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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랑하는 나의 연사들 |  | |
| 고원정 : <사랑하는 나의 연사들>
출판사 : 현대문학 / 발행일 : 1993/6 / 쪽수 : 322
인간과 권력에의 탐구, 그 의식의 미장생
고원정의 <나의 사랑하는 연사들>(현대문학사,1993)이란 장편소설이 있다. 고원정이 92년 여름부터 93년 봄까지 [월간 현대문학]에 연재하여 문단의 호평을 받아 낸 13개의 단락으로 이루어진 연작 소설이다. 이 연작소설에 대한 분석에 앞서 우리는 작가 고원정이 한국 문학계에서 가지고 있는 위상을 살펴보기로 하자.
1956년 제주도 하귀에서 태어난 고원정은 제주시에 위치한 제일고등학교에서 담임으로 있던 현길언씨(소설가, 현 한양대 국문학과 교수)의 속을 무던히도 썩히며 반항아로 성장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렇게 공부해서 대학은 어떻게 갈거냐는 주위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경희대 국문과에 문예장학생으로 입학함으로서 주위의 걱정을 불식시킨다. 학교를 졸업한 그는 (주)대우에 입사하여 2년간 근무한 뒤, 1985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거인의 잠>으로 문단에 등단한다. 이 후 고원정은 권력과 인간의 문제에 천착하며 그만의 독특한 문학적 행보를 걷고 있다. 그에게 있어 권력이란 최초의 인류인 호모사피엔스에서부터 시작되었다고, 생각하고 있는 듯 하다. 인간이란, 그리고 지상의 모든 생물들의 관계를 규정 짓는 것은 결국 권력의 문제로 귀결되는 것이라고 세계를 파악하고 있다.
고원정 문학의 화두는 권력의 문제이며 요컨대 모든 문제의 원천은 권력에서부터 비롯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기원 전, 그리이스의 철학자 소크라테스에 의하면 ˝인간은 이 사회에 태어난 그 순간부터 지배하느냐? 지배당하느냐?는 선택을 강요받고 있다.˝라고 말했다고 그의 제자였던 플라톤은 전하고 있다. 여기에서 알 수 있듯이 기원전에도 그리고 기원 후에도 권력은 인간의 일상을 지배하고 있었던 것이다. 권력에 대한 지치지 않는 탐구 정신과 인간의 밑바탕에 깔린 보편적인 권력에 대한 욕망을, 그리고 어떤 가감도 없는 벌거벗은 인간의 모습을 제대로 그릴 수 있는 작가는 문학의 사회적 기능을 강조했던 불운의 헝가리인 게오르규 루카치(막시즘계열의 문학비평가) 이후, 단연 고원정이 돋보인다고 할 수 있다. 적어도 리얼리즘의 테두리 안에서 말이다. 고원정이 선택한 방법론은 사실적인 글쓰기가 무엇인가에 대한 답변이 될 수 있을 만큼 강철같은 논리의 꼼꼼함과 치밀한 복선이 깔려 있다. 요컨대 그의 언어는 분석적이며 다중적인 의미의 포착이 가능하다. 그런 반면 그의 문장에는 빛나는 도약도, 꿈꾸는 서정도 없다.
이를테면 고원정이 뿌리내린 문학의 대지는 보드랍다거나 따뜻함이 아닌 금속성의 차거움(냉철함)이 존재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원정의 문체에는 독자로 하여금 책에 빨려 들어가게 하는 어떤 마력이 존재하고 있다. 그리고 그 마력은 그의 문장이 인간의 감정에 호소하는 것이 아니라 이성이 가지고 있는 지혜를 설득시키고 이해시키는 것이기 때문에 더욱 소중하다. 현암사에서 발간한 9권 짜리 대하소설 <빙벽>을 비롯한 일련의 작품 <거인의 잠>(첫 소설집/현암사.1988), <칼 한 자루의 사상>(두 번째 소설집/세계사.1990)을 관통하고 있는 문학적 화두는 서두에서 밝혔듯이 권력이 지니고 있는 속성을 재조명하는 작업이며, 여기에서 파생되는 흔들리는 인간의 심리상태를 분석하고 형상화내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들 자신의 우울한 초상이기도 하다. 고원정에게 권력의 세계란 어떤 세계인가? 그 세계는 힘과 힘이 맞부딪쳐 충돌하고 부서지며 깨어지는, 힘이 지배하는 세계이다.
미국의 MIT 대학의 경제학 교수로 있는 레스터 서로우(Lester Therow)의 지적대로 그 세계는 일종의 제로섬게임이다. 게임의 법칙은 물리적인 힘의 우위가 모든 것을 점유한다는 것이다. 우리의 의식 세계도 여기에서 자유로울 수 없을 만큼 압도적이다. 그러나 영원한 승자는 없다. 승리자의 얼굴만 매번 바뀔 뿐. 억압하는 자가 있으면 억압당하는 자가 있기 마련이다. 그리고 그 억압의 출발점은 권력이며 결국 그 권력을 가지고 있느냐 또는 그렇지 못하느냐로 귀결된다. 이 권력의 알레고리를 가지고 고원정은 ´정인호´란 일인칭 시점으로 이야기의 얼개를 풀어 나아간다. 초등학교 반장선거를 치르면서 시작된 권력에의 추구는 고등학교 그리고 대학교의 총학생회장 선거를 거치면서 조금씩 권력의 본질을 깨달아가며 끊임없는 회의에 시달린다. 그것은 권력에의 욕구가 끝이 없음을 느끼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하여 ´나´는 권력으로부터 초연 하려 하지만 이미 ´나´는 권력내부에 너무 깊이 개입해 있음으로 해서, 주변사람들과 상황이 그를 놓아주지 않는다.(주인공 정인호가 알아차린 권력의 본질은 폭력이었다는 암시가 곳곳에 숨어있다는 것을 예민한 독자들은 이미 알아차렸을 것이다.) 소설의 마지막 부분은 그의 딸이 초등학교에 들어가서 반장선거에 나가는 것으로 마무리하고 있다. 이것은 결국 인간의 본질이란 무엇인가? 에 대한 물음임과 동시에, 그렇다면 사람이란 무엇을 추구하고 살아야 하는가? 라는 물음을 함께 던지고 있다.
