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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인연의 덫 |  | |
| 이시화 : <인연의 덫>
출판사 : 책만드는공장 / 출판일 : 2001/4/12 / 쪽수 : 312
<세상 모든 만남들, 그 깊은 향기의 아득함>
-잊고 있는, 그러나 늘 곁에 있는-
【1】이제 이야기는 끝났다. 불빛 화려한 서울의 밤 거리, 강변 도로, 연안부두, 미사리. 그로부터 강원도 태백으로. 남은 건 깨끗하게 파산한 사업 기반과 파탄 지경으로 일그러진 가족. 그리고 느닷없이 나타난, 자아의 상실감과 존재의 근원적인 문제 앞에 홀로 선, 그런 혼란스러움. 물론 불륜이라는 멍에를 안고 시작되었던 사랑은 치명적일 만큼 아름다웠다.
깊이 베인 상처처럼 아프고 짜릿했다. 남은 것은 무엇인가. 살아온 생애 이상으로 무겁게 등장한, 고귀한 질문들로 시작되는 이제부터의 길은 그 끝이 보이지 않을 만큼 아득할 뿐이다. 버겁고 고통스러운 삶의 여정 어느 정점에서 이서호는 가슴으로 말한다.
˝산다는 건, 인연을 푸는 것이다.˝
고해성사와도 같은 한마디 외침이 독자 여러분을 향해 은근히 들이미는 의미는 대단히 심오하다. 밀교, 전생 퇴행법, 윤회, 예수원. 멀리 있으면서 우리 안에 늘 존재해 온 낯설고도 친숙한 기호들을 통해 작가가 끊임없이 속삭이던 그 이야기이다.
그러므로 책의 마지막 장을 덮은 독자는 이제 새로운 마음으로 다시 첫 장 첫 페이지를 펼쳐들어야 할 것이다. 생의 진실을 고하듯. 그 간절하고 순수한 심정으로.
【2】이시화의 장편 소설 <인연의 덫>은 외형 면으로 독특한 개성을 가진 작품이다. 소설 양식의 얼개 면에 있어서 특히 그러하다. 어찌 읽으면 대단히 단순한 서사 구조를 가진 것 같기도 한데, 한편으로는 대단히 복잡하게 얽힌 중층의 구조를 어렵지 않게 발견해 낼 수 있기 때문이다.(여기서, 우리 주위에 포착되고 인식되는 모든 사물이 다 그렇지 않느냐고 반문하실 분이 있을 것이다. 맞는 이야기이다. 지금 노려보고 계시는 80g 미색 모조지를 예로 들어 본다.
얼핏보기엔 매끈한 표면과 질감의 흔한 종이이겠지만, 남다른 시각을 가지고 있는 누군가는 이 속에서 대단히 복잡한 질서와 혼돈 속에 자리잡은 펄프 섬유의 조직을 발견해 낼 수도 있을 테니까. 어쨌거나.) 소설의 서사를 서사이게끔 도와 주는 요소는 시간과 공간과 인물이다.
이 작품이 가진 단순 서사 구조는, 그 같은 정의를 응용하자면, 주인공 이서호가 전생의 연인 도지선에게 다가가기까지 며칠에 불과한 짧은 일상의 표면적이고 인상적인 스케치 정도로 자리가 매겨질 것이다. 흔한 연애 소설의 형식을 별 고민 없이 차용한. 물론 이 작품이, 비정상적인 관계와 파국의 끝에 선 주인공의 심란한 어제 오늘을 다루었을 뿐이라고 생각하는 독자분은 안 계시리라 믿는다.
