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자 견적서, 그대로 계약 근거가 되나요
견적서 마스터·8분·
형태로 갈리지 않습니다. 내용으로 갈립니다. 전자적 형태라는 이유만으로 문서의 효력을 부인하지 못하므로, 실제로 다투어지는 것은 그 문서가 얼마나 확정적인 조건을 담고 있느냐입니다.
전자문서법 제4조·제4조의2 의 요지 = 전자적 형태라는 이유만으로 효력을 부인하지 못하고, 열람할 수 있고 형태를 유지해 보존되면 서면으로 본다 · 계약의 청약은 철회하지 못한다(민법 제527조)
근거로 삼기 어려운 쪽
- 품목이 공사 일체·부대비용 일체처럼 뭉뚱그려져 있다
- 금액이 총액 한 줄뿐이라 무엇이 들어갔는지 되짚을 수 없다
- 부가가치세를 따로 받을지 안에 넣을지 아무 표시가 없다
- 이 조건이 언제까지 살아 있는지 적혀 있지 않다
- 누가 언제 만들어 보냈는지 문서 안에 남지 않았다
근거가 되는 쪽
- 품목과 규격, 수량과 단가가 줄마다 나뉘어 있다
- 합계가 어느 줄의 합인지 손으로 다시 셀 수 있다
- 부가가치세를 어떻게 처리하는지 문장으로 적혀 있다
- 언제까지 유효한 조건인지 날짜로 박혀 있다
- 작성자와 작성일, 보낸 경로가 함께 남아 있다
전자 견적서만 유독 효력을 의심받는 이유
종이와 도장을 갖춰야 문서답다고 느끼는 감각이 오래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거래 문서를 주고받는 방식은 이미 대부분 파일로 넘어갔습니다. 엑셀로 만들어 PDF로 바꾼 뒤 메일에 붙여 보내는 것이 기본이고, 상대도 같은 방식으로 회신합니다. 그런데도 문제가 생기면 가장 먼저 나오는 말이 종이로 받아 둘 걸 그랬다는 후회입니다.
이 감각의 뿌리는 오래된 사무 관행에 있습니다. 결재선을 타고 종이가 돌고 마지막에 도장이 찍히면 그것으로 문서가 완성된다고 배운 세대가 아직 실무의 중심에 있습니다. 도장이 없으면 미완성이라는 인식이 자연스럽게 파일에도 옮겨 붙습니다.
여기에 오해를 키우는 요소가 하나 더 있습니다. 파일은 고치기 쉽다는 사실입니다. 종이는 지우면 흔적이 남지만 스프레드시트의 숫자 하나는 소리 없이 바뀝니다. 그래서 파일로 오간 조건은 나중에 서로 다른 숫자를 기억하게 되는 일이 실제로 벌어집니다.
그러나 이 걱정의 정체를 뜯어보면 효력의 문제가 아닙니다. 고쳐졌을지 모른다는 걱정은 무엇이 진짜인지 보여 주기 어렵다는 걱정이고, 그것은 문서가 힘을 갖느냐와는 다른 층의 이야기입니다. 이 글은 그 두 층을 갈라 놓는 데서 시작합니다.
형태를 이유로 효력을 깎는 규정은 없습니다
파일이라서 약한 문서가 되는 일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우리 법에는 전자적 형태로 되어 있다는 이유만으로 문서의 효력을 부인하지 못하도록 정한 규정이 있고, 열람할 수 있고 형태를 유지한 채 보존되어 있으면 서면으로 보도록 하는 규정도 함께 있습니다. 전자문서법 제4조와 제4조의2 가 그 자리이며, 이 글에서 다룰 것은 여기까지입니다.
그다음 층은 계약이 어떻게 성립하는가입니다. 우리 민법은 계약을 맺는 데 특별한 방식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서로 대립하는 청약과 승낙의 의사표시가 합치하면 계약이 성립하고, 그 의사표시가 종이에 실렸는지 화면에 실렸는지는 조문이 묻지 않는 부분입니다.
