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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느림 |  | |
| 밀란 쿤데라 : <느림>
역자 : 김병욱 / 출판사 : 민음사 / 출판일 : 1995/4/1 / 쪽수 : 182
할머니께서 고이 잠드신 관이 드디어 방을 나섰다. 항상 그 방은 할머니께서 꾸부정하게 앉아 모든 손님들을 정답게 맞아주시던 곳이었다. 현관 문이 좁아 창문을 통해서 할머니의 관은 여러 사람의 손에 넘겨졌고, 큰 길가에 차려진 빈소 앞의 상두꾼들에게 또다시 넘겨졌다. 관은 상여 위에 안치되었다. 상여 앞에는 제사상이 차려졌고 마지막 제사를 드리기 시작했다. 유사의 애절한 가락에 상두꾼은 짧은 곡을 뒤이어 하고 상여를 올렸다 내렸다 하며 마지막 인사를 가족들에게 남기며 집을 떠난다.
그렇게 떠난 상여는 동네 앞 자그마한 언덕배기의 양지바른 곳에 다다른다. 포크레인이 땅을 깊숙이 파 놓고 휑뎅그렁히 사람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솔직히 하관을 보고 싶었다. 하관을 보면 삶이라는 문제의 윤곽을 어느 정도 알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 관을 넣을 네모난 구덩이에 드디어 관이 내려가기 시작했다. 물론 사람이 구덩이 안으로 들어가 필요한 모든 절차를 밟았던 것은 물론이다. 그리고 포크레인으로 다시 파헤쳤던 흙으로 구덩이를 덮기 시작했다. 모든 것이 한 순간이었다. 그러나 장례는 이틀 더 남았다.
죽음의 절차가 이토록 끈질기게 느린 것은 무엇일까? 모든 것이 한 순간이지만, 그 순간을 깨닫기까지 수많은 일들을 겪어야 된다. 장지까지 따라가 내가 뒤에서 그저 바라보고 있었던 그 풍경엔 어떠한 서두름도 없었다. 관이 땅으로 내려가고 있다. 그리고 포크레인이 설치고 있다. 요즘은 어떻게 해서든지 가속도의 요소가 첨가되어야 사람들이 만족한다. 그러나 그날 난 정말 느림이 삶의 모든 요소에 자연스럽고 전혀 삶에 방해가 되지 않음을 느꼈다. 오히려 포크레인의 그 어색함이 할머니 앞에서 송구스러울 뿐이었다. 어떻게 죽음까지도 신속하고 빠르게 처리하지 못해 땡볕에서 사서 고생을 할까하는 생각이 만연된 요즘이다. 전통풍습이라서 아직까지 이런 장례형식과 절차가 남아있다면 언젠가는 타파되겠지. 그러나 삶과 죽음의 문제 즉 인생에서 우리는 도대체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가를 깨닫는다면 자연스럽게 고민은 해결되리라.
생명이 잉태하기까지 우리는 열 달을 기다리지 않으면 안 된다. 조급하게 마음을 가질 필요가 없다. 그러나 이를 못 참는 현대인들에게는 느림이라는 자연의 숭고한 미덕을 누릴 체질적 바탕을 잃어버렸다. 밀란 쿤데라도 지적했듯이 느림의 한가로움은 빈둥거림과는 전혀 상관이 먼데도 이제는 생명까지도 경쟁 속도의 목록에 넣고 말았다. 현대문명의 우스운 측면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단어가 바로 이 ´느림´이다. 사람들은 이를 수시로 혼동하며 정말 속도가 필요할 때에 빈둥거리고 정말 관조해야 될 때에 사정없이 속도를 밟는 것이다.
수시로 사람들이 죽어나간다. 죽음을 후딱 해치우는 직업이 인기가 있을 법하다. 속도는 경쟁력이고 그 실체가 곧 돈이다. 사랑까지도 속도 경쟁력의 한 품목이다.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거짓인지 서로들 모른 채 속삭이는 연인들. 지긋이 한번 바라보는 것도 귀찮을 지경이다. 초고속이란 단어가 붙기만 하면 최고다. 초고속 사랑을 부추기고 이에 현혹되는 현대인들을 과연 누가 뭐라고 할 수 있을 것인가?
´느림´은 소설이다. 누군가에게 이렇게 하라고 강요하지 않는다. 다만 문학적 분위기가 현대인의 모습 속에 과연 내 모습이 어딘가에 빠르고 무의미하게 사라지고 있다는 것을 일깨워 주는 것 같다. 사랑도 죽음도 삶도 분명 내 안에 있지만 진정으로 그 가치를 깨닫기 위해선 신의 창을 한 번쯤 관조해도 좋지 않을까. (교보문고 전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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