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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로마인 이야기 |  | |
| 시오노 나나미 : <로마인 이야기>
역자 : 김석희 / 출판사 : 한길사(도) / 출판년월(초판) : 1995/9/30 / 쪽수 : 302
학교 도서관에서 책을 고르던 중, 유독 내 눈에 띄는 책 한 권이 있었다. 바로 시오노 나나미가 지은 ´로마인 이야기´였다. 며칠 전에 신문지상을 통해서 시오노 나나미와 기자의 대담을 읽고난 후 그 책에 대해 관심이 많던 터라 나의 선택은 당연한 것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그 동안 ´사회´라는 교과목을 통해서, 그리고 로마에 관한 여러 서적을 통해서 내 나름대로는 로마에 대해서 많이 알고 있다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자부심을 가지고 책을 읽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그러한 나의 생각들은 처음부터 아니, 작가의 말부터 빗나가기 시작하였다. 작가는 로마에 대한 이해가 역사의 중요한 한 사실보다는 그 사실이 있게 한 과정을 통해서만이 로마에 대한 이해가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난 오직 로마에서 일어났던 사건의 결과를 통해서 로마를 이해하고 평가하려 했던 것이다. 다행히도 이러한 내용을 숙지하고 책을 읽기 시작했다. 로마의 건국으로부터 시작된 이 책은 처음에는 로마초기의 정치체제의 변화 및 로마의 자연, 인문환경 등을 시대적인 순서에 따라 요약적으로 서술해 놓았다. 하지만 권을 거듭할수록 내용은 한 사건과 그에 대한 과정 또는 한 인물과 그 인물의 성장 배경 과 그의 업적을 매우 상세히 서술하였다.
7권이나 되는 긴 내용 중에 내가 가장 감명 깊게 읽었던 것은 바로 로마와 카르타고의 대결을 그린 2권, ´한니발 전쟁´ 편이다. 이 한니발 전쟁은 로마의 사활이 걸려있었다고 할 정도로 로마의 역사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부분이다. 제2차 포에니 전쟁인 한니발 전쟁의 연 원은 제1차 포에니 전쟁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시칠리아 성을 두고 로마와 카르타고는 전쟁을 하게되고 결국 로마가 승리하게 된다. 이때 카르타고 패장은 한니발이라는 어린 아들을 두고 있었다. 아버지에게서 로마로부터 뼈저린 패배를 들은 그는 복수를 결심하게 된다. 바로 이 한니발의 복수심이 불꽃이 되어 타오른 전쟁, 제2차 포에니 전쟁은 한니발이라는 젊고 뛰어난 장수에 의해 주도된다.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험난한 알프스산을 넘는 로마로의 진입은 한니발이라는 명장의 능력이 어떤 것인가를 단번에 실감시켜준다. 한니발은 이러한 기습과 함께 로마 동맹도시들의 와해를 노렸다. 로마는 도시국가의 연합체였기 때문에 동맹을 와해를 시키면 로마는 고립될 수 있었던 것이다.
이 책을 읽던 나는 한니발의 지략에도 놀랐지만, 한니발에 대한 로마인들의 대책에 다시 한 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한 상황 속에서도 로마의 귀족과 평민들은 하나가 되어 나라의 방어를 도왔고, 또한 동맹 도시들과의 긴밀한 협조로 단결력을 모을 수 있었다. 이 전쟁은 후에 로마의 뛰어난 장수인 스키피오가 한니발에게 승리함으로써 일단락되지만 한니발이라는 한 사람이 로마의 전부를 바꿔논 계기가 되었다.
