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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슴벌레 여자 |  | |
| 윤대녕 : <사슴벌레 여자>
출판사 : 이룸 / 출판일 : 2001년 4월 30일 / 페이지수 : 240
<기억 속에서 진짜 자아를 확인해 가는 일>
내 방안에서 내가 가장 소중히 여기는 공간은 책상이다. 오른쪽으로는 컴퓨터 모니터가 하나 있고 왼쪽의 책장엔 내가 공부하고 또 읽은 책들이 있다. 아무래도 난 이 책상에 들어앉은 물건들이 내 존재를 잘 설명해준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때마다 내 기분에 맞는 글귀나 그림들을 붙여 놓게된다.
어쨌든 하루 일과를 마치고 돌아와 난 제일 먼저 이 그림들 앞에 앉게 된다. 평화로운 시간, 컴퓨터 모니터를 켜고 음악이라도 듣고 있으면 나는 마치 내 작은 방안에 나 말고 다른 누군가가 곁에 있는 듯, 그런 강한 존재감을 느끼기도 한다. 스피커에서 울려 퍼지는 울림들이 때론 어떤 존재보다도 더 강한 존재감을 느끼게도 하는 것 같다. 존재에 대한 통찰이 유난히 두드러졌던 작가 윤대녕의 장편소설 <사슴벌레여자>는 이런 요즘의 나를 들여다보기라도 한 듯 하다. 매일 밤 어떤 기억 때문에 난 매일 밤 내 마음이 닿을 곳을 찾아 헤메이고 내 온 존재를 뒤흔들고 있었다.
여자 주인공 서하숙 역시 매일 밤 그렇다. 이쁘지 않은 외모와 난쟁이 같은 키에 아무도 관심 가져 주지 않는다고 말하는 그녀의 직업은 라면 요리가이다. 그녀는 언제부터인지 라면 이외의 음식은 받아들일 수 없다. 그녀는 가족도 없이 서울 한 복판의 자취방에서 홀로 생을 이어간다. 타인과의 소통은 없다. 라면요리를 개발해서 분식점에 제공해주는 댓가로 생활을 유지하고 그것을 인터넷으로 통해 소개한다. 자신의 홈페이지에 한 밤중 접촉하는 것이 그녀가 타자와 대면하는 유일한 시간이다.
첫사랑을 잃고 직장에서 만난 여자의 배신으로 인한 해리성 기억 상실증에 시달리는 또 다른 남자 주인공인 이성호는 아이러니컬하게도 많은 사람들이 배회하는 시청역 편의점에서 서하숙을 만나게 된다.
많은 사람들로 붐비는 서울 종로 한복판에서의 일상적이고도 기이한 첫 만남. 그 둘은 많은 사람들 속에서 서로의 상실감과 고독감을 알아내기라도 한 것일까. 현대인들의 만남이 이렇지 않을까 싶다. 거리엔 많은 사람들이 있고 또 새로운 사람을 이렇게 자연스레 만나게 될 기회도 많지만, 진정으로 마음을 소통하며 즐겁게 시간을 보내는 사람은 얼마나 될 것인가.
서하숙은 잃어버린 기억 때문에 현실에 적응하지 못하는 이성호에게 이명구라는 사람의 개인 정보를 채워준다. 그녀 역시 기억해내지 않는 단 하루를 다른 이에게 이식받고 살아가고 있다. 이성호는 이명구로서 살아가면서 과거의 존재성을 확인받고 이름을 얻어 얼마간의 생활비와 차도 영위하지만, 혼란스럽기는 마찬가지이다.
이명구의 감정까지 얻게 되어 명확한 한 존재가 아닌 불명확한 두 존재로서 삶이 뒤죽박죽되는 것이다. 결국 이명구의 감정에 조종되어 그의 옛 애인을 자살로 몰아가게 되고 그는 이렇게 흔들리는 존재로는 생을 이어나갈 수 없다는 것을 예감하게 된다.
하지만, 자신이 누구인가에 대한 해답은 이입된 기억을 버리고 다시 이성호로 돌아와서도 찾을 수 없었다. 우연히 옛 동료를 만나 가족을 찾지만, 기억 한 부분이 비어있는 그를 가족들은 받아주지 않는다.
그는 다시 자신과 같은 상실감과 상처에 시달리고 있는 서하숙에게 돌아가게 된다. 그들은 여전히 이식받은 삶을 대신해 살아가고 있을 것이다. 그가 그녀에게 돌아간 것은 여전히 세상과는 소통할 수 없지만, 자신의 처지를 온전히 알아줄 동반자를 하나 곁에 두고 싶은 마음이었을까.
책을 덮고 다시 책상 앞에 앉은 나는 생각해 보게 된다. 지금의 내가 잃어버린 기억을 되살리지 못하는 이성호나 서하숙과 다를 게 뭐가 있냐고 쓸쓸히 내 자신에게 물어보고 있다. 나 역시 늘 여기 앉아 내 존재감을 확인해보지만, 허망하고 고독한 것이다. 나는 오히려 지워지지 않는 어떤 기억 때문에 더 그렇다. 내게 단 한번 일어났던 일들이 내 기억 속에선 수차례 되살아나고, 반복될 때마다 다른 기억으로 날 괴롭힌다. 그에게서 난 무엇이었나, 그 때 난 왜 그런 행동을 했을까, 그 당시 그런 선택을 하지 않았다면 하는 그런 자책들로 말이다.
기억을 잃어버렸든, 기억 때문에 괴로워하든 이러한 괴로움과 고독감은 존재로서는 피할 수 없는 감정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현실에 만족하지 못하기 때문에 오는 괴로움일 수도 있다. 지금의 내 자신에 대한 확실한 답을 찾지 못해서이기도 하고 말이다. 나는 늘 혼란을 느낀다. 진짜 내 모습은 무엇인지. 내가 생각하는 나, 다른 이들에게 보여지는 나, 내가 그들에게 보여지고 싶은 모습. 누군가의 눈을 통해 수없이 다르게 규정되는 나.
과거란 현재의 내 존재를 인식할 수 있는 매개체가 될 수 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고독감이나 상실감속에서도 어떤 존재감을 향해 조심스럽게 다가가다 보면 어떤 진실된 나의 한 부분도 언제가 내 마음속에 닿아지는 날이 있을 거라 생각한다. 상처받지 않기 위해 영원히 진짜 자신의 모습과도 소통할 수 없는 사람이 어떻게 다른 이들을 이해하고 받아드릴 수 있을 것인가.
난 더 가까이 내 기억을 파고들어, 설사 내 마음에 들지 않는 나를 발견하게 된다하더라도 똑바로 날 응시해볼 생각이다. (교보문고 전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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