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의서에 쓰면 안 되는 표현
합의서 마스터·8분·
문제가 되는 문장은 틀린 문장이 아니라 아무것도 가리키지 않는 문장입니다. 원만히·일체·추후처럼 넓어 보이는 낱말은 범위를 넓히는 것이 아니라 문면에서 대상과 시점을 지웁니다.
합의서에 어떤 문구를 넣어야 한다고 정한 법령 조항은 없습니다 · 그래서 이 편이 고쳐 보이는 문장도 정해진 표준 문구가 아니라 무엇을 가리키는지가 드러난 예일 뿐입니다
갑과 을은 상호 원만히 합의하였으며 향후 이의를 제기하지 아니한다.
갑은 2027년 3월 5일 창고 침수로 을의 집기가 젖은 건에 관하여 보수 비용을 지급하고, 을은 그 항목에 관한 요구를 이 합의로 마친다.
합의금은 추후 협의하여 지급하기로 한다.
갑은 위 보수 비용을 2027년 4월 10일까지 을 명의 계좌로 보낸다.
을은 본건과 관련된 모든 권리를 포기한다.
을은 위 집기 손상 항목에 관한 요구를 마치며, 이 문서를 쓰는 날까지 확인되지 않은 손해는 이 합의에서 정하지 아니한다.
틀린 문장이 아니라 가리키는 것이 없는 문장입니다
합의서에서 문제가 되는 표현은 대개 그럴듯하게 읽힙니다.
합의서를 훑어보면 어색한 문장은 잘 보이지 않습니다. 오래 쓰여 온 표현들이라 문장 자체는 매끄럽고, 읽는 사람도 익숙하게 넘어갑니다. 그래서 문제가 늦게 드러납니다.
이 문서에서 문장이 하는 일은 하나입니다. 무엇을 두고 어디까지 정리했는지를 남기는 일입니다. 서로 물러선 범위가 곧 사라지는 범위이므로, 문장이 가리키는 것이 없으면 사라진 범위도 정해지지 않습니다.
그러니 이 편에서 말하는 쓰면 안 되는 표현은 금지된 문구 목록이 아닙니다. 넣으면 무효가 되는 낱말이 정해져 있는 것도 아닙니다. 문면에서 대상과 시점을 지워 버리는 표현들을 모아 둔 것입니다.
고치는 방향도 하나입니다. 문장을 길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가리키는 것을 하나로 좁히는 것입니다. 오히려 짧아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범위를 지우는 낱말들
넓어 보이는 낱말일수록 문면에서 지우는 것이 많습니다.
가장 자주 보이는 것이 일체와 모든입니다. 둘 다 넓게 담으려는 낱말인데, 정작 무엇을 담았는지는 말해 주지 않습니다. 넓이가 힘이 되지 않는 자리라 오히려 범위를 두고 다투게 만듭니다.
그다음이 원만히와 성실히입니다. 태도를 말하는 낱말이라 문서에 들어와도 정해지는 것이 없습니다. 원만히 합의했다는 문장만 있고 무엇을 어떻게 하기로 했는지가 없는 문서를 실제로 자주 봅니다.
추후와 향후도 같은 자리에 있습니다. 앞의 것은 정하지 않겠다는 말이고 뒤의 것은 끝이 없는 시간을 가리킵니다. 둘 다 언제라는 물음을 비워 둡니다.
아래 표는 이런 낱말이 문면에서 무엇을 지우는지를 짝지어 둔 것입니다. 오른쪽 칸을 먼저 읽으면 자기 문서에서 어느 낱말을 찾아야 할지가 정해집니다.
| 문서에서 찾을 낱말 | 문면에서 지우는 것 | 그래서 나중에 |
|---|---|---|
| 일체 · 모든 | 무엇에 관한 것인지 | 그 문장이 가리키는 범위부터 다툰다 |
| 원만히 · 성실히 | 무엇을 하기로 했는지 | 이행됐는지 판단할 기준이 없다 |
| 추후 · 향후 | 언제까지인지 | 기한이 없는 약속으로 남는다 |
| 위 건 · 본건 | 어느 사건인지 | 서로 다른 일을 떠올린 채 서명한다 |
| 상당액 · 적정 금액 | 얼마인지 | 금액을 두고 다시 이야기를 시작한다 |
다섯 줄 가운데 넷째와 다섯째가 특히 눈에 잘 띄지 않습니다. 그 자리에 있던 두 사람에게는 위 건이 무엇인지 분명하고, 상당액이 얼마쯤인지도 서로 알고 있다고 느끼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문서를 나중에 읽는 사람은 그 자리에 없던 사람입니다. 낱말을 고르는 기준을 거기에 두면 대부분의 표현이 저절로 정리됩니다.
