견적서에 법적 구속력이 있나요
견적서 마스터·9분·
구속력이 있는지는 문서의 이름이 아니라 그 안에 무엇을 적었는지로 갈립니다. 핵심 조건이 특정되어 있고 그대로 구속되려는 뜻이 드러나면 견적서라는 제목이어도 청약으로 평가될 수 있고, 그때는 상대의 승낙만으로 계약이 성립합니다.
청약과 청약의 유인을 가르는 대법원 법리 · 청약의 효력은 민법 제527조·제528조·제529조·제531조 네 조문에 나뉘어 있습니다
그대로 묶일 수 있는 문장
- 총액과 착수일, 납품일이 하나도 비어 있지 않다
- 품목마다 규격과 수량, 단가가 특정되어 있다
- 본 견적 조건대로 진행하겠습니다
- 회신 주시면 바로 착수합니다
- 언제까지 회신해 달라는 기한이 적혀 있다
조율 여지를 남기는 문장
- 표시 금액은 현장 실측 뒤 조정될 수 있습니다
- 수량은 개략이며 확정 수량은 발주 시 정합니다
- 자재 수급 상황에 따라 단가가 달라질 수 있습니다
- 회신을 받은 뒤 당사 확인을 거쳐 확정됩니다
- 본 견적은 참고용이며 계약은 별도 계약서로 체결합니다
견적서니까 참고용이라는 말이 어디서 오는가
견적서를 규율하는 조문이 없다는 사실이 아무 효과도 없다는 뜻으로 건너뛰어 버립니다.
거래 문서를 놓고 법을 찾아보면 어떤 문서에는 조문이 붙어 있고 어떤 문서에는 붙어 있지 않습니다. 세금계산서는 앞쪽입니다. 발급해야 할 의무와 적어야 할 항목이 부가가치세법에 정해져 있습니다.
견적서는 뒤쪽입니다. 무엇을 적으라거나 어떤 서식을 쓰라고 정한 조문이 확인되지 않습니다. 서식도 기재사항도 발급 의무도 법이 아니라 업계와 회사가 각자 만들어 온 것입니다.
여기서 한 걸음이 잘못 건너뜁니다. 규율하는 조문이 없다는 말을 아무런 효과도 생기지 않는다는 말로 바꿔 읽는 것입니다. 그러나 둘은 전혀 다른 이야기입니다. 전용 조문이 없는 문서라도 그 문서가 오간 상황은 계약에 관한 일반 규칙 위에 그대로 놓입니다.
그래서 질문의 형태부터 바꾸어야 답이 나옵니다. 견적서에 구속력이 있느냐가 아니라, 내가 보낸 이 종이가 계약이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어느 자리에 놓이느냐입니다. 자리가 정해지면 구속력은 그 자리에 따라 자동으로 따라붙습니다.
계약이 만들어지는 두 걸음
계약은 청약과 승낙이라는 두 개의 의사표시가 맞물릴 때 성립합니다.
우리 법에서 계약은 서로 대립하는 청약과 승낙의 의사표시가 합치함으로써 성립합니다. 걸음이 둘이라는 점이 중요합니다. 한쪽이 무언가를 내밀고, 다른 쪽이 그것을 받아들이면 그 순간 계약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앞의 걸음인 청약이 무엇인지가 문제가 됩니다. 판례가 쓰는 설명은 이렇습니다. 상대방의 승낙과 결합하여 일정한 내용의 계약을 성립시킬 것을 목적으로 하는 확정적인 의사표시. 받아들이기만 하면 그것으로 끝나도록 이미 내용이 짜여 있는 표시라는 뜻입니다.
청약의 유인은 그 앞 단계에 있습니다. 이쪽은 합의를 구성하는 의사표시가 되지 못합니다. 그래서 상대방이 그에 대응해 의사표시를 하더라도 계약은 아직 성립하지 않고, 유인한 쪽이 다시 승낙의 의사표시를 하여야 비로소 계약이 됩니다.