이 책을 읽으면서 정말 많은 것을 깨달았다. 역사를 과거의 한 사실로 여겼던 나에게는 로마인 이야기가 소중한 가르침이었고, 역사는 그 사실로서가 아니라 그 사실에 뒤에 있는 참된 의미를 이해해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한니발은 알렉산더에게서, 스키피오는 한니발에게서, 모두 이전 시대의 사람을 통해서 한 단계 발전하고, 한 단계 나아갔듯이 나도 그렇게 할 수 있도록 해야겠다. 지금 막, 넓은 초원을 가르는 로마군의 광경이 내 머리 속에 펼쳐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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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후감>
1. 로마인 이야기
지난 30여년간의 노고와 행운에 힘입어 한국인의 살림살이는 몰라보게 좋아졌으며, 얼마 전까지만 하여도 우리는 어느 것에 내밀어도 떳떳할 수 있는 모습을 만들었으며, 이로 인한 자부심으로 뭉친 민족이었다. 그러나, 그 자부심도 얼마가지 않아, 사회 전반에 걸친 그릇된 사고 방식으로 인한 물질 만능주의, 부패의 만연은 인간의 진정한 모습을 찾는다는 것은 쓸모없는 일로 여겨지게 되었다. 과학 기술 일변도적 과거의 경제 성장에 대한 노력은 인간의 참 모습을 외면함으로, 그 바퀴가 어긋나게 되었고, 현재의 암흑 같은 경제체제를 탄생시켰으며, 나아가 우리는 ´moral haza
-rd´의 위협에 휩싸이게 되었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각 부분에 걸친 전문가들은 이러한 위기를 해소하자고 목청을 높이고 있으나, 그 근본적인 해결책 제시에는 충분함보다는 모자람이 더하다. 우리는 앞으로 달리는 것만이 지상과제였던 과거 30년간-당시에는 고성장의 달콤함을 제시한-의 법, 제도, 관행이나 관습을 뒤돌아 보아야할 필요성이 있다. 더불어 새로운 위기와 환경 전개에 적합한 의식 개혁이 뒷받침되어야 할 것이다. 어느 학자의 말처럼, 과거의 체제와 제도를 송두리째 뒤집어엎을 수 있는 새로운 국가의 건설이 요구되는 것일는지도 모른다.
이러한 점에서 ´로마인 이야기´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와 많다. 1000년이라는 긴 세월동안 세계를 지배하면서, 번영의 길을 달렸던 로마는 지난 몇 십년간의 짧은 경제 성장이 이제는 짐으로 전락해 버린 현대 한국 사회에 큰 교훈이 될 것이다. 더욱이 시오노 나나미가 서두에서 밝힌 것처럼, ´로마는 지성에서는 그리스인보다 못하고, 체력에서는 컬트인이나 게르만인보다 못하고, 기술력에서는 에트루리아인보다 못하고, 경제력에서는 카르타고인보다 뒤떨어지는 것이 로마인이고, 로마인은 이것을 인정한다´라는 말에서 우리는 과연 로마의 번영을 가져온 것은 무엇이며, 또한 끝나지 않을 듯 하던 그러한 로마에게 패망을 가져온 것은 무엇인가를 지켜보는 것이 단순한 타산지석만은 아닐 것이다.
역사는 과거의 이야기일 뿐이다. 지난 날의 사람들이 살았던 방식일 뿐이다. 더욱이, 수천년 전의 로마 사람들이 살았던 방식은 급변하는 과학 문명 속에서 물질적 풍요를 누리며 살아가는 우리에겐 너무도 나약한 방식이며, 뒤떨어졌다는 말로도 부족한 한심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보다 더 오래된 과거를 과거라고 일컫던 사람들, 그 과거의 사람들을 이제는 과거라고 일컫는 현재의 우리들은 과거의 사실들에 대해서 관심을 가졌고, 그 연구를 지속시켜왔다. 그 이유는 아마도 과거의 현실로부터 현재의 현실을 바라보게 되고, 문제 해결의 지침을 얻고자 하는 것일 것이다. 그것이 바로 역사의 의미이고, 역사의 역할인 것이다. 더욱이, 시대의 문명에 따른 끊임없이 변질되는 인간의 겉모양은 ´변화지 않는, 본질적인 인간 내부의 모습´을 간절히 요구했을 것이며, -그것은 역사를 통해서, 지속적으로 일치되는 인간들 사이의 갈등, 나라와 종교로 인한 분쟁 등과 같은 면에서 설명된다-역사는 바로 그러한 ´변하지 않는, 본질적인 인간 내부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다.
´로마인 이야기´에서 당시 로마인들의 흥망성쇠는 짧았던 우리의 과거를 뒤돌아보게 하고,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해 주는 좋은 사례가 될 수 있으리라.
