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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의 문
이청준 : <자유의 문>

출판사 : 열림원 / 출판일 : 1998년 10월 24일 / 페이지수 : 290

이청준의 자유의 문은 종교를 생각하는 사람들이 한 번쯤은 읽어보아야 할 책입니다. 종교는 사람들에게 이 현실의 비참함을 극복할 수 있는 길을 제시하지만, 그러나 그 순기능 못지 않게 역기능도 만만치 않습니다. 그리고 유감스럽지만 이 땅에 존재하는 대부분의 종교는 이미 종교 본연의 길을 잃어버린 지 오래입니다.
이는 비단 이단이라 이름하는 종파의 문제가 아니며, 또 기독교가 우상이라 멸시하는 불교나 힌두교 등의 문제도 아닙니다. 바로 정통 기독교의 문제입니다. 이 땅의 기독교는 더 이상 예수의 가르침을 전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더 이상 실존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이문열이 <사람의 아들>에서 갈파했던 ´믿기 위한 미신´의 대상이거나, 아니면 칼 마르크스가 얘기한 바 ´인민의 아편´으로 전락한 지 오랩니다.
이청준은 자유의 문을 통하여, 이런 기독교의 모습을 통렬하게 공박합니다. 하나님을 믿고, 예수의 가르침을 따른다는 사람들이 그 하나님과 예수의 말씀 때문에 살인하고, 거짓 증거하는 모순을 질타하지요. 이 문제는 소설의 주인공 백상도에게만 국한된 문제는 아닙니다. 오늘날 모든 기독교인들의 문제이기도 하지요.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을 알고, 또 나아가서는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씀을 알지만, 그들의 현실은 언제나 미움으로 나아가고 살인으로 결과 맺는다는 무서운 현실 인식입니다.
그러나 저자의 이런 날카로운 현실 감각은 저자 자신의 독창적인 생각은 아니지요. 그것은 사도 바울이 이미 로마서 7장에서 예리하게 분석한 바 있습니다. 선을 행하고자 하지만, 언제나 악을 행하고 마는 인간의 무능.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의 지적은 여전히 의미가 있습니다. 로마서를 성경으로 받들어 모시는 오늘날의 기독교인들 역시 여전히 백상도 같은 싸움을 하기 때문이지요.
그러면 오늘날 기독교가 왜 이 모양이 되었는가? 이 물음에 대한 대답을 하기 위하여 저자는 「절대선」이라는 명제를 들고 나옵니다. 기독교의 병폐는 성경이 절대선이라는 데 있다는 거지요. 이 말은 하나님의 절대성을 공격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이 절대자이기 때문에 기독교가 이 모양이 되었다는 논리입니다. 이해하기 쉽지 않지요. 그러나 저는 저자의 이런 논리에 동의합니다.
우리는 ´절대자´ 하나님으로부터 벗어나야 합니다. 이 말은 하나님이 절대자가 아니라는 얘기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절대자가 아니라면 그는 더 이상 하나님일 수 없겠지요. 하나님은 절대 그 자체입니다. 문제는 우리가 절대자가 아니라는 데 있습니다.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인 게 분명하다면 그것은 따라서 절대자의 말씀이고, 절대적인 진리로 귀결됩니다. 그러면 백상도의 주장이 옳습니다. 즉 우리 인간들은 절대자이신 하나님의 말씀에 가타부타 토를 달 수는 없다. 우리는 오직 그 말씀에 따라 사는 우리의 실천선이 있을 뿐이라는 논리.
백상도는 현실의 기독교를 대변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일점 일획도 가감할 수 없다. 우리는 오직 그 말씀에 순종할 뿐이라는 논리 말입니다. 여기서 문제가 발생합니다. 이 명제는 옳습니다만, 그러나 문제는 절대자가 아닌 인간이 절대자의 말씀대로 산다는 것은 애시당초 불가능한 것이라는 데 있지요. 그러나 기독교는 이 사실을 직시하지 못합니다. 성령이 충만하면 이 일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아주 틀린 말은 아닙니다만, 그러나 이 말은 상대 세계에 존재하는 인간이 삶을 통하여 자라가야 하는 문제를 도외시한 발상이란 지적을 면키 어렵습니다.