그래서 파일로 보낸 조건 제시가 종이로 건넨 조건 제시보다 약해지는 구조가 아예 없습니다. 도장이 찍히지 않아 무효라는 말도 근거를 찾기 어렵습니다. 방식을 요구하는 조문이 없는데 도장을 방식의 요건으로 세울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질문을 바꿔야 답이 나옵니다. 이 파일이 힘을 갖느냐가 아니라, 이 파일에 적힌 것이 상대를 묶을 만큼 확정적이냐를 물어야 합니다. 다음 절이 그 갈림길입니다.
실제로 갈리는 자리는 내용의 확정성입니다
제목이 성질을 정하지 않습니다. 무엇을 얼마나 확정적으로 적었는지가 정합니다.
법원이 어떤 의사표시를 청약으로 볼지 청약의 유인으로 볼지 가를 때 쓰는 기준은 두 가지로 압축됩니다. 하나는 그 의사표시의 내용이 명확하고 확정적인가이고, 다른 하나는 표시한 사람이 그 내용대로 구속되려는 의사를 명백히 드러냈는가입니다.
청약이면 상대가 승낙하는 것만으로 계약이 성립합니다. 청약의 유인이면 상대가 응답해도 곧바로 성립하지 않고, 유인한 쪽이 다시 승낙해야 비로소 계약이 됩니다. 이 차이가 실무에서는 상대가 하겠다고 답한 순간 발을 뺄 수 있느냐 없느냐로 나타납니다.
그래서 두 사람이 같은 서식으로 만든 파일을 보냈어도 결론이 갈릴 수 있습니다. 한쪽은 품목과 규격과 단가가 줄마다 확정되어 있고 이 조건으로 진행하겠다는 뜻이 드러나 있는데, 다른 한쪽은 대략의 규모만 알려 주는 참고 자료에 가깝기 때문입니다.
아래 표는 같은 파일 안에서 어느 대목이 확정성을 올리고 어느 대목이 내리는지를 갈라 본 것입니다. 왼쪽 칸을 자기 문서와 맞춰 보고 오른쪽 칸을 읽으십시오.
| 문서에 적힌 상태 | 확정성 | 실제로 벌어지는 일 |
|---|---|---|
| 품목·규격·수량·단가가 줄마다 나뉘어 있다 | 높아짐 | 상대가 그대로 받아들이면 조건이 특정됩니다 |
| 이 조건으로 진행하겠다는 뜻이 문장으로 적혀 있다 | 높아짐 | 구속되려는 의사가 겉으로 드러납니다 |
| 유효한 기간이 날짜로 박혀 있다 | 높아짐 | 언제까지 살아 있는 제안인지가 정해집니다 |
| 현장 확인 뒤 조정될 수 있다고 적어 두었다 | 낮아짐 | 확정이 아니라 협의를 여는 자료에 가까워집니다 |
| 총액만 있고 산출 근거가 없다 | 낮아짐 | 무엇에 대한 합의인지 특정하기 어려워집니다 |
아래 두 줄을 나쁜 것으로 읽지 마십시오. 조건을 아직 확정하고 싶지 않을 때는 오히려 그렇게 적는 편이 안전합니다. 문제는 확정하고 싶지 않으면서 확정된 것처럼 보이게 적거나, 확정할 생각이면서 흐리게 적어 두는 어긋남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는 분명히 해 두겠습니다. 이런 성격의 문서를 두고 법적으로 청약의 유인이라고 못 박은 대법원 판결은 확인되지 않았습니다. 확인된 것은 청약과 청약의 유인을 가르는 일반 기준까지이고, 그 기준을 자기 문서에 대어 보는 일은 결국 내용을 읽는 일입니다.
그러니 구속력이 있느냐 없느냐를 한 낱말로 답하려는 시도를 접는 편이 낫습니다. 답은 문서 종류에 붙어 있지 않고 그 문서에 적힌 문장에 붙어 있습니다.
형태가 문제 되는 순간은 따로 있습니다
효력이 아니라 입증입니다. 무엇이 진짜인지 보여 주는 단계에서 갈립니다.
파일이라서 불안하다는 감각은 틀린 자리를 짚었을 뿐 근거가 없지는 않습니다. 다툼이 벌어지면 상대가 그런 조건을 받은 적 없다거나 받은 파일은 내용이 달랐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때 필요한 것은 효력을 증명하는 일이 아니라 무엇이 오갔는지를 보여 주는 일입니다.