2. 로마인 이야기 줄거리
´로마인 이야기 제 1권-로마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로마의 건국에서부터 로마의 왕정, 공화정에 이르는 로마 이해의 초석을 제공한다. 물론, 2권 이하 다른 ´로마인 이야기´에 비하면, 다소 흥미가 덜하고, 지루한 면도 없지 않다. 많은 독자들이 ´로마인 이야기´의 명성(?)에 힘입어, 굳은 결심으로 책을 구입해서, 그 명성을 욕하게 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기초 지식이 없는 상황에서 ´삼국지´이상의 등장 인물과 학문적 접근-혹자는 ´로마인 이야기´는 역사책이 아닌 단순한 이야기일 뿐이라고 할 지라도-은 이 굳은 결심의 독자를 1권부터 지치게 하는 또 하나의 이유다. 더불어, 한니발 전쟁과 같은 인간의 본성을 자극하는 맛도 없고, 케사르와 같이 영웅을 통한 대리 만족이 있는 것도 아니고, pax로마의 평온함이 있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시오노가 1000년의 로마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로마가 건국된 B.C 753부터 공화정으로 기틀의 시기를 반드시 알아두어야 할 것이다.
1) 로마의 건국과 왕정
모든 국가의 건국 신화가 그러하듯이 로마의 건국 신화 역시 인간과 신의 접목으로부터 시작된다. 군신(軍神) 마르스와 왕녀이자 무녀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쌍둥이가 로마의 건국자라고 소개하는 이 신화는 곰과 호랑이의 얘기부터 시작되는 한민족의 건국신화만큼 별나다. 다른 점이 있다면, 우리 민족의 신화는 인내의 苦(고)를 통해 인간으로 승화(?)된 곰과 하늘의 아들과의 합작품이 였다면, 그들은 神(신)을 섬기는 무녀와 하늘의 경호자와의 합작품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그들의 뿌리가 신적인 존재를 가진다는 우월감을 표시하는 것일 수도 있을 것이고, 그 뿌리를 창조한 것이 태초이래 인간이 지속적으로 섬기고 있는 神(신)이라는 것을 강조하여, 그들은 영원히 보호받을 수 있으리라는 기대도 있었을 것이다. 여하튼, 쌍둥이인 로물루스와 레무스는 7개의 언덕에서 권력 다툼으로 레무스는 도태되고, 로물루스가 로마의 건국하게 된 것이다(기원전 753년 4월). 여기서, 한 배에서 난 쌍둥이가 서로 죽고 죽이게 된 비인간적인 모습을 신화에 담은 로마인을 생각해 볼 필요성이 있다. 시오노는 ´누가 왕이 될 것인지를 결정하기가 어려웠다´를 그 이유로 삼고 있다. 다시 말해, 고대 사회에서 유일무이하게 제국을 건설한 로마인은 제국을 있게 한 공화정의 장점을 피력함과 동시에, 영원할 영광의 제국에서 제왕의 타당성을 강조하고자 했을는지도 모른다.
˝기원전 8세기부터 6세기에 이르는 시기에 포 강이남의 이탈리아 반도는 북쪽의 에트루리아와 남쪽의 그리스로 크게 양분되어, 로마는 이 양대 세력권 사이의 골짜기에서 태어났다.˝
로마는 위로는 에르투리아와 아래로는 그리스의 속국에 둘러싸여 서서히 성장해 나간다. 강력한 세력권에서 목숨부지가 어려웠을 듯한 로마는 에르투리아의 기술력과 경제력을, 그리스의 예술과 철학을 배워나간다. 물론, 시오노의 표현처럼, 농업국가의 로마는 그들의 미래의 적들에겐 관심 밖의 매력 없는 작은 땅덩어리에 불과했다는 것이 로마를 성장하게 된 기반이 되었을 것이다.
시오노는 ´건국의 왕 로물루스´를 시작으로 마지막 왕이었던 ´거만한 테크니우스´까지 7명의 왕에 대한 특징 및 역할을 소개하고 있다.