상대 세계에 존재하는 인간에게 절대 진리는 이상이며 소망이지, 현실이 아닙니다. 그 동안의 인류는 이 이상적인 인간상에 속아 왔습니다. 현실은 비록 거지같을지라도 끊임없는 노력으로 이상 세계를 향하여 나아가자는 구호는 모든 인간들에게 금과옥조가 되었습니다. 백상도에게 있어 성경의 말씀은 하나의 이상이었습니다. 그러나 현실의 백상도는 그 이상을 실현할 능력이 없었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상을 버리지 못했습니다. 그것이 절대자이신 하나님의 말씀이었기 때문이지요. 인간의 고통은, 이상과 현실의 괴리에 그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지 말아야한다는 것은 이상이지만, 그러나 현실의 삶에서는 결코 그럴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인간들은 자신의 무능함을 바라보며 한탄하고 회개하지요. 하지만 이 싸움은 결코 승리할 수 없는 싸움이며, 따라서 영원히 고통 가운데서 벗어날 수 없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할 것인가? 인간의 고통이 하나님의 절대 명령으로부터 유래된 것이라면 죄의 기원도 하나님으로부터 왔다는 얘기가 성립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우리로 하여금 죄를 짓게 하시는 분이냐? 결코 그럴 수 없다고 바울이 외치지 않았더라도, 우리는 하나님이 그런 분은 아닐 거라는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사랑 그 자체시기 때문이지요.
그럼 어디서 문제가 생겼을까요?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명령´으로 이해한 데서 비롯되었습니다. 행할 수 없는 명령을 주시고 그것을 행하지 못했다고 벌 주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라면 그 하나님을 어떻게 사랑의 하나님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은 결코 우리가 행할 수 없는 명령은 주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명령이 아니라 ´약속´입니다. 때가 되면 그렇게 될 거라는 얘기지요. 간음하지 않으리라. 살인하지 않으리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리라.
약속을 명령으로 이해하면 그 명령은 우리를 죽입니다. 그러나 명령이 약속으로 바뀌면 동일한 말씀이 우리를 살리지요. 성경은 구약과 신약, 두개의 언약이며, 절대자이신 하나님이 상대자인 인간에게 주신 절대적인 약속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절대선으로 기능하는 하나님의 명령들을 내다 버려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모든 도덕적 명제들을 쓰레기통에 처넣어야 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 안에 거한다는 말의 초보적 의미입니다. 그리스도 안에는 명령이 없습니다. 정죄도 없고, 비난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오직 우리 있는 그대로를 사랑하십니다. 문제는 내가 나를 사랑하지 못하고, 부족함을 느끼고, 죄인됨을 느낀다는 데 있습니다.
물론 우리는 부족합니다. 그러나 그 부족이 현실이라면 우리는 그 부족을 있는 그대로 받아 들여야 합니다. 그래야 그 부족을 통과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살인할 수밖에 없는 인간이라면 우리는 살인해야 합니다. 여기 도덕적이거나 양심의 가책을 느낄 필요 없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정죄가 없음은 우리가 정죄당할 일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닙니다. 정죄당할 일을 하지 않아서 정죄받지 않는 것이라면 그것은 여전히 율법일 뿐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정죄가 없음은, 우리가 여전히 죄라 이름하는 행동들을 행하더라도, 거기 정죄가 없다는 얘깁니다. 그래야 은혜라는 얘기가 성립합니다.
물론 이 소설의 저자가 이런 내용을 알고 이 소설을 쓴 것은 아닙니다. 저자는 단지 절대선이라 이름하는 성경 말씀의 역기능에 대해서 문제를 제기한 것이지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문제 제기는 일리가 있습니다. 절대선은 사람을 죽입니다. 그렇다면 절대선을 버리고, 상대 세계의 논리로 문제를 풀어가자는 것이지요. 그렇다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백상도보다는 주영섭이 한 걸음 나아가 있다고 보시면 됩니다.
크리슈나무르티가 쓴 <아는 것으로부터의 자유>라는 책이 있습니다. 어쩌면 이 말은 ´절대선으로부터의 자유´라는 말로 바꾸어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하나님을 버릴 때, 거기, 참 하나님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주장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사랑, 그것은 아무 것도 우리에게 요구하지 않습니다. 그저 있는 그대로 우리의 삶을 누리고 우리 생명을 발산하는 것입니다. 사랑이 지니는 이런 속성을 모르면 우리는 여전히 우리를 억누르고 우리를 옥죄는 절대선의 하나님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존재가 되고, 그것이 곧 우리의 죄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 채 생을 마감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모든 이상을 버리고,
절대선으로 기능하는 모든 하나님의 말씀을 버리고,
내가 알고 있었던, 하나님에 대한 모든 지식들을 버릴 때,
그래서 있는 그대로의 나,
존재 그 자체인 나로 돌아 올 때.//
거기 생명이 있고.
거기 자유가 있으며.
거기 사랑이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이란 그런 곳입니다.』
저자가 바라보는 ´소설´은 ´너 자신을 알라´에 바탕을 두고 있고, 또한 그가 바라보는 ´종교´는 ´하나님을 알라´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전자는 인간을 자유롭게 할 가능성이 있지만, 후자는 인간을 노예로 만들 뿐이라는 얘기지요. 음미할 가치가 있습니다. 온전한 자, 성숙한 자에게는 그 둘이 동일한 내용이 되지만, 그러나 어린 자에게는 하늘과 땅의 차이가 있습니다.
자유의 문. 그것은 결국 하나님을 버리는 것이지요. 그 길이 곧 하나님을 만나는 길이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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