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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불망비 |  | |
| 오정희 - <불망비>
내가 알고 있는 아버지 세대의 고향은 꿈속에서도 그리워하고 얼큰하게 취했을 때 서글픈 가락 속에 등장하는 마지막 안주와 같은 것이었고, 객지를 떠도는 현대인들에겐 복잡한 귀성열차 속에서도 선물 꾸러미를 안고 찾아가는 설렘의 대상이리라.
그러나 요즘 젊은 세대에게 고향은 단지 이제 단순한 ´본적지´라는 의미 이상은 아니다. 그들에게 고향은 그다지 애틋하지도 심각하지도 않으며 그리운 대상도 아니요, 더구나 마음의 영원한 안식처도 되지 못한다. 나도 그렇게 고향의 존재를 제대로 실감하지 못하며 자란 세대에 속한다.
오정희의 <불망비>는 고향을 떠나 낯선 타관을 떠도는 자들의 슬픈 얘기를 전하고 있다. 그것은 개인의 의지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이 역사라는 거대한 수레바퀴 속에서 뿌리 뽑힌, 고향을 박탈당한 자들의 길고 긴 얘기이다. 그러므로 <불망비>는 ´가족사´의 서술이라는 작가의 사적인 동기를 넘어, 이 땅의 역사 자체에 대한 조명과 맞물려 있다고 할 것이다.
보통학교 2학년인 어린 소년 현도의 눈을 통한 세계란 그렇게 뿌리 뽑힌 자들의 떠도는 세월에 불과한 것이다. 진씨 성을 가진 현도의 조상은 먼 옛날 나라에 죄를 지은 중국인이 소금배를 타고 바다 건너 도망질쳐 와 이 땅에 살기 시작한 이방인이었으며, 그의 조부 또한 임오년 군란으로 증조부를 잃고 이 고장에 들어온 실향민이었던 것이다. 그의 유년 시절의 기억으로 남아 있는, 칼 찬 일본 순사에게 매를 맞으며 개처럼 끌려가던 청국인 늙은이나 유랑 생활을 하는 러시아인 집시 가족들 역시 이국 땅으로 흘러든 실향민이다. 징병으로 끌려갔다가 돌아온 아편쟁이 삼촌은 젊음과 꿈이라는 정신의 고향을 상실한 가혹한 역사의 피해자이다.
같은 반 급우인 신짱의 가족 역시도 역사의 가해자로 이 땅에 들어와 있기는 하지만, 그들 역시 지치고 피곤한 실향민이며 피해자에 불과하다. 패전으로 전세가 역전되어 학대당하며 해령을 떠나 본국으로 돌아가는 일본 여자들의 박박 깎은 머리와 죄수처럼 보이는 절망적인 침묵 속에서 바로 그러한 실향의 세월을 읽는다.
그러나 종전과 해방은 잃어버린 고향을 다시 되찾아 주었던가? 불행히도 역사는 또다시 실향의 세월을 재생산해 낸다. 해방이 되고 들어온 로스케들은 어떠했던가. 승리자의 자랑스러운 면류관, 시혜자로서의 넉넉함을 갖춘 자들이 아니라, 익어 가는 수숫대를 꺾어 씹고 옥수수를 잘라 갉아먹는 초라하고 지친 실향민에 불과한 인물들이었다. 그 상황은 남한에 진주한 미군들에게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이어서 반탁운동이 찬탁운동으로 바뀌고, 수상한 기운이 사회를 감돌아 수탈자, 민족반역자의 명단에 든 상황에서, 고향을 떠나 멀리 간 적이 없던 현도네 가족은 드디어 고향을 떠나야 했던 것이다.
울부짖는 시누이와 시동생을 매정하고도 가혹하게 떼어놓고 남쪽으로 향하는 조각배에 몸을 실은 현도 어머니가 다시 돌아올 수 없다는 고향을 바라보는 심정은 바로 이 소설의 모든 실향민들의 마음에 다름 아니다. 바람 따라 점점 거칠어 가는 물결이, 그네들을 고향으로부터 먼 바다로 밀어내는 거부의 몸짓에서, 환각으로 보는 시누이의 연두빛 고운 처네 위로 솟아 있는, 등에 업힌 아이의 검고 무성한 머리털이 눈이 부시는 것은 두고 온 고향의 아름다움의 상실이며, 또한 어느 청솔의 푸르름이 그 빛을 당하랴 라는 표현처럼 고향의 푸르름의 상실인 것이다.
이 같은 처절하고도 절망적인 실향의 역사에서도 작가는 희망적인 시선을 보내고 있기는 하다. 즉, 낯선 땅에서 첫여름에 태어날 아이로 상징되는 민중의 끈질긴 생명력이 그것이다. 이 생명력은 유래나 내용, 그 연원을 알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비석거리라는 친근하고 습관적인 부름에서, 네 거리 귀퉁이에 별 뜻 없이 서 있는 초라한 비석의 모습으로 상징되는 ´불망비´로서 역사에 대한 속죄의 뜻이기도 하고, 끈질긴 민중의 생명력에 대한 기림의 뜻이기도 하다. 그것은 또한 어린 현도의 기억 속에는 고향의 영원한 모습으로 살아 남을 아름다움이며, 말타기 놀이를 하던 인류의 따뜻한 공동체의 모습이기도 한 것이다.
책을 읽고 있는 동안 나는 내 자신이 얼마나 무지한가를 깨달았다. 내가 알고 있는 우리 민족의 근대사는 다만 책을 통해 익숙해진 어설픈 지식일 뿐이었다. 몇 줄의 말로 표현된 단순한 암기거리 이상은 아닌 것이다. 그 허상에 집착하여 정지된 상태로 머물러 있었던 내 자신이 부끄럽다.
소설 <불망비>는 역사적 한 시점을 살았던 사람들의, 나아가 현재 우리 자신의 못생긴 자화상을 그리고 있다. 우리는 그 못생긴 자화상을 통해 과거를 반성하고 현재를 평가하며 미래를 계획하게 된다. 과연 근대사라는 거울은 못생긴 우리 모습 외에 무엇을 담고 있을까. 혹시 우리는 불망비의 존재조차 잊고 있거나 설형문자와도 같은, 해독할 수 없는 기호만을 발견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우리의 근대사는 단순한 아픔의 문제가 아니다. 부끄러움만은 더더욱 아니다. 현도가 느꼈던 것처럼 무언가 뜨거운 덩어리가 가슴을 치밀고 올라왔던 바로 그 때의 자각이어야 한다.
해방 전후의 수많은 모순들이 아직도 잔존한 채 외적으로는 식민 정책을 대신한 선진 자본주의의 경제적 압력과, 내적으로는 정치, 사회적 혼란 속에서 서툰 행진을 계속하고 있는 우리 스스로의 모습을 눈부신 경제 성장, 비교 우위로서의 발전 논리로 망각해서는 안 되겠다.
또한 아직도 들려오는 시누이의 울부짖음에 후회하고 통곡하는 것만이 우리의 몫은 아니다. 이런 관점에서 이 소설은 우리 모두에게 과거의 아픔에 대한 동정과 이해의 차원을 넘어 역사에 대한 과제를 제기하고 있다.
근대사로부터 오늘에 이르는 우리 민족의 삶이 또 하나의 불망비로 남겨져 어느 날 아직도 그 곳에 비석이 있다는 사실에 문득 ˝아, 그랬었지!˝ 하고 느껴지는 비석이 견디어 낸, 긴 시간이 획득한 공간성, 추상성을 갖게 되길 바란다.
by http://www.edu.co.kr/kwank9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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