일곱 언덕에서 시작한 3천명의 라틴족의 우두머리인 1대왕 로물루스는 왕과 원로원, 민회의 3개 기관을 통해서 구정을 운영한다. 또한, 왕인 자신 역시 민회에서 선출되게 함으로써, 스스로에게 정당성을 부여한다. 인구 증가 및 병력 증강을 위하여 이민족 여인을 강탈하고, 전쟁을 통하여 영토를 확장한다. 초대왕다운 팽창정책을 실시한 로물루스와는 달리 2대왕 루마는 내실을 다지며, 공동체 구현의 역할을 담당하는 왕의 위치를 확립하고, 다신교의 종교개혁을 실행한다. 로마를 아는데는 종교가 중요한 사항이다. 그들의 신은 유대교와 기독교의 일신교가 아닌 그리스와 같은 다신교 체제였으며, 이 신의 역할은 일신교의 절대적인 존재도 아니며, 자기네의 윤리 도덕을 바로잡는 것도 아닌 자신들의 삶을 지켜주는 수호신이었다.
따라서, 수호신의 수가 많으면, 많을수록 자신들은 지켜줄 수 있는 무언가가 그들을 보호할 수 있다는 생각이었다. 또한, 루마는 법률을 정비하여, 별것 아닌 로마를 세계의 로마로 향해갈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한다. 내실을 기한 루마에 이은, 3대왕 틀루스는 사비지족인 알바롱가 공략을 통한 영역 확장, 4대왕 마르티우스는 다리를 건설하여 7개의 언덕을 요새화하였고, 이 길을 소금길로써 이용하였다. 틀루스와 마르티우스를 통해서 로마를 타민족과 구별할 수 있는 특징적인 사항을 발견할 수 있다. 첫 번째는 그들의 개방적인 사고를 통한 이민족의 흡수이고, 다른 하나는 한 걸음 차근차근 밟아나가는 느림보식, 하지만 한번 익힌 것은 확실히 다지기다.
˝그리스인인 플루타르코스는 ´패배자를 동화시키는 방식만큼 로마를 강대하게 만든 요인 없다´ 했다.˝
알바롱가 공략은 로마가 패민족에게 대해서 배타적이고, 탄압적이지 않은 관대한 정책을 펼침으로써, 그들에게 동화시켜 로마를 강성하게 만든 다는 것이며, 이것은 사비니족 이후의 로마의 변치 않는 전략으로 사용된다. 이것은 다음 왕인 타르퀴니우스에서 두드러진다. 그리스인 아버지와 에트루리아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인이었던 그는 자신의 운명을 개척하고자 로마로 들어왔으며, 타고난 피보다는 인간의 능력을 중시했던 로마에서 꽃을 피우게 된다. 이처럼, 로마인은 고대사에서 보여지는 신분 중심적 사회에서 개인 능력의 차이와 다양성을 존중했다.-이러한 점은 선왕들이 라틴계, 사비니계, 라틴계, 사비니계로 이어졌다는 점에서 그다지 놀랄 만한 사항은 아니다.-로마인의 개방성은 알맞은 시대에, 알맞은 인재에게, 알맞은 역할을 부여한 것이다. 타르퀴니우스와 세르비스에 이르는 시기에 로마는 전쟁에서의 승리, 간척사업, 대규모 토목 사업, 성벽의 구축, 신전의 확립 등 사회 전반에 걸친 인류 역사에 걸친 위대한 발전의 토대를 마련한다. 더불어, 세르비스는 군제개혁을 통하여, 세제 개혁, 선거제도의 개혁을 동행한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은 시오노의 말처럼 공화정으로의 이행을 요구하게 되는 것이었다. ˝ 공동체도 초기에는 중앙 집권적인 편이 효율적이다. 조직이 아직 여린 시기에 활력을 낭비하는 것은 치명상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내실과 외강을 두루 갖춘 로마는 ´거만한 왕 테크니우스´를 끝으로 왕정을 마감한다. 루크테리아라는 여인와 섹스투스의 등장으로 공화정의 장을 열게된 것이다.
2) 로마의 공화정과 발전
시오노 나나미는 제 2장에서 공화정으로 이행하는 로마의 정치체제, 로마 연합, 도로, 시민권에 대해서 설명하였고, 그리스의 아테네와 스파르타와의 관계를 통하여 보다 용이하게 로마를 이해하게 하였으며, 로마가 이탈리아 반도의 패권을 차지하게된 삼니움족과 이탈리아 반도 남부의 그리스와 대결을 설명하였다. 앞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독자의 굳은 결심을 꺾는 요소가 군데군데 있으나, 로마와 로마인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필수적인 요소일 것이다.