전자적 형태의 서명 역시 그 형태를 이유로 효력이 부인되지 않도록 정해져 있습니다. 다만 그 규정이 보장하는 것은 서명이 무시당하지 않는다는 데까지이고, 그 서명을 누가 했는지를 대신 밝혀 주지는 않습니다. 밝히는 일은 여전히 기록의 몫입니다.
그래서 파일로 보내는 쪽이 챙길 것은 도장이 아니라 흔적입니다. 아래 항목은 다툼이 생겼을 때 실제로 꺼내 보게 되는 것들입니다.
파일로 보낼 때 남겨 두는 것
둘째 칸을 흘려보내는 경우가 많습니다. 조건이 두어 번 바뀌면 같은 이름의 파일이 여러 개 돌아다니게 되고, 나중에 어느 것이 마지막인지 서로 다르게 기억합니다. 판번호 하나가 그 혼선을 대부분 막습니다.
넷째 칸은 앞의 조건을 살려 둔 채 새 조건을 얹지 않기 위한 것입니다. 대체한다는 말이 없으면 상대는 자기에게 유리한 쪽을 골라 잡을 여지를 갖습니다.
자주 뒤섞이는 물음 세 가지
물음이 뒤섞이는 것은 형태와 내용과 입증을 한 덩어리로 보기 때문입니다.
여기까지 읽었다면 세 층이 갈렸을 것입니다. 형태는 효력을 깎지 않고, 힘은 내용에서 나오며, 실제 싸움은 입증에서 벌어집니다. 아래는 이 세 층이 섞이면서 나오는 물음들입니다.
형태를 이유로 효력이 갈리지 않는다는 점에서는 같습니다. 다만 스캔본은 원본이 따로 있으니 원본을 함께 보관해 두는 편이 낫습니다.
이미지 하나로 힘이 붙지는 않습니다. 도장이 하는 일은 누가 만들었는지를 알리는 것이고, 그 일은 작성자와 연락처를 적어 두는 것으로도 됩니다.
그 주장은 효력이 아니라 사실관계를 다투는 것입니다. 보낸 기록과 회신 기록이 남아 있으면 다투는 폭이 줄어듭니다.
셋째 물음은 다음 편으로 이어집니다. 메일과 메신저로 오갈 때 언제 무엇이 성립하는지, 그리고 무엇을 남겨 두어야 하는지는 그쪽에서 따로 다룹니다.
자주 묻는 질문
메일로 보낸 파일도 계약 근거가 되나요?
됩니다. 전자적 형태라는 이유만으로 효력이 부인되지 않으므로, 실제로 따질 것은 그 파일에 어떤 조건이 얼마나 확정적으로 적혀 있느냐입니다.
도장이 없으면 무효인가요?
무효가 되지 않습니다. 우리 민법은 계약을 맺는 데 특별한 방식을 요구하지 않아 도장을 효력의 요건으로 세우는 조문이 없습니다.
PDF로 바꿔 보내면 더 안전한가요?
형태가 효력을 바꾸지는 않습니다. 다만 열람할 수 있고 형태를 유지한 채 보존된다는 점에서 관리가 편해지므로 실무상 널리 쓰입니다.
파일을 보냈는데 상대가 그대로 하자고 하면 바로 계약인가요?
적어 둔 내용에 달려 있습니다. 조건이 확정적이고 그대로 구속되겠다는 뜻이 드러나 있으면 승낙만으로 성립할 수 있고, 참고용에 가까우면 다시 한 번 확인이 필요합니다.
조건을 고쳐 다시 보내면 앞의 것은 사라지나요?
저절로 사라지지 않습니다. 새 문서가 앞의 것을 대체한다는 문장을 함께 적어야 두 개가 나란히 살아 있는 상태를 피할 수 있습니다.
전자서명을 넣으면 누가 서명했는지 증명되나요?
전자적 형태라는 이유로 서명의 효력이 부인되지는 않습니다. 다만 누가 서명했는지는 별개의 문제이므로 발송 기록과 회신 기록을 함께 남겨 두십시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