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joungul.co.kr 에서
제공하는 좋은글 입니다.
바쁜 일상 속에 잠시 쉬어가는 공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
|
|
|  | 순정 |  | |
| 성석제 : <순정>
출판사 : 문학동네 / 출판일 : 2000/12/1 / 페이지수 : 310
<사는 것은 호랑이 아가리보다 무섭다>
˝나는 이 소설에서, 내가 듣고 보고 겪었으며 앓고 갈무리한 현실의 순수한 재현보다는, 순정한 가짜를 선택했다.˝
내가 아는 성석제는 시를 썼던 사람(86년 시인 등단), 그리고 소설가로서 성공적인 변신(94년)을 시도한 사람이다. 그리고 오늘 그가 쓴 장편 소설 ´순정´을 읽었다.
그 동안 성석제와 나의 인연은 좋은 편이 아니었다. 성석제는 작가로서의 인정과 인기를 얻고 있는 몇 안 되는 젊은 소설가 중의 하나이다. 그래서 생긴 호기심 또는 의무감이랄까, 하여간 도서관에서 그의 시집과 소설집들을 여러 편 빌렸지만, 그때마다 사정으로 번번이 책표지 한 장 넘기지 못하고 다시 반납을 해야만 했다. 그러면서 지난 시간이 어느덧 3년이 되었다. 그리고 지난 초여름, 서점가에서 베스트셀러 자리를 차지한 이 소설을 무슨 생각에서인지 덥석 사버렸다. 그리고, 다시 3개월. 또다시 무슨 이유에서인지 모르게 내 관심 밖에서 성석제의 소설은 책꽂이 한 칸에 다른 책들 사이에서 숨도 못 쉬고 있었다.
그 모습이 처량해 보여서였을까. 망설임 끝에 책을 집었다. 그리고, 그날 저녁부터 성석제는 구수한 입담으로 이야기를 펼쳤고, 난 성석제의 화려한 입심에 넋을 잃고 그의 ´구라´들을 수밖에 없었다.
제목만 봐서는 유행하는 젊은 남녀의 트렌디 드라마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순정´은 내용면에서나 형식면에서나 피카레스크(Picaresque) 소설의 전형을 띠고 있다. 소설을 읽는 동안 그리고 책을 덮으면서 ´폭소를 멈출 수 없다. 눈물, 콧물, 땀을 흘리며 계속 웃는다.´ 소설 속 이치도처럼.
소설의 인물들- 은척의 대장간 주인, 만화방주인, 고물장수, 꼴뚜기, 오징어, 송충이 등등부터 시작해서 반편이 봉달, 춘매, 왕확, 왕두련, 이치도 모두는 별명 또는 특이한 고유명사를 가지고 웃음을 자아낸다.-과 기존의 삼국지류의 영웅 소설을 패러디한 구성, 그리고 작가의 판소리 타령을 연상케 하는 문체 등이 소설을 더욱 소설답게 만든다.
´순정´의 세계는 한마디로 말해서 만화경을 들이대고 바라본 세계이다. 뒤틀리고 엉키고 일정한 무늬로 이산과 집합을 반복하는 요지경 세상이 바로 순정의 무대가 되는 은척이라는 도시이다. 그런 도시에서 태어난 주인물 ´이치도´는 어떤 놈인가. ´도둑들의 물건을 훔쳐온 도둑 중의 도둑´이다.
그는 그만의 인생관 내지 도둑관을 가지고 있다.
´한 사람의 생명처럼 이 세상에 유일 무이하면서 다른 무엇과 바꿀 수 없는 것은 훔치면 안 된다. 도둑에게도 다섯 가지 도가 있나니라. 먼저 훔칠 물건이 어떤 것이며, 자물통은 어떤 게 걸려 있는지 잘 살펴 알아두는 것이 거룩함(聖)이다. 앞장을 서서 훔치러 들어가는 건 용감함(勇)이며 물러날 때 맨 뒤에 서는 것이 의로움(義)이다. 알맞을 때를 보는 게 슬기(智)이니라. 도둑질한 걸 공평하게 나누는 것을 어질다(仁)고 한다. 이 다섯 가지에 정통하지 않고서는 천하에 이름난 도둑이 될 수 없다.´(이상 스승 왕확이 갈파한 ´도둑의 도´)
참으로 거창한 ´좌우명´을 가지고 있는 도둑놈이다. 그는 대부이자 도둑질의 스승인 왕확의 딸 ´왕두련´을 사랑한다. ´도둑이든 깡패든 고수들의 시절은 가고 이제 삼류들만이 남아 망나니 짓거리를 반복하는 이 세계´(신수정, 문학평론가)에서 타고난 거짓말과 도둑질로 세상을 흔든다. (도둑놈의 손아귀에서 놀아나는 세상이라니...)
´순정´이란 소설이 매력적인 이유는 인물, 줄거리 등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무엇보다도 소설을 이끌어 가는 작가의 문체에 있다. ´스토리텔링´이라고도 말하는 이 기법은 작가가 독자에게 ´구연´하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우리의 판소리문체와 흡사한 까닭도 여기에 있다.
˝10여 년 전 판소리에 빠졌던 적이 있었다. 판소리는 말의 군더더기가 없으면서 할 말은 다한다. 정서적으로 핵심을 찌르는 힘이 있고, 가사에 곡진성과 함축성이 있다. 당시 심취했던 기억이 이제 슬슬 약효를 발휘하는 것 같다.˝
라고 말하는 성석제의 말처럼 ´순정´은 판소리타령의 냄새가 짙게 배어있다. 화장실 농담과 욕설, 눈물이 나올 정도로 웃을 수밖에 없는 극적 사건들은 판소리에 등장하는 ´말뚝이´보다 더 풍자적이고 해학적이다. 성석제의 말장난과 언어유희는 더 이상 따를 자가 없는 실력을 갖고 있다. 성석제는 이 소설을 통해서 타고난 이야기꾼의 재능을 여실 없이 드러내주고 있다.
오늘 저녁 따뜻한 이불 속에서 성석제의 또 다른 이야기를 정신없이 듣고 있을 내 모습을 상상하며 입가에 살며시 웃음을 짓는다. (교보문고 전재)
|
|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