(1) 공화정 로마
브루투스가 시작을, 푸블리콜라가 끝을 로마 공화정은 이 책의 제목처럼 하루아침에 이루어 진 것은 아니었다. 왕정을 버리고, 공화정을 채택하게된 그들이 겪은 문제는 마지막 왕이었던 테크니우스와 에르트리아인과 관련이 깊다. 로마 성장의 스승이었던 어르트리아인은 공화정과 더불어 로마를 떠났으며, 이는 에르트리아인은 이젠 로마인에게는 적이었음을 뜻했고, 그들과 함께 떠난 기술은 국력의 약화와 부족들에 대한 권위의 추락으로 이어졌다. 느림보식 학습을 즐긴 로마인은 변혁으로 인한 또 다른 변혁 속에서 많은 시행 착오를 겪으면서 공화정을 이룩했다.
˝기원전 5세기 중엽에 이르러 로마가 비로소 접촉이라는 이름에 걸맞는 접촉을 가진 아테네와 스파르타를 중심으로 하여 당시의 그리스에 대해 이야기해 보고자 한다. 그리스를 언급하지 않고는 로마를 이야기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라는 글을 시작으로 시오노는 ´그리스의 이야기´ 시작한다. 모방을 즐긴(?) 개방성의 로마인은 아테네와 스파르타에서, 페르시아 전쟁에서 펠로폰네소스 전쟁에 이르는 동안 그리스의 성장과 몰락을 통하여, 그들의 발전을 틀을 마련한다. 아테네의 자유와 독립에 대한 열망, 스파르타의 질서와 군사력, 실질강경주의를 배웠고, 페르시아 전쟁과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 국력 합일의 중요성과 국력 분산의 무모함을 배웠다. 또한, 그리스의 배타적인 정책에서 로마의 타민족 수용의 우수성을 발전시켰고, 패권 스파르타의 몰락에서 군사력 중심만의 사회에서 겪게 될 문제점과 정신 문화의 중요성을 인식하였을 것이다. 그리스 시찰단이 보고온 페리클레스 시대의 융성은 그들에게 자극을 주기에 충분하였을 것이다. 그 뒤로 로마는 정치 개혁, 로마 연합, 귀족과 평민간의 갈등, 시민권 확립의 사업을 이행해 간다.
로마의 정치 체제는 왕정, 귀족정과 민주정의 세 가지를 혼합한 정치체제였다. 그 어느 정치체제의 극단을 취하지 않고, 각각의 특성 중 자신들의 삶에 적합하게 적용한다. 이러한 효율성이 높은 정치체제를 완성하게 된 것 역시, 어느 순간 이루어진 것이 아니고, 오랜 시간동안 자신들을 돌아보고, 타민족의 장단점을 통해서, 때로는 악순환을 겪으면서 이룩해낸 것이다. 그 구체적인 내용을 살펴보면, 왕 대신 집정관을 세우고, 원로원과 민회가 삼박자를 맞추었고, 과두정치의 체제를 채택하였다. 시오노는 집정관, 원로원, 민회뿐만 아니라, 독재관, 호민관, 기병장관, 재무관 등 공화정 로마의 정치체제에 대해 전반적으로 자세하게 다루었으나, 여기서는 생략하고, 로마 정치체제의 중요한 특징 몇 가지를 말해보자.
로마 정치체제의 특성은 개방성과 명예심이다. 이것은 로마를 성장하게 한 몇 가지 요인 중에서 상당 부분을 차지한다. ˝로마는 귀족 정치가 아니라 문자 그대로의 과두정치 체제가 된다. 귀족 정치란 귀족으로 태어난 소수의 사람이 다수를 다스리는 것이지만, 과두 정치는 소수의 사람이 다수를 다스리는 점은 마친가지일지라도 그 소수의 혈통을 문제삼지는 않는다.˝ 시오노의 말처럼, 로마는 왕정시대부터 이어온 인간 능력과 다양성의 존중을 공화정에 이르러서도 지속했던 것이다. 이러한 정책은 왕정시대에는 타르퀴니우스로, 공화정시대에는 과두정치로 그 결실을 맺어, 로마가 속국을 흡수하는 막강한 전략의 기본이 되었던 것이다. ´ 로마의 귀족이 가지고 있던 힘의 기반은 토지가 인간이었다´는 것은 귀족과 평민간의 결속력을 설명하는 것이다. 로마의 사회 제도는 파트로네스와 클리엔테스의 관계로 이루어진다. 귀족인 파트로네스는 경제적으로 그들의 클리엔테스(평민)를 돌봐주었고, 반대로 클리엔테스는 파트로네스에게 정치적인 기반을 제공한 것이다. 이들의 관계는 명예와 신의를 중심으로 어떠한 경우에는 깨질 수 없는 사항이었다. 시오노가들은 케사르와 폼페이우스의 대결에서 라비엔누스가 취한 행동은 좋은 예가 될 것이다.