「내가 맨 처음 당황한 것은 막 입학식이 끝나고 난 직후였다.
그가 바로 결정권자였다. 절대자였다. 선생님은 곧 나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다른 아이들의 얼굴도 차례차례 헤어보고 있었다. 나는 느낄 수 있었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내가 선생님의 뇌리에 강하게 인상을 남겼으리란 것을. 나의 표정만 보고도 선생님은, 내가 이미 한글을 깨우쳤으며 감탄할 만큼 머리가 빨리 돌아가며, 이미 동네의 골목대장을 역임했으며, 무엇보다도 선생님의 지시를 충실히 받들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으리라고. 이윽고 한 차례 훑어보고 난 선생님의 시선이 엉뚱한 곳을 향하고 있었다.
˝너 이름이 뭐지˝
짜고 하는 거다 하고 나는 소리소리 지르고 싶었다.
˝박시봉입니다.˝
그런 이름으로 급장을 해서는 안 된다고 나는 손들어 말하고 싶었다.
˝우선 내가 임시급장을 해라.˝
우선, 임시......그 두 마디가 나를 그나마 안심시켜 주었다.」
이 소설의 도입부는 위의 첫 문장으로 시작되고 있으며 그 다음 문장은 반장을 임명할 수 있는 권력을 가지고 있는 담임선생님을 애타게 바라보고 있는 주인공의 심리상태를 날카롭게 포착하고 있다. 여기에 이 소설의 핵심이 다 들어있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권력을 향한 첫 발걸음은 초등학교 1학년에서부터 시작된다. 왜냐하면 그 권력은 학교라는 공인된 권력이며 그 권력이 쓰고 있는 폭력 또한 공인된 폭력이기 때문에 동네 골목대장과는 비교가 될 수 없다. 그만큼 공인된 권력의 힘은 무한하다. 그리고 그 무한한 권력의 폐해도 심각하다. 여기서 공인된 권력은 사법부를 비롯한 국가권력의 알레고리이며 이것이 바로 작가가 말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첫 번째 권력의 관문에서부터 장애물에 부딪히고 만다. 그 장애물은 바로 돈을 밝히는 담임선생님이다. 그러나 권력의 욕망에 사로잡힌 어린 주인공은 여기에서 멈추지 않는다. 주인공은 있지도 않은 토끼를 미끼로 급우들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이고, 결국 1학기 반장선거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그리고 곧 파국이 그를 덮치고................
성장소설의 범주에 포함할 수 있는, 13개의 단락(1962년 3월∼1993년 3월)으로 구성되어진 연작소설 형식의 <나의 사랑하는 연사들>은 서사적 구조가 주는 안정감과 함께 극적 반전의 긴장감을 부여하는 힘있는 문체(어떻게 보면 약간 건조한 면이 있지만)와 치밀하게 짜여진 구도가 이 책의 강점이며, 더 나아가 고원정 문학의 원형질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나의 사랑하는 연사들>이란 장편소설은 막히지 않고 쉽게 읽힌다는-그러니까 지루하지 않고 재미있다는-미덕이 존재한다.(독자가 지루하게 느끼지 않게 쓴다는 것은 생각보다 어렵다. 그리고 소설적 재미를 잃지 않으면서도 진지한 주제의식을 글에 담는다는 것은 절대로 쉽지 않다.) 한 권의 좋은 장편소설이 갖는 무게는 한 사람의 인생의 무게에 견줄 수 있다는 것이, 필자의 주관적인 생각이며 이것이 하나의 믿음으로 남아 있다. 사실 한국 문학계에서 장편소설이 가지고 있는 위상은 그다지 크다고 볼 수 없는 것이다. 90년대 들어와서야 장편소설이 활발하게 창작되면서 그 영역이 확대되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이 작품은 장편소설의 영역이 어떻게 문단에서 자리매김될 수 있는지의 패러다임(분석틀)을 제공하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다.
사실 <나의 사랑하는 연사들>이란 장편소설을 읽으면서 필자의 머리에서 떠나지 않던 생각은 과연 비평가의 역할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자괴심이었다. 비평가의 몫이란 사장되어 있는 좋은 문학작품을 발굴하는 것이 아닐까? 란 생각을 다시 해보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비평의 대상이 되기에 충분한 이유가 있다. 뿐만 아니라 이 장편소설은 문학성에 걸맞는 상업성(재미라는 측면)도 가지고 있었기에 많은 사람들이 출판시장에서 성공할 것이라 예상했다. 하지만 결과는 현대문학사의 재정적자를 확대시켰을 뿐이다. 초판 2쇄(약 6천부)가 <나의 사랑하는 연사들>이란, 보기 드물게 상업성과 문학성을 갖췄다는, 문단의 평가를 얻어낸 장편소설의 인쇄 부수의 전부라는 것이, 한국 출판시장의 현주소를 대변하고 있다는 생각을 필자로 하여금 하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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