두 자리의 차이를 거래 장면으로 옮기면 이렇게 갈립니다. 내 문서가 청약이면 상대가 좋다고 회신하는 순간 끝입니다. 청약의 유인이면 상대의 회신은 그쪽의 청약이 되고, 내가 한 번 더 받아들여야 비로소 계약이 만들어집니다.
실무에서 체감되는 차이도 정확히 그 한 번입니다. 내 확인 절차가 사이에 남아 있느냐 없느냐입니다. 그 한 번이 남아 있으면 조건을 다시 볼 기회가 있고, 없으면 보낸 그대로 굳습니다.
둘을 가르는 것은 제목이 아니라 내용
기준은 두 가지이고, 문서에 붙은 이름은 그 두 가지에 들어 있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어느 쪽인지는 무엇으로 정해질까요. 판례가 제시한 기준은 둘입니다. 하나는 의사표시의 내용이 명확하고 확정적인가이고, 다른 하나는 그것을 표시한 사람이 그 내용대로 구속되려는 의사가 명백한가입니다.
이 두 기준에 문서의 제목은 들어 있지 않습니다. 표지에 견적서라고 찍혀 있든 제안서라고 찍혀 있든, 판단은 안에 적힌 조건이 얼마나 채워져 있는지와 그것을 보낸 사람이 어떤 태도를 드러냈는지로 갑니다.
그래서 견적서는 법적으로 청약의 유인이라고 못 박아 외워 두는 것은 위험합니다. 그렇게 단정한 대법원 판결은 확인되지 않습니다. 반대로 핵심 조건이 특정되어 있고 구속되려는 뜻이 드러나면 견적서라는 제목이어도 청약으로 평가될 수 있다는 방향의 설명이 함께 나옵니다.
아래 표는 같은 항목을 두 방향으로 적었을 때 무게추가 어디로 기우는지를 늘어놓은 것입니다. 어느 한 줄로 결론이 나는 것이 아니라 전체를 합쳐 본다는 점을 염두에 두고 보십시오.
| 문서에서 보는 것 | 청약 쪽으로 기울 때 | 유인 쪽으로 기울 때 |
|---|---|---|
| 금액 | 총액이 하나로 확정되어 있다 | 실측·수량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고 적었다 |
| 대상 | 품목·규격·수량이 특정되어 있다 | 개략이며 발주 시 확정한다고 적었다 |
| 일정 | 착수일과 납품일이 못 박혀 있다 | 협의 후 정한다고 남겨 두었다 |
| 회신 처리 | 회신하면 그대로 진행한다고 적었다 | 회신 뒤 당사 확인을 거친다고 적었다 |
| 전체 태도 | 이 조건으로 하겠다는 뜻이 드러난다 | 협의를 위한 자료임을 밝혀 두었다 |
표를 보면 알 수 있듯이 어느 쪽으로 갈지는 보낸 사람이 상당 부분 스스로 정합니다. 조건을 비워 두면 확정성이 떨어지고, 협의를 위한 자료라고 밝혀 두면 구속되려는 의사가 드러나지 않습니다.
반대로 아무 유보 없이 조건을 전부 채워 보내 놓고 나중에 그건 참고용이었다고 말하는 것은 통하기 어렵습니다. 판단의 재료가 이미 문서 안에 다 들어가 있기 때문입니다.
청약으로 평가되면 그다음에 무엇이 달라지나
청약이 되는 순간 네 개의 조문이 순서대로 걸립니다.
자리가 정해지고 나면 그 자리에 붙어 있는 규칙들이 한꺼번에 작동합니다. 민법이 청약에 관해 정해 둔 것을 순서대로 보면 이렇습니다.