혹자는 로마의 영광은 카르다고와의 3차에 걸친 포에니 전쟁에 기인한다고 한다. 이는 위기를 기회로 전환시키는 로마인의 위대한 기질을 말하는 것이며, 실제로 그들은 매번 역경과 고난을 겪은 후 성장의 발판을 마련한다. 1권에서 제시한 ´켈트족의 침입´과 ´삼니움족´과의 전투는 그 좋은 예라고 할 수 있다. 기원전 6세기경부터 컬트족은 남하하기 시작하면서, 기원전 390년 로마를 침략한다. 켈트족과의 전투 후 로마는 공화정 설립을 위한 토대마저 무너져버린다. 컬트족은 로마인에게 물질적인 피해뿐만 아니라, 명예와 신의를 중시한 로마인의 정신적인 면에 큰 타격을 준다. 켈트족의 침입 후 40년간 로마는 복구를 위해서, 독재관을 선출하고, 수습에 전열을 기울이면서 치욕에 대한 스스로의 반성과 피해 이전 이상의 성장을 준비한다. 삼니비족과의 전투 역시 같은 결과를 가져온다. 국력이 신장된 로마가 이탈리아 반도의 남쪽으로 눈을 돌리게 되면서, 삼니비족과의 전투는 불가피하게 되었다. 결과, 로마는 치욕적인 패배를 안고 돌아오지만, ´승전보다는 패전을 오래 기억하는 민족´이었던 로마는 불명예를 훗날 씻게 된다. 패배를 통해서, 그들 자신이 가지고 있던 약점과 적군의 장점을 파악하여, 모방의 민족인 로마인은 패배를 패배가 아닌 보다 큰 승리를 위한 준비물로 삼았던 것이다. 또한, 로마인 특유의 ´천천히, 그러나 착실하게´의 방식을 고수하여, 성장의 발판을 마련한 것이다.
3. 교훈
로마와 로마인에 대해 고대 타민족과는 특이한 면을 몇 가지 발견할 수 있다. 이러한 특징은 로마를 강성하게 만든 것이며, 고대 사회 뿐만 아니라, 현대 사회까지도 로마를 연구하고 본받고자 하는 점이다.
현재 한국 사회가 겪고 있는 경제 문제는 사회 전반에 걸친 인격의 몰락까지 이어지고 있다. 사회 각층의 우려처럼 앞으로 다가올 ´도덕적 위험´은 우리 사회를 뒤흔들어놓기에 충분할 것이다. 이에 우리는 현재의 위기 속에서 과거를 돌아보고, 그 문제점의 해결책을 파악해야 한다. 마치 로마가 이민족의 침입을 겪은 후 성장하게 되는 것과 같은 맥락일 것이다.
고대의 로마와 로마인을 통해서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는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을 것이다. 그 중 몇 가지 사항을 중점으로 말해 보고자 한다.