다 적은 것 같은데 아무것도 정하지 않은 문장
문장이 길다고 정해지는 것이 늘어나지는 않습니다.
앞의 낱말들이 모이면 문장 하나가 통째로 비어 버립니다. 당사자는 상호 원만히 합의하여 본건을 종결하고 향후 일체의 이의를 제기하지 아니한다는 문장이 그 예입니다. 길고 격식이 있어 보이지만 정해진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이 문장에는 누가 무엇을 하기로 했는지가 없습니다. 어느 사건인지도 없고, 언제까지인지도 없습니다. 남은 것은 다투지 않겠다는 태도 표명뿐입니다.
그런데도 이런 문장이 계속 쓰이는 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양쪽 모두 그 자리에서 편하기 때문입니다. 구체적인 낱말을 넣으려면 아직 정하지 못한 것을 꺼내야 하고, 꺼내면 이야기가 길어집니다.
그 편함의 값을 나중에 치릅니다. 문서를 다시 꺼내 읽는 시점에는 정하지 못했던 것이 그대로 남아 있고, 이번에는 서로 사이가 좋지 않은 상태에서 그 이야기를 하게 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무효인지 아닌지는 다른 자리에서 판단되고, 이 편이 다루는 것은 그 문장이 무엇을 정했는지가 읽히느냐입니다. 무효 여부의 갈래는 취소를 다룬 편에 있습니다.
빼자고 하기보다 한 줄을 더 넣자고 하는 편이 받아들여지기 쉽습니다. 그 문장 뒤에 어느 사건의 어떤 항목인지를 밝히는 문장을 붙이면 됩니다.
그 문장은 성질이 다릅니다. 민사 쪽의 정리와 함께 적히더라도 작동하는 자리가 달라서, 이 글에서는 다루지 않습니다.
세 번째 문답을 따로 둔 이유가 있습니다. 같은 종이에 함께 적히는 일이 잦은데, 두 문장을 같은 기준으로 다듬으려 하면 어느 쪽도 제대로 정리되지 않습니다.
이 편은 민사 쪽의 정리에 관한 문장만 봅니다. 다른 쪽은 다른 편에서 다룹니다.
고쳐 놓아도 안전한 문구가 되지는 않습니다
줄어드는 것은 위험이 아니라 나중에 해석이 갈릴 자리입니다.
표현을 다듬는 이야기를 하다 보면 그대로 옮겨 쓸 문장을 알려 달라는 요청을 받습니다. 그러나 어떤 문장을 넣으면 그다음이 자동으로 정해지는 구조가 아닙니다.
다투어질 때 들여다보는 것은 문구가 어떤 모양이었는지가 아닙니다. 그 종이가 어느 사건의 무엇을 두고 쓰인 것이었는지입니다. 같은 문장이라도 사건과 항목이 다르면 다르게 읽히고, 그래서 표준 문구라는 것이 서지 않습니다.
이 편의 예문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른쪽 문장이 안전해서 오른쪽에 있는 것이 아니라, 무엇을 가리키는지가 문면에서 읽혀서 오른쪽에 있는 것입니다. 자기 사건의 낱말로 바꾸지 않으면 그 문장도 왼쪽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러니 가져갈 것은 문장이 아니라 기준입니다. 이 문장이 어느 사건의 어떤 항목을 언제까지의 것으로 가리키고 있는가. 이 물음에 답이 나오면 표현은 대체로 정리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한 가지를 덧붙여 둡니다. 다듬는 방향이 늘 좁히는 쪽인 것도 아닙니다. 정리하지 않은 부분이 있다면 그 사실을 적어 두는 문장이 하나 더 필요합니다.