첫째, 계약의 청약은 철회하지 못합니다. 민법 제527조가 정한 것으로, 일단 상대에게 도달한 청약을 보낸 쪽 사정으로 거두어들일 수 없다는 뜻입니다. 견적서를 보낸 뒤 물리려는 상황이 여기에 걸리는데, 그 갈림은 따로 정리한 글에서 자세히 다룹니다.
둘째, 그렇다고 청약이 영원히 살아 있는 것은 아닙니다. 승낙의 기간을 정한 청약은 그 기간 안에 승낙의 통지를 받지 못하면 효력을 잃고, 기간을 정하지 않았다면 상당한 기간 안에 받지 못한 때에 효력을 잃습니다. 민법 제528조와 제529조가 각각 그 경우입니다.
셋째, 성립하는 시점이 별도로 정해져 있습니다. 서로 떨어져 있는 당사자 사이에서는 승낙의 통지를 발송한 때에 계약이 성립합니다. 민법 제531조입니다. 메일이나 우편으로 견적을 주고받았다면 상대가 보낸 시점이 기준이 된다는 뜻이어서, 내 받은편지함을 확인한 시각과 어긋날 수 있습니다.
네 조문을 겹쳐 놓으면 청약이라는 자리의 성격이 드러납니다. 거두어들일 수는 없지만 시간이 지나면 스스로 꺼지고, 꺼지기 전에 상대가 발송하면 그 순간 계약이 되어 있습니다.
- 제527조철회
- 제528조기간을 정한 청약
- 제529조기간을 정하지 않은 청약
- 제531조떨어져 있을 때의 성립 시점
여기서 자주 나오는 오해를 하나 걷어 내야 합니다. 위 네 조문은 청약에 관한 것이지 견적서에 관한 것이 아닙니다. 내 문서가 청약이 아니라면 어느 것도 그대로 적용되지 않습니다.
그러니 조문을 먼저 외우는 순서가 아닙니다. 내 문서가 어느 자리에 놓이는지를 먼저 가리고, 그 뒤에 이 조문들을 붙여 읽는 순서입니다.
원하는 쪽을 문서에 드러내는 절차
어느 쪽이 유리한지는 상황마다 다르므로, 정하고 나서 그 결정을 문장으로 남깁니다.
구속력이 있는 쪽이 항상 나쁜 것은 아닙니다. 상대가 흔들리는 거래에서는 조건을 못 박아 보내는 편이 유리하고, 원가가 아직 확정되지 않은 거래에서는 여지를 남겨 두는 편이 안전합니다. 문제는 정하지 않은 채 보내는 것입니다.
정하지 않고 보내면 나중에 그 문서를 남이 읽고 자리를 정해 줍니다. 그 판단은 내가 무슨 생각이었는지가 아니라 종이에 무엇이 적혀 있는지로 이루어집니다. 아래 순서는 그 판단의 재료를 스스로 통제하기 위한 것입니다.
- 이 견적이 확정 조건인지 조율 자료인지 먼저 정한다보내기 전에 사내에서 한 번 정하고 넘어갑니다. 이 결정이 아래 세 단계를 전부 좌우합니다.
- 정한 쪽을 문서 안에 한 문장으로 남긴다확정 조건이면 이 조건으로 진행하겠다는 뜻을, 조율 자료면 협의를 위한 자료라는 뜻을 적습니다.
- 금액이 달라질 수 있는 조건을 적는다실측·수량 변동·자재 수급처럼 금액을 움직일 수 있는 사유가 있다면 무엇에 달렸는지를 밝혀 둡니다.
- 언제까지 유효한지를 적는다며칠로 할지 정해진 값은 없습니다. 기간을 적어 두는 것 자체가 뒤에 걸리는 규칙을 달라지게 합니다.
네 번째 단계에서 일수를 궁금해하는 분이 많은데, 법이 정해 둔 숫자는 없습니다. 업계 자료마다 다른 값을 제시하고 있어 표준이라고 할 만한 것도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숫자가 아니라 적었는지 여부입니다. 기간을 적어 두면 그 기간이 지난 뒤의 처리가 달라지고, 적지 않으면 상당한 기간이라는 불확실한 기준이 남습니다. 그 차이가 실제로 어떻게 벌어지는지는 유효기간을 다룬 글에서 사례로 정리했습니다.