1) 개방성
앞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로마는 이민족 정복, 정치 체제, 인재 등용 등에서 개방적인 면을 보여 준다. 로마인들은 진정한 의미에서 최초의 세계인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들의 개방성은 정복민들에 대한 시민권 부여와 정복민들에게 거의 완전에 ?운 자치를 허용하는 것을 보면 된다. 자유와 독립을 존중한 아테네의 경우 이러한 점에서 로마와는 비교할 수 없다. 일례로, 그리스의 정신 문화에 혁혁한 공을 세운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민족이라는 이유로 배척되어 이국으로 도망치게 된다. 아무리 오래 살아도, 아무리 많은 공을 세웠더라도 배타적인 그리스인에게 이민족은 이민족이었을 뿐이다. 그러나, 로마는 어떠했는가? 로마에게 속국은 단순한 식민지의 개념이 아니었다. 로마 연합이라는 일종의 연방주의 개념을 도입해서 로마 연합의 동맹국, 라틴동맹의 가맹국 등의 거대한 준 연방국가를 건설하였으며, 속국민에게는 시민권을 부여하여 로마에 흡수되는 로마인을 만들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로마인들의 삶에 있어서도 개방성은 항상 배움에 대해 인색하지 않았다는 것으로 돋보인다. 에르투리아인에게, 그리스인에게, 심지어는 그들에게 굴욕과 치욕을 가져다 준 적국에게도 배운 것이 바로 로마인이다. 그러나, 현재의 한국 사회는 어떠한가? 우리의 역사를 돌이켜 보건대 폐쇄적이고 수동적으로 처신했던 시절은 우리에게 암울했던 시기였을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몇백 년이 지난 지금에도 닫힌 가슴을 열어줄 시기는 되지 않은 듯하다. 국토의 개념, 울타리가 보호막으로 작용된다는 것은 지나간 추억이다. 헛된 망상에 불과하다. 세계가 한 덩어리로 움직이는 시대에 나의 것, 우리의 것만을 지키자고 힘쓰는 것은 한심한 발버둥일 뿐이다. 열린 마음으로 다른 국가와 민족을 바라보아야 하고, 이로써 우리가 갖추어야할 것을 배워야 한다. 그것이 바로 이 시대를 살아가는 방법이고, 고대 사회부터 내려온 올바른 삶의 방식이며, 너무도 소중한 우리의 국가와 민족을 더욱 소중하게 지킬 수 있는 길일 것이다.
2) 명예와 신의
시오노 나나미는 그녀가 예로 들은 몇 명의 학자와 더불어, 로마의 성공 이유를 정신적인 측면에서 찾지 않는다. 그녀는 인간의 정신적 측면은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것이므로, 여기에 중요한 의미를 부여할 가치는 없으며, 법과 제도, 체제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그러나, 로마사를 다룬 많은 학자들이 로마인의 정신적 자본을 강조한 데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을 것이다.
어떤 사회라도 계속적인 성장을 위해서는 도로나 항만 같은 물질적인 기반뿐만 아니라 정신적인 기반이 필요하다. 역사에서도 물질적인 힘만을 내세우며 지속적으로 발전한 국가를 찾는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펠로폰네소스 전쟁이후의 패권 스파르타가 그 좋은 예일 것이다. 이에 반해 로마인들이 가지고 있던 정신적인 토대는 로마가 많은 민족과 종교를 동화하면서 세계 국가로 발돋움하는데 큰 역할을 하게 된다. 정신적인 토대라 함은 앞에서 말한 것처럼, ´로마인 이야기´에 전반적으로 흐르는 명예와 신의일 것이다. 로마사회의 구성원들은 명예와 용기를 최고의 덕목으로 여기고. 명예를 잃어버린다는 사실은 전부를 잃어버리는 것으로 여겼다. 또한, 실추된 명예의 회복을 위해서 ´보고 싶지 않은 것도 보는´ 노력을 잃지 않은 것이 바로 로마인이다. 실례로, 앞에서 들은 ´켈트족의 침입´과 ´삼니비족과의 전투´후의 로마를 생각해보면 적당할 것이다.
로마 사회의 특이한 사회제도였던 ´파트로네스´와 ´클리렌테스´에서 그들 사회를 뒷받침했던 ´신의´를 들쳐볼 수 있다. 로마 역사를 보면 귀족과 평민간의 관계는 권력 쟁취의 대립의 관계만은 아니었다. 귀족은 평민에게 경제적이고 가정적인 문제의 보호자로서, 평민은 귀족의 정치적인 출세를 위한 헌신적인 지원자로서 역할을 담당했다. 이러한 관계는 어느 상황하에서도 깨지기 않고, 로마사회의 정신적인 기반이었다.