빼는 것과 좁히는 것과 밝혀 두는 것은 서로 다른 작업입니다. 표현을 고칠 때 셋을 섞지 마십시오.
우리 문서에서 이런 표현을 찾는 순서
읽어 내려가지 말고 낱말을 세는 방식으로 훑습니다.
문서를 처음부터 읽으면 익숙한 문장에서 눈이 미끄러집니다. 그래서 아래 순서는 읽는 방식이 아니라 세는 방식으로 되어 있습니다. 낱말을 찾는 일이라 빠르게 지나갑니다.
네 단계까지는 문면을 보는 일이고 마지막 단계만 사람에게 묻는 일입니다. 앞의 네 단계에서 찾은 자리를 모아 두었다가 한 번에 이야기하면 대화가 짧아집니다.
고칠 곳이 여러 군데 나와도 문서를 새로 쓸 필요는 대개 없습니다. 가리키는 것을 밝히는 문장을 한두 줄 덧붙이는 것으로 정리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 일체와 모든이라는 낱말을 센다몇 군데에 있는지 표시합니다. 각 자리마다 무엇을 가리키는지 물어보고 답이 나오지 않으면 고칠 자리입니다.
- 원만히와 성실히가 들어간 문장을 찾는다그 문장에서 누가 무엇을 하기로 했는지를 뽑아 봅니다. 뽑히지 않으면 그 문장은 아직 아무것도 정하지 않은 것입니다.
- 추후와 향후를 날짜로 바꿀 수 있는지 본다바꿀 수 있으면 바꾸고, 아직 정하지 못했다면 언제 어떻게 정할지를 대신 적습니다.
- 위 건과 본건이 처음 나오는 자리를 찾는다그 앞에 사건을 지목하는 문장이 있는지 봅니다. 없다면 첫 자리에 한 줄을 넣고 뒤에서는 그대로 받아 씁니다.
- 정하지 않은 부분이 있는지 상대에게 묻는다있다면 이번 합의에서 정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문면에 남깁니다. 이 한 줄이 나중에 가장 크게 쓰입니다.
다섯 단계 가운데 마지막이 가장 미뤄집니다. 정하지 못한 것을 꺼내면 그날 마무리가 안 될까 걱정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정하지 않은 채로 넘어간 부분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문면에 남겨 두었는지 아닌지가 다음 이야기의 출발점을 정할 뿐입니다.
자주 묻는 질문
합의서에 쓰면 무효가 되는 문구가 정해져 있나요?
정해져 있지 않습니다. 넣으면 무효가 되는 낱말의 목록은 없고, 문제가 되는 것은 그 문장이 무엇을 가리키는지가 문면에서 읽히지 않는 경우입니다.
상호 원만히 합의한다는 문장은 넣으면 안 되나요?
넣어도 되지만 그 문장만으로는 정해지는 것이 없습니다. 누가 무엇을 언제까지 하기로 했는지를 밝히는 문장이 함께 있어야 그 문서가 작동합니다.
일체의 청구를 하지 않는다고 적는 것이 왜 문제인가요?
무엇에 관한 약속인지가 지목되어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넓게 적힌 문장은 넓게 통하는 것이 아니라 범위를 두고 다투어질 여지를 넓힙니다.
고친 문장을 그대로 옮겨 써도 되나요?
그대로 옮기면 다시 아무것도 가리키지 않는 문장이 됩니다. 사건과 항목과 시점을 자기 사정의 낱말로 바꾸어야 그 문장이 제 일을 합니다.
금액을 상당액으로 적어도 되나요?
얼마인지가 정해지지 않은 문장이 됩니다. 아직 정하지 못했다면 금액 대신 언제 어떤 방법으로 정할지를 적어 두는 편이 낫습니다.
표현을 다듬으면 나중에 다툴 일이 없어지나요?
없어지지는 않습니다. 줄어드는 것은 해석이 갈릴 자리이고, 무엇을 정리할 것인지에 관한 판단은 여전히 당사자의 몫으로 남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