역에서 ´만물의 척도´를 상실한 인간, 착취는 사라졌으나 부(富)를 성취하므로써 기생하는 20세기의 사회적 병리 현상을 묘파하면서 소외 문제를 부각시킨다.
경제적으로 성공을 거둔 자본주의는 그 밑바닥에서 신음하는 인간을 지나쳐 버린다. 스스로를 따돌림 당한다고 느끼는 인간. 소비로 해결해 보려 하나 즐거움을 위한 소비는 한낱 자기가 불행하다고 의식을 억제하는 것에 불과할 따름이지 소외현상은 여전하다. 경영자 역시 전체를 관리하기는 하나 생산물로부터 소외 받기는 데서는 노동자와 오십보 백보다. 친구는 이윤의 대상으로 이용되고, 사랑은 되도록 거리에 의해 결정지워지고(찾는 사랑이 아니라 가직한 데서 고르는 사랑), 종교, 양심, 이성, 자유에 대한 사상으로부터까지도 스스럼없이 소외되어 끝내는 자살로 막을 내리는 드라이하리만치 냉혹한 현실에서 가슴앓이하는 게 현대인이다. 참으로 면도날 같이 예리한 지적이 아닐 수 없다.
소외된 인간은 건전할 수가 없다. 그는 자기 자신을 스스로와 타인에게 조종되는 하나의 사물, 하나의 투기 대상으로 체험하기 때문에 자아의식이 결핍되고 깊은 불안에 빠진다.
다시 한번 헤어나는 실마리를 모색해 본다.
이에 앞서 프롬은 사회주의를 언급하는데, 공동생산 공동판매 체제를 통한 마르크스 이론 역시 경제적으로 볼 때 성공한 편이긴 하나 평등과 협동의 정신이 결여된 그것은 창조를 불가능케 한다고 설파한다. 인간성의 결여를 여전히 비판하고 있다. 말을 바꾸어, 퍼스낼리티를 형성하는 고귀한 인간성 본연의 자세를 억압하는 한 소외 현상은 쉽사리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건전한 사회로의 지향을 위한 결론은 벌써 내려진 것이나 다름없다. 인간성의 회복, 바로 그것이다. 그 길을 위한 구체적인 방안으로 ˝인도주의적 공동사회주의˝(Humanistic Communitarian Socialism)를 표방한다.
스스로가 선택하여 확신과 신념을 갖는 사회, 인간관계가 애정으로 맺어진 사회, 우애와 단결로 뿌리 내리는 사회, 힘의 주체로서 자신을 경험하며 자기의 존재를 느끼게 하는 사회, 신앙의 체제가 존재하는 사회가 그 골자이다. 기껏해야 정신적인 영역을 못 벗어나는 극히 피상적인 이론이라 하는 비판이 더러 있긴 하나, 나는 이 길만이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스스로 해결해야 할 건전한 사회로의 발돋움을 위한 출발점이라 판단해 본다.
프롬은 전편에 따뜻한 인간애를 깔아놓아 사뭇 독자들을 매혹시키곤 하지만, 그에 못지 않게 간명한 묘사와 적절한 비유로 구성된 명쾌한 문장에서 그의 사상과 어렵지 않게 공감할 수 있다.
˝허무라고 하는 깊은 나락에 직면함으로써 야기되는 불안은 지옥에 대한 두려움보다도 훨씬 더 공포에 떨게 하는 것이다.˝ 한 가지 예문이다. 결코 미문(美文)이 아닌, 그러면서도 할 말은 빠뜨리지 않고 어려운 문구 없이 조리 있게 독자를 끌고 간다.
이 책을 다 읽고 난 후의 나는, 요만치 비판의 여지도 없이 무조건 수긍해버린 그 감명은 실로 충격적이어서, 프롬의 사상을 접해보지 못한 사람은 얼마나 불행할까 하며, 상대방과 대화를 나눌 때면 으레 ˝에리히 프롬의 ´건전한 사회´를 읽어 보셨습니까>˝ 하고 조소 어린 눈길을 던지곤 한다.
˝건전한 사회˝가 비록 1955년에 발표되어 구시대의 유물인 양 여겨지기 쉬우나 우리가 그를 문명에 비해 1세기 가량 뒤떨어진다는 것을 감안할 때, 아니 그보다도 보편적인 인간성을 꾸준히 다뤄나갔다는 데 대해 현대의 고전으로 의심치 않아 더더욱 프롬을 미더워 하는 것이다.
사상가가 이 땅에도 나와주기를 바라는 맘 간절해진다.
어스름이 젖어드는 황량한 벌판을 바라보며 우울함에 빠질 때면, 늘상 프롬의 경귀가 뇌리 한켠에서 움틀거리며 자꾸 나의 의식을 흔들어 깨운다.
˝정신적으로 건강한 인간이란, 생산적이고 소외되지 않은 인간이다.˝
<1982년 9월, 대구시립도서관 독후감 금상 수상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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