로마에게 요구되었던 정신적 덕목이 ´명예와 신의´였다면, 현대의 한국 사회에 필요한 정신적 덕목은 과연 무엇인가? 한국은 자본주의와 민주주의를 틀로 구성된 사회이다. 새로운 생산 방식, 새로운 아이디어를 이용해서 부를 축적해 가는 자에 대한 존중, 계약과 교환을 통한 부의 축적에 대한 이해, 자신의 일을 가급적 스스로가 처리하고 가능한 한 정부에 대한 의존심을 줄여나가는 자립심 둥이 있을 것이다. 현대 한국의 경제체제를 ´비뚤어진 유교 자본주의´라고 부르며, 가진 자에 대한 무조건적이 배타심, 가진 자의 덕을 갖추지 못한 협소함을 비난하는 소리가 지속되어 왔다. 시장경제 체제를 중심으로 한 자본주의 사회에 귀족과 평민은 ´가진 자와 못 가진 자´로 구분할 수 있다. 경제의 급성장 속에서 우리 사회의 이 두 계급은 일치될 수 없는 극단을 걸어왔으며, 그들의 ´명예와 신의´도 저버린 지 오래다. 가진 자는 더 많이 갖기 위해 못 가진 자들을 핍박하고, 못 가진 자는 가진 자들이 자신들의 행복을 가져간 것으로 취급하고 있다. 이제는 로마 귀족과 평민사이의 정신적 교감을 배워야 할 때이다. 그들의 서로 돕고 살기의 전략을 우리 가슴속에 심어야 할 때이다.
3) 역사로부터 배우자!
서양 문화와 역사를 집으로 표현한다면, 양대 주춧돌은 그리스와 로마임에 틀림없다. 그리스의 성장은 로마의 성장에 지대한 공헌을 했으며, 패망 역시 로마 성장에 공헌을 했다. 이것은 개방성을 바탕으로 타민족을 자유롭게 흡수했던 로마였기에 가능했던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리스의 전성시대인 페리클레스 시대에 로마는 왕정에서 공화정으로의 이행으로 많은 문제에 처하게 되었다. 이에 로마는 그리스 시찰단을 파견하여, 선진 문물의 학습을 도모한 것이다. ˝절정기에 있는 나라를 시찰하고도 그 나라를 흉내내지 않는 것은 보통 재주가 아니다.˝라는 시오노의 말처럼, 로마는 아테네의 우수성에 감탄하면서도 단순한 ´복사´가 아닌, 자신들의 체질에 적합하게 흡수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그들은 과거의 사실로부터 현재의 자신들을 진보시키는 방법을 알고 있던 것이다.
과거라는 것이, 그 구성원의 겉모습만 변할 뿐 본질적인 내부는 바뀌지 않기에 과거와 엇비슷한 경험을 다시 겪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역사가 본연의 역할을 충실히 하기 위해서는 비슷한 역사적 궤적을 면밀히 조사하고, 비교하는 가운데 배워야 할 것, 그리고 배우지 말아야 할 것을 가려내야 한다. 이러한 점에서 우리의 한국 사회를 한번 돌아볼 필요성이 있다. 우리는 과연 역사로부터 교훈을 얻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가? 과거의 경험을 소중히 여기고 있는가? 역사로부터의 배움에 인색하지는 않는가?
때는 바야흐로 과학문명의 시대이고, 물질 만능주의의 시대이다. 합리성, 과학화, 실용성이라는 이름하에 인간의 인격, 고양, 덕성은 뒷전으로 밀쳐진지 오래이며, 인격인보다는 전문인이 선호되고, 인문학보다는 실용학문이 중시되는 풍조다. 지난 경제성장기의 풍토였고, 현재 이 사회에 만연되어 있는 풍토이다. 이것이 나쁘고, 그르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실용의 대표격인 경제의 파탄으로 야기되는 도덕적 해이는 무엇으로 설명이 되어야 하는가? 인간의 겉모양을 살찌우기에 바빴던 우리는 진정으로 중시하여야할 속모양다지기에는 여유가 없었던 것이다. 온갖 병으로 부실하면서, 포동포동하게 살찐 모습이 바로 우리였고, 어쩌면 속으로 곪은 것을 애써 감추려 겉모양 갖추기에 충실했던 우리 자신이었는지도 모른다. 이제는 우리에게 더 이상 낭비할 시간이 남아있지 않다. 앞으로 달려가야 할 만큼 뒤를 돌아보고 반성하고, 고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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