자주 어긋나는 세 지점
도장, 단정, 그리고 말로 한 견적 — 이 셋이 반복해서 틀립니다.
마지막으로 이 주제에서 되풀이되는 잘못된 기대를 짚어 두겠습니다.
첫째, 도장을 찍지 않았으니 아무 효력이 없다는 기대입니다. 계약의 성립에 특별한 방식을 요구하는 조문이 없으므로 날인 여부가 성질을 정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날인도 작성일자도 비어 있는 종이를 완성된 문서로 보지 않은 사례가 있는 만큼, 형식이 아무 의미가 없다는 뜻으로 받아들일 일은 아닙니다.
둘째, 견적서는 청약의 유인이라고 단정해 두는 것입니다. 앞에서 본 대로 그렇게 못 박은 판결은 확인되지 않습니다. 외워 둔 결론에 기대어 조건을 다 채워 보내면, 정작 그 결론이 통하지 않는 문서를 만들어 놓고 안심하는 셈이 됩니다.
셋째, 말로 주고받은 견적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기대입니다. 우리 민법은 계약에 특별한 방식을 요구하지 않아 말로 한 합의도 서면과 같은 효력을 가집니다. 다만 당사자와 목적물, 대금과 지급 시기처럼 본질적인 부분에 의사가 맞아야 하고, 실제로 다투어지는 것은 효력이 아니라 그것을 어떻게 증명하느냐입니다.
세 가지를 합치면 결론은 하나로 모입니다. 견적서의 힘은 문서의 이름이나 도장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적힌 조건과 태도에서 나옵니다. 보내기 전에 한 번 읽어 보고 원하는 쪽으로 적혀 있는지 확인하는 것이 가장 값싼 방법입니다.
자주 묻는 질문
견적서에는 법적 구속력이 전혀 없는 것 아닌가요?
그렇게 단정할 수 없습니다. 핵심 조건이 특정되어 있고 그대로 구속되려는 뜻이 드러나면 견적서라는 제목이어도 청약으로 평가될 수 있고, 그때는 상대의 승낙만으로 계약이 성립합니다.
청약과 청약의 유인은 무엇으로 구별하나요?
판례가 드는 기준은 두 가지입니다. 의사표시의 내용이 명확하고 확정적인지, 그리고 표시한 사람이 그 내용대로 구속되려는 의사가 명백한지입니다. 문서의 제목은 기준에 들어 있지 않습니다.
견적서가 청약의 유인이라면 상대가 좋다고 해도 계약이 안 되나요?
청약의 유인은 합의를 구성하는 의사표시가 되지 못합니다. 상대의 회신이 있어도 곧바로 계약이 되지 않고, 유인한 쪽이 다시 승낙의 의사표시를 하여야 계약이 성립합니다.
견적서에 유효기간은 며칠로 적어야 하나요?
법이 정한 일수는 없고 업계 자료마다 다른 값을 들고 있습니다. 숫자보다 적었는지 여부가 중요합니다. 기간을 정해 두면 그 기간이 지난 뒤의 처리가 달라집니다.
도장을 찍지 않은 견적서도 문제가 되나요?
계약의 성립에 방식을 요구하는 조문이 없어 날인 여부가 성질을 정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날인과 작성일자가 모두 비어 있는 문서를 완성된 것으로 보지 않은 사례가 있습니다.
메일로 주고받으면 계약은 언제 성립하나요?
서로 떨어져 있는 당사자 사이에서는 승낙의 통지를 발송한 때에 계약이 성립합니다. 민법 제531조가 그렇게 정하고 있어, 내가 메일을 확인한 시각과 어긋날 수 있습니다.