그렇다면 소설 ´인연의 덫´이 들려주려는 이야기는 무엇일까. 이쯤에서 소설 속 시간과 공간 배경에 대한 기술 혹은 이론을 다시 한번 들먹여 본다. 중요한 것은 그 경계를 어디쯤으로 규정하느냐이다. 그에 따라 독자는-작품이라는 대화법을 매개 삼아-글쓴이의 내면적 목소리를 더 자세히, 그리고 더 정확히 엿들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시화의 장편 소설 <인연의 덫>의 경우는 어떨까. 감히 말하건대 이 소설의 주인공은 이서호나 도지선이 아니다. 시공간적인 배경도 미사리와 예수원의 거리 정도로 말해질 수 있는 규모(?)는 아니라고 필자는 단언한다.(그렇게 주장할 수 있는 논거는 간단하다. 인간 존재란, 그 시원과 발현은, 세속적인 시공을 넘어선 초월 세상을 향해 활짝 열린 채 끊임없이 진화하기 때문이다. 누군들 삶을 관통하는 그 깊은 진리로부터 감히 등을 돌릴 수 있을까.) 두 가지 단서를 통해, 이제 우리는 이 작품이 흔한 연애 소설의 하나가 아니라는 사실
을 확인했다.
【3】작가와 작품의 관계를, 창조자와 피조물의 그것과 빗댄다면 너무 불경스러운 소리가 될까. 다시 딴소리를 하자면, 종이 하나를 만들어 내는 데에는 펄프 원료를 다듬는 조성 단계로부터 지층 형성, 압착, 건조, 광택 등 정교하고 복잡한 공정이 필요하다. 하나의 수공예품으로서 소설의 경우, 창조의 어려움은 그 이상이 될 수밖에 없다. 재료를 선정하기까지, 아니 작가의 정신을 한 가득 들어내어 거기에 효과적으로 동화될 수 있는 글감을 선정하는 것부터 그야말로 혼이 쏙 빠지는 작업은 시작되는 것이다.
그렇게 완성된 이시화의 장편 소설 <인연의 덫>은 대단히 매력적인 소설이다. 책에서 손을 뗄 수 없는 매력 속에 마지막 장을 덮은 독자라면 작품의 전면(前面)에 오래도록 흐르는 불륜의 향기가, 다소 비정상적(?)으로 보이는 남녀의 사랑이 심오하기 이를 데 없는 인간 존재와 인연의 문제를 다루기에 얼마나 적확한 글감이며 훌륭한 장치였는지를 뿌듯하게 실감하셨을 것이다.
그렇다면, 또한 독자께서는 이서호가 세상의 만남들을 통해 왜 그렇게 고통을 받았으며 그 속에서 깨달아 가게 될 진리의 길이 어디로 향하고 있을지도 능히 짐작을 하셨으리라. 작가 이시화가 보여 준 수행자적 정신과 우주론적인 지혜, 그리고 서사적 능력. 함께 글을 쓰는 문우로서, 그리고 문단 후배로서 존경심과 시기심을 동시에 느끼지 않을 수 없는 대목이다.
【4】장편소설 <인연의 덫>. 어느 정도 눈치를 채신 독자분들이 계시리라 생각되는데, 이 작품에는 한때 작가가 몸으로 부닥치고 감내해야 했던 실제 체험들이 아득한 꿈처럼 어우러져 있다.(그런가 하면 ´했던´이라는 과거 시제를 쓰기가 영 무색해지는, 아직 끝나지 않고 진행 중인 상황도 일부 덧칠되어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이를테면 이서호가 소설의 마지막 장 다음으로 걷게 될, 그러한 상황들 말이다.)
작품의 문학적인 성과 혹은 감동의 깊이가 더욱 진지하고 진실하게 다가오는 데에는 그 같은 사실이 어느 정도는 작용했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문학의 진정성. 그런 말을 꺼내기도 조금은 쑥스러워지는 요즘 세상에, 그러므로 우리는 여러 모로 값있는 작품 한편을 만난 셈이다.
【5】모쪼록 아름답고 심원한 이 작품을 통해 우리가 있고 있던, 그러나 늘 우리 곁에 숨 쉬는 생애의 소중한 질문들을 한번쯤 어루만지는 계기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한차현(소설가)(교보문고 전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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